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196강(마27:47-50)(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8. 18. 08:14

마태복음 강해 제196(27:47-50)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524(주일)

 

예수님의 고통에 찬 마지막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의 마지막 교만에 대한 사도 마태의 묘사(27:47-50)

 

사도 마태는 십자가 처형장에서 사람들이 엘리야를 언급하고 있음을 적고 있습니다(27:47, 49). 그 의미가 무엇일까요? 또 하나 본문에서 묵상을 해보아야 하는 사항이 있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던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신 포도주를 해면에 묻혀서 예수님의 고통을 덜어주고 있습니다(27:48).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창에 옆구리가 찔리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19:34) 과연 엘리야가 와서 예수를 구원해주는지 지켜보자고 말하고 있습니다(27:49). 두 가지의 질문에 대하여 지금부터 묵상을 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왜 사람들이 엘리야를 언급하고 있는 것일까요? 두 차례나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마지막 숨을 내쉬면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27:26)라고 아람어로 부르짖고 있을 때에 그 절규를 들은 유대인들이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27:47)고 말하고 있습니다. 둘째, 예수님의 마지막 고통을 덜어주려고 어떤 사람이 신 포도주를 해면에 적셔서 그 입에 축여주고 있습니다(27:48). 그 모습을 보고서 주위의 사람들이 제지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한 마디를 하고 있습니다; “가만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27:49). 참고로, 어떤 사본에서는 예수님의 주검을 보면서 다시 창으로 찔러서 확인사살을 하고 있는 광경을 보면서 유대인들이 똑 같은 말을 했다고도 합니다(19:34).

위와 같은 두 가지의 사실을 깊이 생각해보면 유대인들이 평소 지니고 있는 엘리야 신앙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다음과 같이 가늠할 수 있게 됩니다; 첫째, 하늘에 올라간 엘리야가 다시 이 세상에 와서 사람들을 하늘로 옮긴다는 사상입니다(왕하2:11). 둘째, 엘리야만이 유대인들의 역사 가운데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하늘로 옮기어져 간 유일한 선지자입니다. 참고로, 에녹의 휴거가 있지만(5:24) 그것은 노아의 홍수가 있기 전, (, old)인류의 역사에 속하므로 유대인의 역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누구나 엘리야처럼 구원을 받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셋째, 유대인들이 표적을 보기를 심히 원하고 있습니다(12:38, 16:1). 그 표적 가운데 최상의 것이 바로 엘리야의 표적입니다. 그와 같은 유대인들의 엘리야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그들의 잘못된 견해를 다음과 같이 시정해주고 있습니다;

(1)  예수님은 하늘에 올라간 엘리야가(왕하2:11) 다시 이 세상에 와서 사람들을 하늘로 옮겨간다는 사상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정확하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3:13-15). 예수님의 가르치심 그대로 엘리야는 본래 하늘에서 온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구원을 위하여 대속의 십자가를 지는 자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에게 영생의 구원을 줄 수 있는 자가 결코 아닙니다. 그 사역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만이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엘리야만이 유대인들의 역사 가운데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하늘로 옮기어져 간 유일한 선지자입니다. 그러므로 유대백성들은 누구나 엘리야를 부러워하고 있습니다.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천국으로 갈 수가 있다는 것이 진정한 구원이며 생명이며 장수함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30:20).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다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11:25-26). 예수님께서는 부활의 주님이십니다. 부활이라고 하는 것은 죽고 다시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부활한 다음에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또 인생을 살다가 죽고 다시 살아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무릇 살아 생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한번 죽고 부활한 다음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는 영생의 존재가 됩니다(11:26). 천국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되는 삶의 특징을 예수님이 이미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22:30).

(3)  유대인들이 표적을 선호합니다(12:38, 16:1). 그 표적 가운데 특히 엘리야의 표적을 보기를 원합니다. 엘리야가 유대인들의 역사 가운데 다음과 같은 놀라운 표적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첫째, 간절히 기도한 결과 36개월 동안 비가 내리지 아니했으며 다시 기도하니 비가 내렸습니다(왕상17:1, 18:1, 41-46, 5:17-18). 둘째, 제자 엘리사가 보는 가운데 요단 강가에서 하늘로 올라 갔습니다(왕하2:11-12). 그러므로 엘리야는 선지자 중의 선지자입니다. 그가 종말의 때에 다시 이 세상에 온다고 마지막 선지자 말라기가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4:5). 그때 엘리야를 만나서 회개를 하는 자는 저주를 받지 아니하고 살아남는다는 것입니다(4:6).

(4)  엘리야가 이 세상에 다시 오게 되면 틀림없이 다시 놀라운 표적을 보여줄 것입니다. 그러면 백성들은 그를 영접함으로써 종말적인 하나님의 진노를 면하고 구원을 받을 수가 있게 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선지자 엘리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요단 강가에 세례 요한이 나타났을 때에도 묻고 있습니다; “또 묻되, 그러면 누구냐? 네가 엘리야냐? 이르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1:21). 그러나 예수님은 달리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된 신앙은 엘리야의 표적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요나의 표적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12:38-40, 16:4).

