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192강(마27:27-31)(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8. 17. 01:32

마태복음 강해 제192(27:27-31)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520()

 

민란을 예방하기 위한 탁월한 로마총독 빌라도의 책략과 그 때문에 예수님이 당하시는 고난에 대한 사도 마태의 묘사(27:27-31)

 

첫째로, 빌라도는 나사렛 예수를 지지하고 있는 백성들이 소동을 일으키지나 않을지 긴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그는 다음과 같은 조치를 신속하게 취하고 있습니다;

(1) 총독부의 군병들에게 예수를 끌고 관정(官廷, 관아) 안으로 들어가도록 명령하고 있습니다(27:27a). 만약 아무런 대비가 없이 예수를 관아 바깥으로 끌고 나갔다가는 예수를 지지하는 무리들에게 둘러싸여서 큰 소동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고 빌라도가 판단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일단 관아 안에서 다른 조치를 좀 한 다음에 바깥 형장으로 끌고 나가려고 작전을 세우고 있습니다.

(2) 최대한의 병력을 동원하여 예수를 둘러싸고 있습니다(27:27b). 만약에 나사렛 예수의 제자와 지지세력들이 관아를 침범하여 쳐들어올 경우를 예상하여 철저하게 사전대비를 하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3) 예수의 옷을 벗기고 붉은 옷을 입히고 그 머리에 가시관을 씌워서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대내외적으로 알리고 있습니다(27:28-29). 예수일행이 혹세무민을 하고 로마에 반역을 도모했다는 사실을 효과적으로 선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지지하고자 하는 유대인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행동에 나설 수가 없습니다. 행동에 나서는 즉시 그들 역시 로마에 반역을 도모하고 있는 무리임이 틀림없다고 로마총독부는 판단을 하고서 체포에 나설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사렛 예수파의 손발을 가장 효과적으로 묶고 있는 실로 교활한 빌라도의 술책입니다.

둘째로, 빌라도의 만행은 거기에서 그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당시는 로마제국이 유대 땅을 속국으로 다스리고 있던 시대입니다. 따라서 모든 군사력은 로마총독이 독점하고 있으며 명실공히 예루살렘 일대에 엄중하게 군정(軍政, 군사정치)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로마정권은 이민족에 대해서 종교적, 예술적, 학문적 자유를 허용하고 있지만 단 하나 로마황제의 통치에 대하여 반역을 도모하는 자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극형으로 다스렸습니다. 주인을 살해한 노예에게 가하고 있는 극형인 십자가 형벌에 동일하게 처한 것입니다.

그와 같은 중형을 빌라도는 자기가 살겠다고 예수님을 죽이는데 사용한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십자가의 형장으로 보냄으로써 자신의 정치적인 입지를 안전하게 보전하고자 합니다.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오늘날에도 자신의 안전과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 예수님을 속죄양으로 삼는 경우 똑같은 빌라도의 함정에 빠지고 있다. 그와 같은 행동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인의 삶과는 반대이다”(16:24, 27:24-26)라고 하는 사실을 똑똑하게 가르쳐주고 있는 대목이라고 하겠습니다.

셋째로, 자신이 먼저 살아야 하겠다고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주님을 대속의 제물로 삼음으로 하여 예수님이 나 대신 당하고 계시는 슬픔과 고통이 어느 정도인지를 사도 마태는 본문을 비롯한 제27장에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대속의 어린양이 되어 나대신 감당하고 계시는 십자가의 고난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차제에 살펴보고자 합니다.

역사적으로 인류가 고안한 처형방법 가운데 십자가 형벌이 가장 극악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가로와 세로로 세운 나무기둥에 죄수의 양팔을 벌려서 각각 손목에 대못을 먼저 박습니다. 그 다음에 발을 포개어서 그 부위에 더 큰 못을 박아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다음과 같은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1)  체중 때문에 몸이 아래로 쳐지면서 횡경막이 가슴과 맞닿게 됩니다. 숨을 쉬기가 지극히 고통스러워집니다.

(2)  못이 박힌 부위가 체중을 견디지 못하고 점점 벌어지게 됩니다. 더 많은 피가 끊임없이 흘러내리게 됩니다. 길게는 일주일까지 흘러내리게 되는데 보통 사나흘이면 피의 부족으로 죽게 됩니다.

(3)  ()사막성 기후에서 낮의 태양과 밤의 한기 가운데 벌거벗은 채 나무에 매달려 있다는 것은 그 자체가 저주입니다(3:13). 빨리 죽기를 소원하지만 모든 고통과 고난이 지나가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것입니다. 누군가 자신을 창으로 찔러서 빨리 죽게 해주는 그것이 바로 자비를 베푸는 것입니다(19:34).

(4)  십자가 형장으로 죄인을 끌고 가면서 군병들이 희롱을 합니다(27:30-31). 그리고 형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쳐다보며 손가락 짓을 하고 욕설을 합니다(53:8). 한 마디로,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게 됩니다. 그 모든 고통을 견뎌야만 하는 것이 십자가의 극형인 것입니다.

