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187강(마26:58, 66-75)(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8. 14. 19:18

마태복음 강해 제187(26:58, 66-75)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 5 15()

 

예수님이 당하고 있는 두 가지의 배신; 공회 안에서는 유대교지도자들이, 밖에서는 수제자 베드로가 배신을 하다(26:58, 66-75, 22:61-62).

 

요한복음에 따르게 되면 대제사장들의 하인과 성전을 지키는 병정들이 예수님을 체포하여 제일 먼저 끌고 간 장소가 전직 대제사장인 안나스의 저택입니다(18:12-13). 그리고 안나스의 집 뜰에 들어가서 불을 쬐고 있던 베드로가 스승 예수님을 그곳에서 세 번이나 부인하게 되는 일이 발생을 합니다(18:15-18, 25-27). 그런데 사도 마태는 달리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현직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저택으로 끌려가고 그곳 가야바의 집 뜰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게 되는 사건이 발생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26:57-58, 69-75).

사도 요한이 그와 같이 기술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리고 사도 마태가 또 달리 기술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오늘의 주제와 관련하여 그 점에서부터 묵상을 시작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체포한 것도 그리고 심문한 것도 모두가 불법(不法, illegal)이라고 말하고 싶어합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체포하는데 있어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자가 전직 대제사장인 안나스입니다. 그 사실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병정과 하인들이 예수님을 체포하여 현직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집이 아니라 전직 대제사장인 안나스의 저택으로 끌고 갔다는 대목입니다(18:12-13). 체포의 명령을 안나스로부터 받았으므로 그에게 먼저 예수님을 끌고 간 것으로 보입니다. 사도 요한의 기록의 의미를 좀더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자신의 집에서 대담하게도 안나스가 예수님을 심문하고 있습니다(18:19-24). 그는 현직 대제사장이 아니므로 공식적인 심문의 권한이 없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유대교의 실세이므로 당연히 심문의 권한이 있다고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율법적으로 정당한 것이 아닙니다. 법적인 자격이 아니라 정치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예수님을 함부로 체포하고 동시에 제멋대로 취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사도 요한이 자신과 유대교의 실세인 안나스와의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권력자 안나스는 물론 그 집의 하인들과도 평소 친분이 있으므로 그 집안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이 들어갑니다(18:15). 그러나 함께 온 베드로는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요한이 문지기에게 부탁을 하여 무사히 베드로까지 데리고 들어갑니다(18:16). 그 결과 그날 밤 그곳에서 베드로가 스승이신 예수님을 전혀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게 되는 배신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18:17-18, 25-27).

(3)  사도 요한이 안나스와 가야바와의 관계를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장인과 사위의 관계입니다(18:13). 그리고 안나스가 전전번의 대제사장이며 나중에 자신의 사위 가야바를 대제사장으로 만드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공헌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사위인 가야바가 현직 대제사장으로 있는 동안에는 그 뒤를 봐주고 있는 장인 안나스의 힘은 실로 대단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가 현직 대제사장인지 깜박할 때가 많을 정도입니다. 실제로 복음서의 저자들도 대제사장을 공식적으로 단수가 아니고 복수로 표기하고 있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4)  현직이 아니므로 안나스는 공식적으로 예수님을 체포하거나 심문을 할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수님을 먼저 심문하고 그 다음에 그의 사위이며 현직 대제사장인 가야바에게로 보내고 있습니다(18:19-24). 그 점으로 미루어보아, 안나스는 비록 전직이지만 유대교 내에서 그 세력과 힘은 현직 대제사장 가야바를 능가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는 이미 말씀 드린 대로 당시 현직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입니다(18:13b-14). 따라서 가야바가 정책결정을 할 때에 반드시 안나스의 도움을 구한 것으로 보입니다.

(5)  이미 말씀 드린 바와 같이 그와 같은 흔적이 복음서에 남아 있습니다. 대제사장을 가리킬 때에 표현상 단수를 사용하지 아니라고 흔히 복수로서 대제사장들이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26:59, 11:27, 3:2, 20:19, 18:3). 고대사회의 언어가 단수와 복수의 구별에 있어서 엄격하다는 특징에 비추어보게 되면 상당히 이례적인 표현입니다. 구체적으로,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안나스와 가야바를 구별하지 아니하고 그냥 대제사장에게로 예수님을 끌고 갔으며 그곳에서 대제사장들과 산헤드린 대 공회의 구성원들이 예수님을 심문하고 정죄를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14:53, 22:54, 66).

