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200강(마27:47-66)(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8. 19. 22:56

마태복음 강해 제200(27:47-66)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528()

 

평소 예수님이 생전에 말씀하신 죽은 지 사흘 후에 부활할 것이라는 예언’(16:21, 17:22-23, 20:18-19)이 어떤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27:47-66) 그 가운데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며 자신의 부활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인가?(28:1-20)

 

첫째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바라보면서 가만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원하나 보자”(27:49)고 냉소를 날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선지자 엘리야는 구원주가 아닙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가 사람을 죽음에서 구원하여 천국으로 인도할 수 있는 선지자로 둔갑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일종의 미신적인 관념입니다.

그 이유를 히브리정경에서 굳이 찾아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난 지라”(왕상17:22), “두 사람이 길을 가며 말하더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갈라놓고 엘리야가 회오리 바람으로 하늘로 올라가더라”(왕하2:11),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4:5-6).

풀이를 해보자면 첫째, 선지자 엘리야가 죽은 사람을 살린 첫 번째 선지자입니다. 둘째, 유대의 역사에 있어서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하늘로 올라간 유일한 선지자입니다. 셋째, 종말심판이 임하기 전에 하나님 신앙을 회복할 선지자입니다. 그러므로 그 세 가지의 관념을 적극적으로 연결하여 해석해본다면 엘리야가 종말의 때에 천국에서 이 세상에 와서 선민들을 구원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적임자일 것만 같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다음과 같기 때문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로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3:13-16). 이제 예수님 당시 유대백성들이 믿고 있는 믿음과 예수님이 복음으로 말씀하고 계시는 믿음의 차이를 볼 수가 있습니다; 유대백성들은 히브리정경의 말씀을 해석하여 선민 이스라엘이 쉽게 구원을 얻을 수 있는 하나의 종교적인 전통과 그 관념론에 푹 빠져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엘리야가 다시 와서 그들을 구원하여 준다는데 신앙생활에 있어서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주장은 다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뜻과 구원의 방법론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구원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며 하나님의 아들을 통하여 이루어진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제 부활과 영생을 고대하는 백성들에게 하나의 심각한 질문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어느 쪽을 믿으시고 구원을 얻으시겠습니까? 유대인들처럼 선민들의 종교적인 전통과 관념에 젖어서 평소에 익숙한 대로 그냥 신앙생활을 계속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예수님께서 강조하고 계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과 그 뜻에 대한 정확한 해석 곧 복음에 근거하여 직접 성경말씀을 공부하고 기도하면서 깨달음을 얻어 그것을 실천하는 신앙생활을 영위하시겠습니까?결론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죽은 자를 살리기 위하여 다시 오심을 결코 놓쳐버리지 아니하는 신앙생활이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둘째로, 이방인인 로마의 군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동시에 발생하고 있는 기이한 현상을 바라보며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27:54)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헬라인들과 로마인들은 좀 다릅니다; 헬라인들은 철학과 학문 그리고 예술에 뛰어납니다. 그것은 현실적인 사고보다는 관념적인 사고에 있어서 더 강하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로마인들은 그 반대입니다. 굉장한 현실주의자들입니다. 그들은 법과 질서 그리고 군사력을 중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계적인 로마제국을 경영함에 있어서 현실론에 입각하여 이성적인 판단을 중시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입장에서 바라보게 되면, 로마군인들이 인정하고 있는 대목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상이 현실적으로 골고다 언덕에서 발생하고 있다는 뜻입니다(27:50-54). 그리고 이방인들이 현실적으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이기 시작하고 있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그 출발점이 바로 골고다 언덕, 그 대속의 십자가를 끝까지 지시고 죽음을 맞이하시는 장소입니다.

