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188강(마26:57-59, 27:1-2)(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8. 14. 19:20

마태복음 강해 제188(26:57-59, 27:1-2)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516()

 

예루살렘의 산헤드린 대 공회 곧 대제사장 가야바 및 서기관과 장로들(26:57) 사도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집 뜰에서 지켜보는 가운데(26:58) 예수님을 사형에 해당한다고 종교재판을 하고서(26:59) 그 형의 집행을 위하여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27:1) 예수를 끌고서 로마총독 본디오 빌라도를 찾아가다(27:2).

 

본문은 흥미롭습니다.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는 의문사항을 많이 제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의문사항을 질문의 형식으로 만들어서 제시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산헤드린 대 공회의 구성원은 어떻게 분류가 되고 있는가? (2) 왜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만이 로마총독을 찾아가고 있는가? (3) 어째서 공회원 가운데 서기관들은 로마총독을 찾아가지 아니하고 있는가? (4) 당시의 유대교지도자들의 움직임을 증거하고 있는 증인은 누구이며 그가 그 사실을 밝히기 위하여 어떠한 희생을 무릅쓰고 있는가?

사도 마태는 성령의 감동으로 말미암아 위와 같은 질문에 대하여 그 답을 얻을 수 있는 단서를 이미 그의 글에 상당히 실어두고 있습니다. 그래도 의문이 있는 부문에 대해서는 훗날 제4복음서를 저술하면서 사도 요한이 보충설명을 해주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볼 때, 복음서는 서로 연계되어 있으며 그 구성이 치밀합니다. 그러한 정치성(精緻性, 정밀하고도 치밀한 성격)은 같은 성령님의 빈틈없는 동일한 역사이며 비교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입장에서 본문을 한번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산헤드린 대 공회의 구성원은 크게 보아 세 갈래로 분류가 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 서기관들, 그리고 장로들입니다(26:57). 사도 마태는 예수님을 체포하여 끌고 온 그날 밤에 현직 대제사장 가야바의 저택에 그들이 모여서 공회를 열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예수를 잡은 자들이 그를 끌고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가니 거기 서기관과 장로들이 모여 있더라”(26:57), “대제사장들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 증거를 찾으니”(26:59).

그런데 제57절과 달리 제59절에서는 갑자기 제사장이 복수가 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아무래도 전임 대제사장 안나스가, 훗날 사도 요한의 기록을 참조하면, 먼저 예수님을 심문한 다음에 그 신병을 그의 사위이며 현임 대제사장인 가야바에게 넘기면서(18:13, 19-24) 함께 대 공회에 참석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26:59).

공식적인 대 공회는 물론 현임 대제사장 가야바가 사두개인들의 대표인 장로들과 바리새인들의 대표인 서기관들을 소집하여 정식회의를 개최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지만 그 자리에 유대교의 실세인 전임 대제사장 안나스가 참석을 하여 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사도 마태가 은연중에 기술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산헤드린 대 공회는 순수한 종교적인 재판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출발부터 안나스의 외압(外壓, 외부로부터의 압력)과 같은 정치적인 영향력을 많이 받고 있는 회의체임을 짐작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둘째로,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예수님을 끌고서 로마총독 본디오 빌라도를 찾아가고 있습니다(27:1-2). 왜 로마총독을 찾아가고 있을까요? 두 가지의 이유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 유대인들에게는 사형집행권한이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 종교적인 갈등이 아니라 정치적인 이유로 로마제국에 의하여 예수님이 처형된 것으로 둔갑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1)    당시는 로마총독의 군정이 행해지고 있던 시절이므로 사형의 집행권한이 로마총독에게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사도 요한이 명쾌하게 설명을 해주고 있습니다;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그(예수)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나이다”(18:31). 그렇지만 항상 로마총독의 허락을 받아서 사형을 시킨 것은 아닙니다. 몇 년 후 산헤드린 대 공회에서 집사 스데반을 인민재판의 형식으로 돌로 쳐서 죽인 사례가 있기 때문입니다(6:12-15, 7:54-60). 그러므로 다른 이유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2)    예수를 죽이는 이유를 종교적인 갈등이 아니라 정치적인 이유로 둔갑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산헤드린 대 공회는 유대인들 가운데 나사렛 예수를 선지자로 또는 메시아로 여기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26:3-5). 귀신을 쫓아내고 불치의 병자와 장애자를 낫게 했으며 죽은 자를 살려내고 오병이어의 기적까지 베풀었으니 백성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아라고 여기는 것이 당연합니다(6:15, 7:31, 11:45). 현실이 그러하므로 산헤드린 대 공회가 나사렛 예수를 종교적인 갈등으로 말미암아 사형을 시켰다고 한다면 유대교지도자들이 안게 되는 부담이 엄청나다고 하겠습니다.

(3)    따라서 가장 좋은 방법은 로마총독에게 넘겨서 나사렛 예수를 정치적인 이유로 사형을 집행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가 백성들을 선동하여 로마제국에 반역을 도모하였다는 죄목으로 십자가 형벌에 처해지게 되면 됩니다(19:12). 정치적인 음모에 뛰어난 대제사장 가야바와 사두개파의 대표인 장로들이 그 일을 맡아서 처리를 하고 있습니다.