둘째로, 사도 마태는 달리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잡은 자들이 그를 끌고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가니 거기 서기관과 장로들이 모여 있더라.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가서 그 결말을 보려고 안에 들어가 하인들과 함께 앉아 있더라”(26:57-58). 마태는 그날 밤 예수님이 현직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으로 끌려갔으며 그곳에서 산헤드린 대 공회의 비상회의가 기습적으로 개최되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26:57, 59-68). 그리고 그 저택의 뜰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게 되는 사건이 발생을 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26:58, 69-75). 같은 장소에서 두 가지 사건이 그날 밤 동시에 발생하였다고 강조하고 있는 사도 마태의 기록의 의미가 과연 무엇일까요? 그 의미를 묵상하여 다음과 같이 적어보고자 합니다;

(1)  베드로가 스승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하고 있는데 갈수록 그 강도가 강해지고 있습니다;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26:70). 처음 부인을 할 때에는 단지 모른다고 부인을 하는데 그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26:72). 두 번째에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아마도 하나님이나 조상님을 두고서) 맹세를 함으로써 위기를 벗어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26:74). 마지막 세 번째에는 예수님을 저주하고 있습니다. 그 저주와 맹세를 통하여 겨우 자신의 목숨을 구원받고 있습니다.

(2)  그런데 그것이 과연 올바른 구원의 방법일까요? 사도 마태는 바로 그때에 닭이 울었고 베드로가 예수님의 예언이 생각나서 심히 통곡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26:34, 74-75). 한 마디로, 후회막급(後悔莫及, 이루 말할 수 없는 실책과 회한, being very regretful)하기 이를 데가 없는 자기 한 목숨 살림의 방도에 불과합니다. 진정한 구원의 방법이 아니기에 베드로가 절망 가운데 통곡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과연 무엇을 쳐다보아야만 할까요?

(3)  의사 누가가 절묘하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22:61-62). 첫째, 주님의 긍휼에 찬 그 동정의 눈빛을 쳐다보아야만 합니다. 둘째, 주님의 예언의 말씀을 생각해야만 합니다. 셋째, 회개를 해야만 합니다. 그 세 가지가 영원한 구원, 진정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하겠습니다.

(4)  가야바 대제사장의 저택 안에서는 산헤드린 대 공회의 비상회의가 진행이 되고 있습니다. 바깥 뜰에서는 베드로의 부인사건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안팎에서 발생하고 있는 두 가지의 사건을 사도 마태는 한꺼번에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의도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베드로의 예수님 부인사건이 지니고 있는 상징성의 범위를 알게 해주는 대목입니다;

(5)  첫째, 스승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서 자기목숨을 살린 흉악한 죄인이 바로 자신 베드로라고 간증을 함으로써 그 기록이 모든 복음서에 등재가 되고 있습니다(26:69-75, 14:66-72, 22:56-62, 18:15-18, 25-27). 그 뜻은 다른 제자들은 물론 이 글을 읽고 있는 모든 사람들도 베드로의 간증과 같은 고백에서 자유스러울 수가 없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며 자신은 죄인의 괴수라고 고백하고 있는 사도 바울의 말과 동일한 의미라고 하겠습니다(3:9-10, 딤전1:15).

(6)  둘째, 예수님을 심문하고 정죄했던 산헤드린 대 공회와 유대교지도자들이 모두 죄인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선민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배척하고 죄인으로 처형하고자 심판을 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베드로의 부인사건보다 더 큰 죄악을 저지르고 있으면서도 뉘우치지를 아니하고 있습니다. 사도 마태는 그 사실을 부각시키고자 자신의 복음서를 의도적으로 그와 같이 기술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셋째로, 만약 베드로가 함께 그 집 안에 있었던 요한에게 부탁을 하고서(18:15-16) 자신의 그 불명예스러운 부인사건을 덮어버렸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후세가 그 일을 알 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구태여 그 사건을 거론하지 아니했을 것입니다(22:61). 그러나 베드로는 그렇게 하지를 아니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죄인된 모습과 연약한 모습을 그대로 간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간증을 통하여 성도들이 위로와 격려를 받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세 차례나 부인한 자신과 같은 죄인에게도 부활하신 주님이 찾아오시고 목자로 삼아주셨다는 그 감격과 용서함의 은혜를 온 세상에 전하고자 합니다(21:1-22, 28:16-20). 그 사실을 유대교지도자들이 한번 깊이 있게 생각해보라는 의미에서 사도 마태가 의도적으로 본문을 대제사장 가야바의 저택에서 발생한 두 사건으로 편집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본문에서 보너스로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사도 마태의 동족사랑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획책한 유대교지도자들도 이제는 회개를 하고서 부디 용기를 가지고 주님 앞으로 나아오라는 생생한 메시지를 그의 글이 담고 있습니다. 그 마음은 사도 베드로의 경우에도 동일합니다. 사도행전을 참조하면, 사도 베드로가 성령님이 강림하셨을 때에 동일한 메시지를 본토 유대인들의 말로 동족들에게 전함으로써 예루살렘에서 초대교회가 형성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2:36-42). 따라서 그리스도의 복음에 있어서는 국경이 없다고 하더라도 복음을 전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동족사랑의 마음이 진솔하게 남아 있다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