셋째로, 그 모든 일을 지켜보고 있던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는 조용히 예수님의 시신을 인도받아 정성을 다하여 장례를 드리고 있습니다(27:57-60).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예루살렘 산헤드린 대 공회의 구성원들입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 곧 사두개인들은 유대교의 교권을 쥐고서 그것을 휘두르는데 관심이 지대합니다. 반면에 소위 서기관들로 불리고 있는 대 공회 내의 바리새인들은 율법학자들입니다. 그들은 히브리정경을 해석하고 백성들에게 종교교육을 시키는 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유대교의 개방과 교리의 개혁을 주장하고 있는 소수의 힐렐학파들이 있습니다. 주로 교포 유대인 출신입니다.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도 그러한 학파에 속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헬라와 로마의 세계에 국제적으로 유대교의 영향력을 넓히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유대교의 세계화를 꿈꾸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들의 시야에 진작부터 나사렛 예수의 복음사역의 특징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차별 없는 만민구원사상을 부르짖고 있으므로 그들이 원하고 있는 유대교의 개혁개방노선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큰 문제점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산헤드린 대 공회의 분위기가 나사렛 예수에 대하여 적대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는 대 공회 내에서 바짝 몸을 낮추고서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큰 행동의 변화가 그들에게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갑자기 소매를 걷어 붙이고서 로마총독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시신을 받아서 장례를 치르고 있습니다. 특히 요셉은 자신이 마련해둔 비싼 바위굴 새 묘실에 예수님을 안장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그들의 생각과 행동을 변화시키고 있는 것일까요? 한 마디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이 허무한 죽음이 아니라 모두를 구원하기 위한 대속의 죽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동안 지성소와 성소를 구분하고 있던 휘장 문이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두 토막이 났다는 사실을 첩보로 접하고서 그들은 놀랐습니다. 폐쇄적인 유대교, 대제사장만이 들어가서 신탁을 받을 수 있는 지성소의 차폐장치가 깨어져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새로운 시대의 창조로 나아가고 있다는 신호탄입니다(1:16-17). 그들은 일시에 예수님의 예언의 말씀과 평소 복음사역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확연하게 깨달을 수가 있었습니다(24:44-48). 이제부터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의미를 깨닫게 된 자신들이 새로운 시대에 동참하기 위하여 움직여야만 할 때입니다. 그 첫걸음이 예수님을 장례하고 자신들이 마련한 묘실에 정성껏 모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의 제3일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넷째로, 막달라 마리아와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는 기이한 일을 경험하면서 절망에서 소망으로 생각이 바뀌고 있습니다(27:56, 61). 아들을 죽음을 보고 있는 여인과 여사도로 부를 수 있는 헌신적인 여인에 대한 기록이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남아 있습니다. 그들의 절망은 예수님의 가장 고통스러운 죽음을 지켜본 것입니다(19:25). 그런데 그 절망의 끝에 이상한 일들이 연달아 그곳에서 발생을 하고 있습니다; 지진과 터져나가는 바위, 갈라지고 있는 공동묘지, 이를 지켜본 로마군인들의 고백이 나타납니다(27:52-54) 그리고 갑자기 산헤드린 대 공회의 구성원인 존귀한 자들이 나타나서 예수님의 장례를 치르고 있습니다(27:57-60).

그래서 두 사람의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생전에 하신 예언 한 조각을 되새기고 있습니다. 죽은 후 삼일만에 부활할 것이라는 내용입니다(20:19, 27:63). 무덤을 향하여 앉아서 두 사람은 그 예언의 성취를 기다리고 있습니다(27:61). 한 마디로, 그들의 신앙은 이제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1:13)이라고 하겠습니다.

다섯째로, 그 다음날 유월절 안식일이 시작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부활예언을 기억하고서 상당한 거리를 걸어 로마총독을 찾아가고 있습니다(27:62-64). 평소 안식일에는 자기의 처소에서 성전이나 회당까지를 가고 올 수 있는 거리만을 걷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 이상은 노동행위를 하는 것이므로 금지사항입니다(5:10). 그런데 유대교의 지도자들이 그 율법을 어기고 로마총독을 방문하고 있습니다(27:62).