넷째로, 왜 그와 같은 극형의 방법을 인류가 고안하게 되었을까요? 그 근원에 대하여 여기서 알아보고자 합니다. 십자가 형벌은 본래 페니키아인들에 의하여 고안이 된 것입니다. 그들은 지중해에서 해상무역을 통하여 부국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바다무역에는 큰 위험이 뒤따르고 있습니다. 태풍을 만나는 것도 큰 일이지만(27:13-20)  이민족출신인 선원들이 선상반란을 일으키는 것이 더 큰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선상반란을 사전에 예방할 수가 있을까요? 그 방법이 주모자에 대한 십자가처형입니다.

모두가 보는 갑판 높은 돛대에 반란자의 팔을 벌려서 아예 못을 박아 버립니다.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일체 공급하지 아니합니다. 서서히 고통 가운데 죽어가는 과정을 모두가 바라보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 광경을 바라보는 자마다 자신의 머리와 심장 속에 철저하게 새기게 됩니다; “선상반란을 도모한 자의 최후가 너무나 끔찍하고 처참합니다”. 그러한 목적으로 페니키아인들이 역사적으로 십자가 극형을 개발한 것입니다.

페니키아가 멸망을 하자 남은 식민지 가운데 카르타고가 융성을 했습니다. 그들이 십자가형을 도입하면서 지중해의 무역에 강자로 나섰습니다. 필연적으로 같은 시대에 웅비하고 있는 이태리 반도의 로마와 지중해의 패권경쟁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포에니 전쟁의 원인입니다. 오랜 전쟁에서 카르타고가 패하여 사라졌지만 십자가 처형의 방법은 로마제국에 도입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너무나 잔혹한 처형의 방법이기에 로마정권은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자에 대해서는 십자가 형벌을 적용하지 아니했습니다.

다섯째로, 사도 마태가 기술하고 있는 구절의 내용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27:27-28); 예루살렘을 위시한 유대 땅에서는 로마총독의 군정이 시행되고 있습니다. , 로마군대의 힘에 의하여 정치질서와 사회안정이 이루어지고 있는 시대입니다. 지금 로마황제에 대한 불온사상을 전파하였다고 하여 반역자로 판결이 난 자칭 유대인의 왕예수가 십자가 처형장으로 향하기 직전입니다. 로마병정들이 예수를 놀리고 있습니다. 왕복을 흉내내어 붉은 전포를 입히고 있습니다.

(2)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27:29); 누구나 그 머리에 왕관을 쓰기를 원합니다. 머리를 찌르는 가시관을 써보려고 하는 자는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타의에 의하여 가시관을 쓰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명예와 영광을 얻는 것이 아니라 멸시와 희롱의 대상으로 전락을 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치욕스러운 마이너스의 인생이며 고통입니다. 역설적으로, 그만큼 사람들의 죄를 짊어지고 있다고 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권위 있는 왕의 홀 대신에 하나님은 로마병정을 동원하여 예수님께 갈대를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도 상하게 할 수 없는 갈대의 홀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그 홀은 생명을 살리는 권능이기에 사람을 상하게 할 수 없는 갈대가 제격이라고 하겠습니다.

(3)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27:30); 왕에게 침을 뱉고 그 머리를 갈대로 치는 자는 어떻게 될까요?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아야만 합니다. 그런데 로마병정들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감히 침을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 머리를 치고 있습니다. 모두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입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러 오실 때에 그들은 어떻게 될까요? 하나같이 죽은 목숨에 해당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한번 용서해주고자 하십니다. 그것이 십자가를 지시는 이유입니다.

(4)  희롱을 다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27:31); 세상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에 대하여 어떠한 잘못된 행동을 하는지 이 대목이 적절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째, 희롱을 합니다. 둘째, 십자가에 못을 박으려고 합니다. 풀이를 해보자면, 눈에 보이는 그대로 별로 힘이 없고 항거할 능력도 없어 보이는 예수님에게 한 행동이 그대로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에게 행해지고 있는 사람들의 행위입니다(25:40-46).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세상 왕의 능력보다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방법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세상적인 방법을 선호합니다. 그것이 즉효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죽여버리고 제멋대로 한 세상을 살아보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 결과가 어떻게 될까요? 한 마디로, 가룟 유다처럼 후회막급입니다(27:3-5).

 끝으로,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로마병정의 모습이 세상을 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인 것만 같습니다. 로마병정처럼 예수님의 복음이 천하에 어리석은 방법이라고 희롱을 합니다. 그리고 죄를 계속 범하면서 예수님을 계속 십자가의 길로 보내고 있습니다. 언제까지 그렇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되풀이해서는 안된다고 하는 것이 성경말씀이며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12:3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8:11). 자신의 잘못과 그 허물을 십자가의 은혜로 용서함 받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는 다시는 같은 잘못을 되풀이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람은 또 습관적으로 재범을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결론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 말씀이 다음과 같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1:8).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어야만 합니다. 그 능력으로 새로운 인생이 창조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의 영이신 성령님을 의지하여 살아가는 성도의 거듭난 삶입니다. ‘1:8’절이 말하고 있는 예수님의 증인이란 말로써 복음만을 전하는 자가 아닙니다. 그 행동과 삶이 예수님의 제자답게 변화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거룩한 삶, 성화의 과정이 성령님의 능력을 의지함으로 자신 속에 이루어지고 있음을 이웃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요컨대, 자신의 능력이 아니고 오로지 하나님의 영적인 능력에 의하여 새로운 인생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 그것이 능력 있는 증거자의 삶이라고 하겠습니다(28:18-20, 1:37-38, 3:3-15, 8: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