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185강(마26:46-57)(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8. 12. 14:11

마태복음 강해 제185(26:46-57)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513()

 

예수님의 체포과정에 대한 사도 마태의 묘사(26:46-57)

 

첫째로,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말씀하실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칼과 몽치(club)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26:46-47). 가룟 유다가 배신자입니다(26:21, 25). 그가 스승님을 유대교지도자들에게 노예의 값으로 팔아 치우고 있습니다(26:14-16). 본문에서는 예수님이 가룟 유다가 겟세마네 동산으로 적들과 함께 오고 있음을 영적으로 인지하고서 벌써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26:46). 예수님의 예언 그대로 가룟 유다가 대제사장들 및 사두개파 장로들이 파송한 체포 팀과 함께 그날 밤 겟세마네 동산으로 왔습니다(26:2, 46-47a).

왜 하필이면 예수님의 개인적인 기도의 처소가 있는 그곳으로 그것도 한밤중에 체포 팀이 출동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한 마디로 남의 눈을 피하여 기습적으로 체포를 하고자 획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 백주(白晝, 밝은 낮 시간) 대낮에 체포가 이루어진다면 예수님을 지지하는 백성들이 제자들을 중심으로 하여 민란을 일으킬 지도 모르는 상황입니다(26:5). 그리고 어두운 밤중이지만 나사렛 예수를 꼭 집어서 자신들에게 넘겨줄 가룟 유다가 함께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둘도 없는 호기(好機, 좋은 기회)임이 틀림없습니다. 혹시 예수님을 수행하고 있는 제자들이 무력으로 항거를 할지 모르기 때문에 체포 팀은 아예 칼과 쇠뭉치를 가지고 단단히 무장을 하고서 나타난 것입니다(26:47b). 조용한 겟세마네 동산에 갑자기 전운(戰運, 전쟁의 기운)이 감돌고 있습니다.

둘째로,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軍號, 군대의 암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한지라.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26:48-49). 가룟 유다는 예수님이 베다니에 머무르고 계시는 동안의 일정을 한 눈에 꿰뚫고 있습니다. 평소 만찬이 끝나면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습관적으로 가끔 감람 산 겟세마네 동산에 있는 한적한 곳으로 행차를 하여 기도를 하십니다(22:39, 18:2a). 그 일정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가룟 유다가 은밀하게 적들에게 내통하여 물샐 틈 없는 체포의 전략을 세운 것입니다(18:2b).

그러므로 유월절 만찬이 채 끝나기도 전에(13:25-30) 그는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체포할 장소와 시간이 물색이 되었다고 통지를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밤중이므로 예수님의 얼굴 식별을 위하여 자신이 함께 가겠다고 자원했습니다. 차제에 확실하게 공을 세워서 앞으로 자신의 출세에 도움을 받기 위함입니다(18:3). 그리고 암호를 정하고 있습니다. 그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스승에게 키스를 하겠다는 것입니다(26:48). 그것이 신호입니다. 계획대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가룟 유다가 예수님에게 무서운 죽음의 키스를 하고 있습니다(26:49).

셋째로,예수께서 이르시되,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그들이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의 하나가 손을 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26:50-51). 예수님은 이미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습니다. 유대교지도자들에게 넘겨져서 대속의 제물이 되는 길로 가야만 합니다(16:21). 그 일은 만민의 죄를 하나님 앞에 속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며 필수적인 절차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원하고 계시는 그 길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권세와 능력으로 저항을 해서는 안됩니다(26:39).

그러나 수행제자들의 입장은 다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예수님이 자신의 권세를 내려놓고서 인내로써 순종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 위하여 얼마나 피땀을 흘려가면서 그날 밤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기도를 간절하게 드렸는지를 전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26:42-44, 22:44). 따라서 가장 성미가 급한 베드로가 먼저 칼을 빼서 저항을 하고 있습니다(26:51a, 18:10a). 베드로의 칼은 날카롭습니다. 단칼에 유대교의 실세인 전직 대제사장의 하인 말고의 귀를 베어버립니다(26:51b, 18:10b, 13, 26).

본문을 참조하면, 수행제자인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은 보통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성미가 불과 같으며 칼을 제법 사용하는 자들입니다. 그렇게 볼 수 있는 근거를 좀더 제시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베드로는 성질이 급합니다. 갈릴리로 찾아오신 주님을 만나고자 배가 육지에 채 도달하기도 전에 먼저 호수로 뛰어내리고 있습니다(21:7). (2) 세베대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도 성질이 불과 같습니다. 그래서 보아너게’(우레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지니고 있습니다(3:17). (3)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예수님의 통행을 불허하고 있는 사마리아 마을에 불 심판을 내리는 것이 어떠냐고 야고보와 요한이 주장하고 있을 정도입니다(9:51-56). (4) 베드로는 물론 부자인 세베대의 아들 요한도 평소 공부를 등한히 하여 젊은 날 학문이 없습니다(4:13). 그 만큼 공부보다는 몸 쓰기에 익숙한 그들 세 명의 젊은이들이 예수님의 수행제자가 되고 있습니다(17:1, 26:37). 이를테면, 경호원의 역할을 겸하고 있는 것입니다.