(5)  풀이를 해보자면, 회개를 한 선지자 요나가 죽음의 바닷속 큰 물고기의 뱃속에서 3일간을 지낸 후에 다시 살아서 땅을 밟습니다(1:12, 17, 2:10). 그리고 사역지 이방 땅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3:3-4). 그 결과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게 되는 역사가 임하고 있습니다(3:5-10). 그와 같이 이방 땅에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게 만드는 것, 그리고 죽음과 부활의 역사를 경험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표적이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유대인들이 선택을 해야만 합니다; “선민들에게 익숙한 엘리야의 신앙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요나와 같은 회개를 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 들일 것인가?결론은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이유는 변화산상에서 엘리야와 모세가 모두 사라지지만 예수 그리스도만이 남아서 제자들에게 천국복음을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17:5, 8).

둘째로, 어째서 예수님을 동정하고 있는 착한 사람은 한 사람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냉소를 날리고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예수님의 죽음에 아랑곳하지 아니하고 그들은 또 하나의 표적을 보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그 의미를 깊이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1)  먼저 착한 한 사람에 대해서 생각을 해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운명을 앞두고서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 아버지에게 맡기고자 그 이름을 간절하게 부르고 있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27:46). 숨이 끊어지기 직전의 그 고통이 너무나 심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는 모습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도와주지 아니하시니 도저히 자신의 육체로써는 더 이상 견딜 재간이 없다는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떠나지 마시고 부디 도와달라는 간구입니다. 더 깊은 내용은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으니 부디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 아버지의 손으로 거두어달라는 것입니다(23:46).

(2)  그 정도로 십자가상의 고통은 공포스러운 것입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백성 가운데 한 사람이 해면에 신 포도주를 적셔서 막대를 이용하여 예수님의 입에 적셔주고 있습니다(27:48). 일종의 마취효과를 가진 진통제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고마운 백성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한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백성들의 태도입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이제 막 숨이 넘어가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엘리야가 와서 과연 그를 구원해주는지 조용히 지켜보자고 말하고 있습니다(27:49).

(3)  어떤 사본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시고 나서 그 주검이 땅으로 내려졌다고 합니다. 그때 확인사살을 하기 위하여 병정들이 창으로 옆구리를 찔렀습니다(19:34).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체내의 물과 피가 모두 쏟아졌습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백성들이 똑 같은 멘트를 날렸다는 것입니다; “가만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원하나 보자”(27:49). 그 말 가운데에는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에 대한 선민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죄 때문에 저주를 받아서 당연히 십자가 처형이 된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둘째, 예수님의 죽음에 아랑곳하지를 아니하고 자신들의 호기심만을 충족시키려고 합니다. 생전에 많은 이적을 행한 예수이니까 이제 죽었다고 하더라도 혹시 엘리야가 와서 살리는 기적이 발생할지도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4)  또 하나의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것은 아주 비열한 냉소입니다. 예수는 거짓말쟁이이므로 선지자 엘리야가 와서 구원을 해줄 이유가 전혀 없다는 확신입니다. 그러므로 지옥에나 가라는 식으로 그러한 멘트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생각을 전혀 읽지 못하고 있는 선민들의 교만입니다. 역사적으로 바라보게 되면, 유대인들은 자기들끼리 1,400년 넘게 모세의 율법을 보전하면서 유대교를 지켜왔습니다. 그 결과 이제는 자신이 생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지 아니하셔도 선지자 엘리야가 와서 선민들에게 하늘 문을 열어줄 것입니다. 메시아가 다윗의 후계자로 오게 되면 외세를 쳐부수고 시온의 영광을 다시 떨칠 것입니다.

(5)  더구나 성령님의 감동을 받은 선지자가 더 이상 출현을 하지 아니해도 선민들은 문제가 없습니다. 히브리정경을 해석하고 백성들에게 생활율법으로 가르쳐줄 수 있는 랍비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시대에 나사렛 예수가 와서 유대교리와 다른 주장을 했습니다. 만민구원사상을 하나님의 말씀의 본래의 뜻이라고 설파한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듯이 이방인을 사랑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죄인을 구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론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주장이 말로써만 그치고 있지를 않습니다. 복음사역의 현장에서 많은 하나님의 능력이 선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죽은 나사로까지 살려내고 있습니다. 더 이상 방치를 했다가는 많은 백성들이 유대교를 떠나서 모두 나사렛 일파가 될 것만 같습니다.

(6)  그래서 예수를 처단하고 있습니다. 다행히 로마총독이 유대인들의 요구를 들어주었습니다. 이제는 예수가 자신의 예언처럼 다시는 살아서 나오지 못하도록 저주를 하는 일만이 남아 있습니다. 그 저주가 예수만은 엘리야의 도움을 받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유대인들은 엘리야가 와서 모두 천국으로 인도할지라도 예수만은 아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예 장담을 하고 있습니다; “가만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원하는지 보자, (장담하건대 그를 구원할 리가 없을 것이다!) 하더라”(27:49).

  결론적으로, 유대인들의 장담이 틀렸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사람들의 상상력의 한계를 한참이나 뛰어넘고 말았습니다. 삼일만에 예수님은 부활의 몸을 입고 세상에 다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40일 후에는 베다니에서 승천을 했습니다. 유대인들의 해석이 아니라 선지자들의 예언이 그대로 성취가 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도 부활의 날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천국의 잔치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오늘도 지상명령을 수행하면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