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67강(마11:25-30)(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6. 13. 22:55

마태복음 강해 제67(11:25-30)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5113()

 

그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1:25a)에서 그때의 의미

 

본문 첫머리에서 말하고 있는 그때’(11:25a)는 예수님이 기적만 원하고 있는 갈릴리 세 지역 주민들의 신앙상의 문제점에 대하여 날카롭게 비판을 하신 때를 지칭하고 있습니다(11:20-24). 이미 지난 번 강해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예수님 일행의 복음사역은 말씀사역과 이적사역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본문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하여 먼저 말씀사역과 이적사역의 차이를 좀더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백성들에게 영원한 구원과 영생을 줄 수 있는 것은 이적사역이 아니고 말씀사역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1:1-7, 1:1-3). 그리고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생명의 기운으로 사람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2:7). 그 생명의 기운이 바로 창조주의 말씀이며 영이라고 복음서가 증거하고 있습니다(4:4, 1:4). 따라서 사람에게 영원한 구원과 생명을 줄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예수님의 말씀사역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로, 이적사역은 겉으로 보기에는 대단한 것이지만 그 효력이 한시적인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보자면, 마음의 가장 깊은 중심에 은밀한 깨달음으로 찾아오고 있는 조용한 말씀사역(4:12-13)보다는 당장 귀신을 쫓아내고 불치의 병자와 장애자를 치유하여 거뜬하게 일으켜 세우고 있는 이적사역(10:1)이 훨씬 강력한 복음사역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큰 기적도 그 혜택을 받은 당사자가 다시 병이 들거나 죽고 나면 전부 헛일이 되고 맙니다. 아무리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낫게 하며 장애를 고쳐주어도 결국에는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람의 운명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이 갈파하신 것처럼 유대인들의 조상들이 광야에서 만나를 얻어 먹어도 마찬가지입니다(6:49). 생명의 떡인 예수님의 말씀(6:47-48)을 얻어 먹지 못하면 역시 죽고 맙니다. 베다니의 나사로가 무덤 속에서 다시 걸어 나와도 마찬가지입니다(11:41-44). 역시 다시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만이 그들 앞에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유한한 몸이나 목숨을 구원하는 것 그리고 세상적인 형통함을 추구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는 이적중심의 복음사역이라고 하는 것은 영원한 하나님의 세계를 소망하며 하나님 자녀로서의 구원을 얻도록 만들어 주고 있는 말씀사역에 결코 앞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요컨대, 기적 중심의 사역은 영생을 줄 수 있는 말씀사역을 보조해주고 또한 증거해주는 도구적인 성격의 것이라고 하겠습니다(16:20).

셋째로, 말씀과 영은 보이지 않는 실체에 해당하지만 이적과 기적은 보이는 현상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점을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보이지 않는 바람과 같은 성령님 그러나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부딪힘의 현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그러하니라”(3:7-8). 간단하게 풀이를 하자면, 바람과 같은 성령님의 존재를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그 바람이 있다는 증거를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세상의 물체로 확인할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는 방법과 사람을 도와주는 방법(11:25b-30)

 

첫째로, 영생을 얻는 구원의 말씀을 사람에게 주시고 깨닫도록 하는데 있어서 그 대상의 차이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지혜로운 자에게는 진리의 말씀을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셨다고 예수님이 언급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11:25b-26). 언뜻 생각하면, 지혜로운 자가 하나님 말씀의 진리를 깨달을 수가 있지 결코 학문이 없는 어린아이가 그 진리를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반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세상적인 지혜를 추구하고 있는 자가 세상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해석해보려고 노력하더라도 그 열매를 얻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1) 사람들이 세상적인 지혜를 내려놓고, (2)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님께 무엇을 얻기를 순수하게 원하는 것처럼, (3) 그렇게 하나님 아버지께 그 지혜의 말씀의 뜻을 가르쳐달라고 간구할 때, (4) 비로서 말씀 속에 담겨 있는 진리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세상의 지혜를 가지고 하나님 말씀의 뜻을 풀이하고자 애를 쓴 무리가 있습니다. 그들이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레위인 하스모니안 왕조가 주전 140년대에 시작이 되었을 때에 생겨났습니다. 주전167년경부터 외세 시리아의 지배를 물리치고자 제사장인 레위인을 중심으로 유대인들이 대동단결하여 전쟁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막상 레위인의 왕조가 형성되고 나자 두 파로 갈라졌습니다; “현실정치에 참여를 하는 파와 그러하지 아니한 파입니다”. 그 가운데 참여하지 아니한 파의 사람들이 율법연구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바리새인의 시초입니다.