넷째로,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26:52-54).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사람의 생각과 뜻이 하나님 아버지의 것과 상당히 다른 경우가 많으며 그때마다 자아(自我, ego)가 살아서 강력하게 저항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처럼 자신의 생존과 안전 그리고 이익을 최대한 도모하려고 하는 원초적인 자아의 발동을 억제해야만 합니다. 그 이유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만민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성도들에게 대속의 삶과 헌신적인 희생을 요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모두의 생명을 살리고 돌보고자 하는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기가 힘듭니다. 자아중심적인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는 사람으로서는 정말 힘든 노릇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베드로를 야단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은 무저항(無抵抗, 저항하지 아니함)으로 체포를 당해서 십자가의 길로 들어서야만 합니다. 그런데 그 뜻을 모르고 스승을 살리겠다고 베드로가 만용을 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은 그 옛날에 이미 베드로에게 하신 바가 있는 다음 말씀을 다시 음미하게 해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하시고”(16:23).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모두에게 자신이 결코 힘이 약해서 체포에 응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혀두고 있습니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26:53). 그러므로 비록 자신에게 충분한 힘이 있으나 하나님의 일을 성사시키기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는 그 힘을 자제하고서 사용하지 아니한다고 하는 그것이 성숙한 신앙인의 자세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인내는 훗날 달고도 풍성한 열매로 반드시 보답을 받게 될 것입니다.

다섯째로,그때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칼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26:55-56). 욥기를 보면, 욥의 하나님 신앙을 시험하고 있던 사탄이 억울해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욥의 몸에 손을 대지 아니하는 조건으로 그의 하나님 신앙을 시험하도록 허락한 결과 사탄이 실패를 했기 때문입니다(1:9-12, 22, 2:3).  그러므로 한번 더 욥을 시험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허락을 구하고 있습니다(2:4-5). 특히 사탄은 욥의 몸에까지 손을 대겠다는 것입니다. 그때에도 하나님은 욥의 생명은 건드리지 말라고 조건을 정하고 있습니다(2:6).

본문에서는 사탄의 사주를 받고 있는 유대교지도자들과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긴급 체포하고자 한밤중에 겟세마네 동산으로 쳐들어왔습니다(11:49-53, 13:27, 26:47). 그러나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예수님의 몸에 털끝 하나 댈 수가 없습니다(2:6). 지난 3년 이상 예수님이 많은 백성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복음사역을 했지만 그들 유대교지도자들이 함부로 예수님을 체포할 수가 없었던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입니다(26:55).

그러나 이번에는 다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모든 사람의 죄를 사해주기 위한 영원한 제물로 삼고자 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신병(身柄, 신분을 확인한 사람)을 유대교지도자들에게 넘겨주고자 하십니다. 십자가 대속의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그 길을 열고 계십니다. 사람의 생각에서 한참 벗어나고 있지만, 예수님이 무저항으로 체포조(逮捕組, arrest team)에게 잡혀서 끌려가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마치 목자를 잃어버린 양과 같이 도망을 치는 것입니다(26:56b). 요컨대, 그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계시 곧 선지자들의 예언을 성취하는 길입니다(26:31, 54, 56a).

여섯째로, “예수를 잡은 자들이 그를 끌고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가니 거기 서기관과 장로들이 모여 있더라”(26:57). 사도 마태는 가버나움의 세관에서 세리의 일을 하던 사람입니다(9:9). 그의 과거 신분은 오늘 날 관세청 공무원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상당히 공식적인 절차를 좋아하고 또 기록을 그렇게 관료적인 입장에서 기술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을 잡으러 온 사람들의 신분부터 그러한 입장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26:47)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의미는 산헤드린 대 공회를 장악하고 있는 사두개인들이 체포 팀을 보냈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현직 대제사장 가야바의 지휘를 받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예수님을 끌고서 그들이 현직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갔으며 공식적으로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바로 참석을 하여서 산헤드린 대 공회가 열린 것으로 기록이 전개가 되고 있습니다(26:57, 22:54, 66).

하지만 그 후에 기록이 된 사도 요한의 글을 참조하면 그 과정이 상당히 다릅니다; “현직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끌고 간 것이 아니고 전직 대제사장이었던 안나스의 저택으로 끌고 갔습니다(18:12-13a). 그곳에서 안나스의 심문이 먼저 이루어집니다(18:19-24)”. 사도 요한은 안나스가 유대교의 실세이며 현직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18:13b). 그리고 안나스는 유대교의 실세답게 전국의 레위인 유력인사들을 모조리 알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갈릴리의 레위인이며 유지인 세베대를 잘 알고 있으며 그의 아들인 사도 요한까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18:15).

그 덕택에 사도 요한이 쉽게 그 집의 대문을 통과했으며 나중에는 베드로까지 데리고 들어갑니다(18:16). 요한은 그의 아버지 세베대 덕택에 안나스 집의 종들의 신상까지 훤히 알고 있습니다. 그는 문지기인 여종과도 안면이 있습니다(18:16-17). 그리고 사도 요한이 베드로의 칼에 귀가 떨어진 바 있는 종이 말고라고 그 이름까지 기술하고 있는 것입니다(18:10).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자신이 죽든지 살든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 드리고자 합니다(26:52-56). 육체적인 고달픔과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자신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합니다(6:38-39). 자신의 인생을 통하여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는 그것이 기도의 제목입니다(26:39, 42). 그러한 인생만이 아버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며 천국에서 하나님 아들로서 떳떳하게 보좌에 앉을 수 있는 것임을 아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로 살고자 하는 거룩한 성도들도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남은 인생을 살아가야만 합니다. 설혹 그 길이 자신의 이익과 뜻을 희생 당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 아버지의 공의인 만인의 생명을 구하고 돌보는 길이라면 그 길을 선택하여 가야만 할 것입니다(26:53-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