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64강(마11:4-15)(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6. 11. 22:35

마태복음 강해 제64(11:4-15)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5110()

 

예수님은 자신이 밝히고 있는 메시아의 역할을(11:5) 사람들이 제대로 이해하지를 못하고 실족할 수도 있다고 하는데 그 정확한 의미와 깊은 내용은 무엇인가?(11:6-15). 그리고 예수님의 우려는 어떻게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가?(14:3-12)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메시아의 본연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밝히고 계십니다; “메시아의 사명은 이 땅에서 귀신의 세력을 몰아내며 각종 병자와 장애자를 고쳐서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령이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그들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 복음사역에 동참하여 마침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만드는 것입니다”(5:3, 11:5). 예수님의 설명은 세례 요한의 기대에 크게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옛날 선지자의 뒤를 잇고 있는 세례 요한의 입장에서는(11:13) 하나님께서 보내신 진정한 메시아라고 한다면 잘못된 종교적 관행을 바로잡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 잘못도 바로잡는 역할도 동시에 강력하게 수행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세례 요한은 가버나움 감옥에 수감이 되어 있습니다(14:3). 그가 갈릴리의 분봉 왕인 헤롯 안디바의 잘못을 비난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임금이 패륜적인 행위를 자행하고 있으니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것이라고 선지자답게 용감하게 외친 것입니다(12:31). 그런데 세례 요한은 은근히 믿는 구석이 하나 있습니다. 그가 세상에 소개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가 갈릴리 지역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강력하게 외치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선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9:35). 이제 백성들이 예수님을 그들이 기다리고 있던 메시아라고 믿기만 하면 대동단결하여 외세를 몰아내고 선민 이스라엘의 나라를 다시 세울 것입니다. 세례 요한 자신은 자랑스럽게 석방을 맞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세례 요한의 기대는 완전히 무너지게 됩니다(14:3-12). 예수님이 헤롯 왕가나 로마의 세력을 배척한다는 언질을 조금도 하지 아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11:4-6).

그렇다면 어찌하여 예수님은 그 옛날 선지자들이나 세례 요한의 기대를 전혀 메시아의 사역에 있어서 포함시키지 아니하고 있는 것일까요? 감옥에 갇혀있는 세례 요한이 얼마나 실망을 할지 뻔히 아시면서 왜 위로와 소망의 한 마디를 주지 아니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그 대신에 주의사항 한 마디를 다음과 같이 전해주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11:6). 그 말씀의 뜻은 메시아의 사명 곧 예수님이 행하고 계시는 진짜 믿음의 길에서 이탈하지 말도록 주의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이탈을 하게 되는 경우에는 불행한 결과를 맞이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11:4-6, 14:3-12).

지금 예수님은 본연의 메시아의 사역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귀신을 쫓아내고 각종 질병과 장애를 고쳐주면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의도와 능력을 복음으로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사람 하나하나를 모두 구원하여 하나님 자녀로서의 삶을 살아가도록 만들고자 하시는 것입니다(6:39-40). 그들이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나갈 것입니다. 그리하면 성도들의 메시아적인 사역을 돕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임금을 쫓아내시고(12:31) 사회구조를 그리스도의 나라로 재편하실 것입니다(11:20, 6:12).

그런데 예수님의 메시아적인 사역과 아버지 하나님의 역사섭리에 대하여 완전히 믿지를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의 행동의 특징은 그리스도와 제자들의 본연의 사역을 이해하고 그 일에 전념하는 대신에 하나님 아버지의 역사섭리를 믿지 못하고 그 일까지 자신들의 힘으로 대신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종교적인 개혁과 사회정치적인 개혁을 동시에 추진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자신들의 힘으로 천국을 이 세상에서 만들어낼 수도 있다고 자신하고 있는 매우 공격적인 신앙노선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게 아버지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주관하시는 일까지 자신들이 전부 맡아서 인위적으로 조치를 하겠다고 혁명적인 노선으로 나서게 되면 참으로 곤란합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From the days of John the Baptist until now the kingdom of heaven has suffered violence, and the violent take it by force”, 11:12).

성도들이 무력과 같은 폭력을 사용하여 외세를 물리치고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 개혁을 수행해나간다고 하면 어떠한 결과가 초래될까요? 이상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그러하지 아니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결코 그 방법을 선택하지 아니했습니다;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26:52-54).  설혹 성도들이 무력으로 천국을 만든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인간들이 만든 천국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역사섭리를 믿지 못하고 하나님이 순리로 건설하려는 그 천국을 빼앗아 사람들이 제멋대로 건설한 것이기에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께 방해거리이며 걱정거리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들의 의와 공로를 내세우고 있는 자들은 여전히 메시아를 배척할 것이기 때문입니다(10:2-3). 그와 같은 의미를 담아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설명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첫째로,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너 나은 자니라”(11:7-9). 조상들이 마치 세례 요한처럼 광야생활 또는 고행과 금욕적인 삶을 통하여 얻고자 한 것은 자연의 이치나 정치적인 권력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진리를 깨닫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선지자가 될 수가 있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진리 자체로 이 세상에 오시는 메시아를 만나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11:10-11),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11:14). 예수님이 세례 요한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메시아를 이 세상에 소개하는 크나큰 임무를 수행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구원과 영생을 주시는 메시아를 가장 먼저 만나고 세상사람들에게 소개를 한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큰 영광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기에 세례 요한은 천국에 들어가는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의 메시아적인 사역의 본질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함으로써 천국에서 작은 자로 취급이 될 것이라고 하는 예수님의 말씀이 뒤따르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오해한 대목이 바로 위에서 설명한 바가 있는 사회 정치적인 개입, 그것도 공격적인 방법으로 이 땅에 천국을 건설하고자 하는 맥락이라고 하겠습니다(11:12-13). 그 때문에 세례 요한은 정치권력에 의하여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고 맙니다(14:3-12).

끝으로, 예수님은 메시아의 본연의 사명을 제자들이 겸손하게 이어가 주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메시아가 이 세상에 온다는 것입니다(11:13). 그리고 메시아를 소개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사자로서 엘리야가 다시 세상에 온다는 것입니다(11:14). 그 일이 세례 요한의 등장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메시아가 이 세상에 옴으로써 백성들의 기대가 하루아침에 만족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왜냐하면, 모든 백성들이 각각 자신들이 심령이 가난한 자이며 죄인들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서 예수님 앞에 나아가서 고침을 받고 깨끗해져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그리스도의 사명을 계승해나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버지 하나님의 역사섭리로 하나님의 나라가 비로서 이 땅에 건설되기를 시작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이 원하고 있는 방법은 점진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을 무시하고서 성도들이 무력으로 급진적으로 천국을 이 땅 위에 이루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정치적 사회적인 개혁을 힘으로 밀어 부치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개혁과 혁명을 완수한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본질이 그리스도의 사역과 성령님의 역사로 완전히 바뀌지 아니하는 한 그것은 사상누각이라고 하겠습니다(7:24-27). 그와 같은 의미를 귀가 있는 자는 들어서 깨달으라고 예수님이 말미에 덧붙이고 계시는 것입니다(1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