그들은 유대교가 자랑하고 있는 예루살렘 성전의 성소 내 휘장 문이 갈라져버리자 너무나 당황하고 있습니다(27:51). 따라서 유월절 안식일이지만 생활율법의 규정을 무시한 채 급한 일을 먼저 처리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예언이 이루어지는 것을 막고자 하는 것입니다. 로마총독에게 부탁하여 예수님의 무덤을 철저하게 지키고자 합니다(27:62-64a).

겉으로는 예수의 제자들이 시신을 훔쳐가서 숨겨두고서 스승님이 부활했다고 다시 혹세무민하는 사태를 사전에 예방하겠다는 것입니다(27:64b). 그러나 그 속셈은 다릅니다. 그것을 눈치 빠른 빌라도가 벌써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묘하게 발뺌을 하고자 합니다(27:65). 요컨대, 유대교지도자들의 관심사는 예수님의 부활을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보다는 자신들의 유대교를 보전하는데 모든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섯째로, 예수님의 부활 가능성에 대한 유대교지도자들의 말을 들은 빌라도는 너희들이 알아서 처리를 하라고 말하면서 일종의 무관심불개입’(無關心不介入, no concern and no involve) 전략으로 대응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나 몰라라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야 부활을 하든지 말든지 그것이 로마총독으로서의 지위를 누리고 있는 빌라도 자신의 삶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아주 쉽게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자신이 유대인들의 교리분쟁에 더 이상 관계하고 싶지 않으니 산헤드린 대 공회에서 스스로 알아서 처리를 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두말 없이 성전경비병을 대제사장이 동원할 수 있도록 허락을 해주고 있습니다(27:65). 그 결과 예수님의 시신이 안장되어 있는 바위굴은 삼일 동안 성전경비대가 철저하게 지키고 있게 됩니다.

끝으로, 그 가운데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며 자신의 부활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28:1-20) 두 사람의 마리아,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 그리고 이방인인 로마의 병정들이 그 범주에 들어오고 있습니다. 반대로, 대부분의 유대인들과 유대교지도자들 그리고 로마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적으로 보거나 반기지를 아니하고 있습니다. 내용을 간추려보면 분명히 그 점을 알 수가 있습니다;  

(1)  선민 유대인들은 히브리정경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유대교의 전통과 관념만을 추종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종말로 엘리야가 와서 구원한다는 사상도 들어 있습니다.

(2) 이방인을 대표하고 있는 로마의 군인들은 합리적이고 현실적입니다. 예수님의 운명과 더불어 발생하고 있는 현상들을 주목합니다. 그 결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습니다.

(3)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임종과 더불어 성전의 휘장이 둘로 갈라졌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이 허무한 패배자의 결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인 대속의 제사이며 유대교의 개방과 개혁의 신호탄이라고 믿게 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장례에 정성을 다하고 있습니다.

(4)  두 사람의 마리아는 혈통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예수님을 더 이상 바라보지를 않습니다. 십자가 죽음이 혈통과 사람의 의지의 절망이라면 그것을 뛰어넘는 새로운 기적들이 발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뜻과 능력에 의하여 부활의 시대가 도래하는 것을 바라보고자 합니다.

(5)  유대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의 예언이 성취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것보다는 자신들의 유대교와 기득권을 보호하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6)  로마총독 빌라도는 아예 개입을 하지 아니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복음사상이나 부활이 그에게는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그저 한 세상 총독이라는 막강한 권세를 누리면 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사도 바울의 말 그대로 예수님의 부활을 자신의 부활로 만들기 위하여 달려가는 인생이 바로 성도의 삶입니다(3:10-12).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부활의 새 아침이 밝아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십자가 정신을 이어받아 대속의 삶을 살아가야만 합니다(16:24). 그리고 부활의 영광을 누리며 생명의 면류관을 받아 써야만 합니다(고전15:23, 딤후4:8). 본문에서 두 사람의 마리아와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이 그러합니다. 그리고 이방인 로마병정들에게도 그러한 깨달음이 임하고 있습니다. 이제 더 많은 이방인들에게 십자가의 은혜와 부활의 소망을 전하기 위하여 끝까지 성도의 삶을 살아가야만 할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서의 총 결론입니다(28:1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