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201강(마28:1-6)(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8. 21. 01:30

마태복음 강해 제201(28:1-6)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529()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 곧 새로운 창조는 이 땅 위에 언제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28:1-6, 2:1-4)

 

첫째로,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일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집니다(28:1a). 창세기 제2장의 기록을 보면,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창조의 역사를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을 하셨다고 합니다(2:2-3). 복되고 거룩한 안식의 복이 에덴동산에서 아담부부에게, 그리고 광야생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계속 주어지고 있습니다(2:8, 22, 16:23-25). 그 복의 내용이 무엇일까요? 사람들이 창조주와 함께 안식을 한다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람의 힘으로 새로운 인생, 새로운 역사, 새로운 창조를 한다고 애쓰지를 말고 그 일에 능하신 창조주 하나님께 맡기라는 뜻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사람이 자신의 한계를 알고 창조주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서는 것이 바로 안식의 복을 얻는 비결이라고 하겠습니다.

안식이라고 하여 무조건 일을 하지 아니하고 쉬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적인 일은 내려놓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해야만 하는 거룩한 일들이 있습니다; 첫째, 인간의 힘으로 자신의 의지로 밀어 부쳐서 해본 결과 이러이러한 일들이 제대로 되지를 못하고 있다고 솔직하게 고백하는 일입니다. 둘째, 아버지 하나님에게 도움을 청하는 일입니다. 셋째, 모두 맡겨드리고 안심을 하고 단잠을 이루는 것입니다. 넷째, 마침내 안식 후 첫날 새벽에 하나님의 놀라운 창조를 마주할 수가 있게 됩니다. 여기서는 그 새로운 창조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둘째로, 십자가 대속의 죽음을 끝까지 감당했던 골고다 언덕 그 무덤에서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집니다(28:1c). 부활의 영광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경우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따라 대속의 십자가 죽음을 맞이해야만 합니다. 그 일은 육체를 가진 인간의 입장에서는 생각만 해도 끔찍한 것입니다. 극도의 고통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보통사람과 똑 같은 육신을 가지신 예수님이 부디 다른 방법으로 대속의 은혜가 임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얼마나 새벽기도 때마다 하나님 아버지께 매어 달렸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답변은 항상 같습니다. 십자가의 제사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 됩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26:39). 한 마디로, 고난이 없이 영광이 주어지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8:17-18). 왜냐하면 새로운 창조는 옛 것의 종말로부터 시작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21:1).

셋째로, 부활의 예언을 믿으며 그 무덤으로 달려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27:63, 28:1b).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의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현장으로 먼저 달려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두 사람의 마리아입니다(28:1). 그들이 그곳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은 빈 무덤입니다(28:6). 그리고 천사들로부터 들을 수 있었던 소식은 예수님이 부활을 하셨다는 것입니다(28:5-6).

모든 인류의 소망이 이루어지고 있는 그 현장을 가장 먼저 볼 수 있었던 여인이 바로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와 여사도로 부를 수 있는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골고다 언덕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죽음 가운데 떠나 보내고 이제 그 눈에서 영원히 눈물을 씻어주는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를 만나고 있다는 것입니다(28:5-6, 21:3-4).

반대로, 유대교지도자들은 나사렛 예수가 평소 자신의 예언대로 무덤에서 제3일에 부활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을 했지만 그것을 반기지를 아니했습니다(27:63). 그래서 로마총독에게 부탁하여 예수가 부활하지를 못하도록 로마의 군대를 동원하여 아예 무덤을 철저하게 봉해버리려고 애쓰고 있습니다(27:64, 66). 빌라도가 기꺼워하지 아니하며 성전에 파견을 나가 있는 로마의 성전경비대만을 동원하여 그 무덤 굴을 지키도록 허락을 하고 있을 따름입니다(27:65). 그와 같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원하지 아니하고 있는 자들에게 구원과 영생을 의미하는 부활의 은혜가 임할 리가 없습니다.