그들은 마치 독립전쟁을 계속하듯이 그렇게 히브리 정경을 연구했습니다. 일일이 주석을 만들어서 제자들에게 대물림을 했습니다. 그들은 정경자체를 필사하면서 주석도 필사했습니다. 그리고 히브리 사상과 전승도 정리를 했습니다. 방대한 히브리 학문이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율법중심의 신앙생활을 영위한 것입니다. 그들은 행위규제적인 율법의 연구에 있어서는 탁월했습니다. 하지만 그 율법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의 생각이 궁극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아니했습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을 만들기 위하여(19:6)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율법을 주신 것이지 선민이라는 종교적인 특권종족을 형성하라고 주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은 그들만이 하나님의 말씀과 구원을 독점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첫 단추부터가 완전히 잘못 끼워진 것입니다. 제사장은 자신을 위해서는 일주일간 그리고 남을 위해서는 51주간 속죄의 제사를 드려주는 자들입니다(29:35-44, 30:10, 9:7, 16:29-30). 거룩함이라고 하는 것은 창조주 앞에 부끄럽지 아니하게 설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이방인들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올려드렸을 때 그 예물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거룩한 백성으로 설 수가 있을 터인데(66:20) 그 사명에 대한 깨달음이 애초부터 사라지고 없습니다.

지극히 이기적이고 집단이기적인 신앙이 바리새인들의 율법연구를 통하여 강화되어 왔을 뿐입니다. 그러한 하나님 말씀에 대한 왜곡과 변질에 대하여 예수님이 얼마나 질책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겉으로는 백성들 앞에서 의인인데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면 그 속이 탐욕과 이기심으로 가득 차있는 종교적인 외식주의자라는 것입니다(231-36).

넷째로, 어떻게 하면 바리새인들의 외식주의를 바로 잡을 수가 있을까요? 그들의 종교적인 열정이 대단합니다(18:11-12, 10:2-3). 사람의 행위를 중시하는 율법주의에서 사람의 중심을 중시하는 복음주의로 그들의 생각의 관점을 바꿀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리고 진실로 선민 이스라엘에게 무엇을 원하고 계시는지를 처음부터 다시 설명을 해야만 합니다. 불가피하게 하나님의 창조의 신비와 존재의 신비를 가르쳐주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 완전계시자(11:27)로 이 세상에 올 수밖에 없다고 하는 그 이유를 설명해주어야 합니다. 그 방법이 결코 쉽지가 않습니다. 한 마디로, 랍비 사울이 사도 바울로 환골탈태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9:3-22). 우선은 예수님이 하나님 말씀의 본뜻을 복음이라는 완전 계시로 드러내시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인생의 모범을 보여주어야만 합니다(11:27-30).

다섯째로, 예수님의 복음이 유대인들의 교리와 일치되지를 못하여(2:19-21, 5:10, 10:30-33)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처형이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유대인들의 손을 들어주지를 아니하시고 예수님이 옳다고 판정을 하십니다. 무덤 속 부활이 발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2:24). 그리고 승천하여 다시 오시는 주님으로 랍비 사울 앞에 나타나고 있습니다(9:4-5). 그때 비로서 바리새인이 세상적인 지혜를 버리고 십자가 앞에 죄인으로 바로 서게 됩니다(3:8-12). 자신의 탐욕과 이기심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7:22-25). 사람이 계측할 수 없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를 접하게 됩니다(8:1-4).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예수님처럼 인생을 살아가게 되면 진정한 구원과 영원한 생명 그리고 하나님 자녀로서의 신원의 회복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8:10-17).

끝으로, 그와 같은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 부활의 예약, 천국 하나님 자녀로 설 수 있다는 소망이 함께 하게 될 때에 남은 인생살이 가운데 어떠한 변화가 발생하게 될까요? 한 마디로, 예수님처럼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변화가 발생하게 됩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친절하게도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가르쳐주시고 있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11:2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