    셋째로, 사도 마태는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21:23, 26:3, 47, 27:1)이라는 표현과 서기관()과 바리새인()’(5:20, 12:38, 23:2, 13)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의미는 전자가 사두개파를 말하고 후자가 바리새파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16:1, 22:34). 그들의 입장은 상당히 차이가 나고 있습니다; “레위인들이 하스모니안 왕조를 시작하였을 때에 정치에 참여하여 유대교의 교권을 장악한 자들이 사두개파입니다. 반면에 정치참여를 하지 아니하고 율법을 연구하여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등 종교교육을 담당한 자들이 바리새파입니다”.

그와 같은 전통에 따라서 사두개파에 속하는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은 유대교의 교권을 지키기 위하여 예수를 잡아서 죽이려고 획책합니다(26:3-4). 반면에 바리새파에 속하는 서기관들과 랍비들은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능력을 빌려서 혹세무민(惑世誣民, 세상을 미혹하고 백성을 무속에 빠지게 함)을 하고 있다고 흑색선전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12:24).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당시 자체 내분을 겪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소수파인 힐렐학파에 속하고 있는 교포출신 바리새인들이 유대교의 개방과 개혁을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일부가 나사렛 예수의 만민구원사상에 동조를 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몇 사람은 초대교회시절 집사가 되고 있습니다(6:5). 반면에 개방과 개혁을 반대하고 있는 보수 강경론자들이 샴마이 학파이며 그들이 다수파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잡아서 죽이려고 하는 사두개인들의 음모에 가담을 하고 있습니다(26:57). 훗날 초대교회시대 랍비 사울이 그러한 입장입니다(8:1, 9:1-3).

그러나 예수님 당시 샴마이학파가 적극적인 행동으로 나서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자체 내분이 염려가 되기 때문입니다. 너무 강경하게 소수파인 힐렐학파를 밀어 부쳤다가는 그 후유증이 심각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로마총독을 찾아가서 예수를 죽이도록 요청하는 일에는 일체 참여를 하지 아니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이 됩니다(27:1-2).

넷째로, 대제사장 가야바의 저택에서 기습적으로 소집되고 있는 산헤드린 대 공회의 회의진행의 내용이 상세하게 기록이 되고 있습니다. 누가 그 회의를 엿보고 있을까요? 사도 베드로입니다; “예수를 잡은 자들이 그를 끌고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가니 거기 서기관과 장로들이 모여있더라.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가서 그 결말을 보려고 안에 들어가 하인들과 함께 앉아 있더라”(26:57-58).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집에서 비상 대 공회가 개최되고 있는 것을 처음부터 멀찍이서 목격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끝까지 지켜보고 있습니다. 새벽 닭이 울고 회의가 끝났을 때에 그는 예수님과 눈을 마주치기도 합니다;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22:61-62).

산헤드린 대 공회가 예수님을 신성모독으로 정죄하고 사형에 해당한다고 종교적인 판결을 내리는 장면을 베드로가 멀리서 지켜본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베드로가 그때의 장면과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증인이 되기에는 큰 난관이 하나 있습니다. 그 자신 공교롭게도 그 당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기 때문입니다. 보통 잘못이 아닙니다. 인간적으로 용서받기 힘든 엄청난 잘못입니다; “첫 번째는 그저 예수님과 자신은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고 진술했습니다. 두 번째는 절대로 예수를 모른다고 하늘을 두고 맹세를 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에는 예수를 저주하면서 배교를 했습니다”(26:69-74).

그와 같은 부끄러운 사실을 진술하면서 베드로가 과연 예수님의 종교재판을 지켜본 사실을 대중들 앞에서 간증할 수가 있을까요? 불가능한 그 일을 사도 베드로가 시행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당시 그를 바라보고 있던 예수님의 눈빛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연민과 동정의 눈빛이 자신을 부인하고 있는 베드로에게 향하고 있습니다. 그 눈빛이 베드로를 향하고 있는 그때에 닭이 울고 있습니다. 새 아침이 밝아오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동정의 눈빛과 더불어 예언의 말씀이 생각이 납니다. 자신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일시에 깨달아집니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습니다. 스스로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그저 대성통곡으로 하나님 앞에 그리고 예수님에게 사죄를 할 따름입니다.

그 다음에는 인간세상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있는 예수님의 그 긍휼의 눈빛이 과연 누구에게 향하고 있을까요? 나머지 제자들일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교지도자들과 그 백성들일 것입니다. 나아가서 로마총독과 군인들일 것입니다. 물론 오늘 날에도 모든 인류에게 미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눈빛을 받는다고 하여 모두가 회개를 하고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결론적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믿음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이 세상에 주신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이 예수님을 통하여 성취가 되고 있으며(24:44-48) 예수님에 대한 그 사형의 집행이 자신을 구원하기 위한 죄 사함의 제사라는 사실을 깨닫고 통회하는 심령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2:36-42). 마치 자신의 처지가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베드로와 같은 형편임을 절실하게 깨닫고 심히 통곡하는 그 사람에게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영광이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는 새로운 의미로 다가올 것입니다(6:4, 8: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