넷째로, 하나님이 천사를 이 땅에 보내어서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새로운 창조 곧 부활의 역사가 이 땅에 이루어졌음을 전해주고 있습니다(28:2-6, 2:31-32). 새로운 창조인 부활의 역사는 오로지 창조주의 뜻과 능력에 의해서만 이루어집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예수님이 벌써 주기도문에 그 내용을 다음과 같이 담고 있습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6:10).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신위적(神威的, 신의 위력에 해당하는)으로 발생하고 있는 것이므로 사람의 능력으로 이를 제지할 수가 없습니다. 유대교지도자들이 성전을 경비하고 있는 로마의 병정들을 동원하여 예수님의 시신을 안치하고 있는 바위 굴을 완전히 밀봉을 했습니다(27:66). 하지만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서 내려온 천사들에 의하여 산산조각이 나고 맙니다. 그 장면에 대한 묘사가 다음과 같습니다;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러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28:2).

온 세상에 그 용맹을 자랑하고 있는 로마의 병사들이 하나님의 천사들 앞에서 사색이 되고 있을 뿐입니다(28:4). 천사들의 움직임이 빛보다 빠르므로(28:3a) 도저히 로마의 검과 창으로써 대적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천사의 옷이 눈부셔서 그 앞에서 눈을 뜨기도 힘이 듭니다(28:3b).

다섯째로, 예수님의 말씀대로 함께 모여 기도하면서 성령님의 임재를 간구했던 성도들에게 새로운 역사가 임하고 있습니다(24:49, 1:8, 2:1-4).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에 따라 그때부터 모든 것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더 이상 예수님이 좁은 육체에 갇혀서 복음사역을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는 육체를 벗고서 영적인 부활의 몸을 가지고서 복음사역을 계속하고 있습니다(20:19-23, 29, 21:15-22, 16:7). 그 일이 가능하도록 보혜사 성령님이 강림하여 성도들에게 능력으로 내주(內住, dwelling inside)하여 역사하고 있습니다(24:49, 1:8, 2:1-4).

구체적으로, 성령님이 성도들의 속사람 속에 내주하시게 되면 그 성전에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이 영적으로 함께 거하시는 것입니다(고전6:19-20). 그 점에 대한 예수님의 예언이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14:16),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14:18),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14:20).

끝으로, 그렇다면 예수님의 부활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시대가 밝아오고 있습니다. 육체라는 감옥에 갇혀서 평생을 살아가고 있던 죄수와 같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소망이 복음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누구나 예수님처럼 대속의 삶을 살게 되면 성령님의 임재로 영적인 삶을 누리며 죽은 다음에는 부활의 새 날을 맞이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부활의 신앙이 12명의 사도를 비롯한 120명의 제자들에 의하여 예루살렘과 온 땅에 전파됨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교회를 형성하게 됩니다”. 초대교회형성의 대목은 의사 누가가 사도행전에서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으므로 복음서에서는 공통적으로 생략이 되어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사람의 생각으로는 예수의 인생이 골고다 언덕에서 종말을 고하고 있으므로 패배자인 그의 만민구원사상도 그 언덕 공동묘지에 버려지게 되는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제28장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28장의 내용은 허무한 종말이 아니라 새로운 하나님의 창조가 그 절망의 언덕에서부터 시작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제3일 곧 안식일을 지난 그 다음날 새벽에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되살아나기 때문입니다(28:1-6). 그러므로 복음의 본질은 죽음과 멸망의 소식이 아닙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로 시작이 되는 새로운 역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성취하시는 그 새로운 창조에 들어갈 수 있는 자와 그러하지 못한 자로 구분이 되고 있습니다. 그 구분의 기준은 한 마디로, 이 땅에서 제멋대로 살았느냐 아니면 예수님처럼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여서 한 평생을 살아갔느냐의 차이라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