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63강(마11:1-6)(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6. 11. 22:32

마태복음 강해 제63(11:1-6)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19()

 

열두 사도의 뒤를 받쳐주고 있는 예수님의 전도활동(11:1)

 

갈릴리 여러 고을에서 예수님 일행을 초청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물론 백성들이 천국복음을 듣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이유보다는 예수님께서 행하시고 있는 메시아로서의 능력에 더 관심이 크기 때문입니다. 귀신을 쫓아내고 각종 질병을 치료하며 장애를 고쳐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번은 죽은 야이로의 딸을 살려준 적도 있습니다(9:24-25, 5:21-24, 35-43). 돈도 받지를 아니하고 불치의 병자와 장애자를 치유해주고 있으니 그 인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갈릴리 백성들의 요청이 한꺼번에 여러 곳에서 쇄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훈련을 받은 제자 열두 명을 차제에 일손을 나누어서 파송을 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말씀교육만 시켜서 그냥 보낸 것이 아닙니다. 그들 열두 사도에게 복음사역에 있어서 필요한 여러 가지 권능을 부여하여 예수님처럼 활동할 수 있도록 만반의 채비를 해준 것입니다(10:1). 예수님은 나중에 더 많은 제자를 양성합니다. 그 결과 사마리아 지역에서는 무려 70명의 제자를 21조로 35개팀을 만들어 파송하고 있습니다(10:1).

특별히 열두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이 그 동안 산상수훈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복음의 내용을 심도 있게 가르쳐주었습니다(5-7). 그리고 축사와 치유의 능력도 크게 부여해주었습니다(10:1). 하지만 그 효과가 어느 정도인지는 현지를 방문해보아야 알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효과를 평가도 할 겸 제자들도 격려하고자 그들이 사역을 하고 있는 현장을 방문하고 있습니다. 그 기록이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명하기를 마치시고 이에 그들의 여러 동네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거기를 떠나 가시니라”(11:1). 한 마디로, 제자들을 그냥 파송만 하고 일체 손을 떼고서 내버려두는 것이 아닙니다. 현지를 방문하고 보완해주는 등 점검의 과정이 있습니다. 그와 같은 동행의 역사가 예수님의 승천 후에도 성령님의 강림하심으로 여전히 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16:6-7).

 

메시아에 대한 세례 요한의 기대와 예수님의 생각과의 차이(11:2-6)

 

세례 요한이 가버나움의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11:2a). 갈릴리의 분봉 왕 헤롯 안디바의 심기를 건드렸기 때문입니다. 안디바가 이복동생 빌립의 아내를 자신의 여자로 취한 적이 있습니다. 그 사실을 선지자 세례 요한이 질책을 한 것입니다(14:3-4). 감옥생활을 하면서 세례 요한은 갈릴리 일대에서 대 활약을 하고 있는 예수님의 복음사역에 대하여 상세하게 이야기를 전해 듣고 있습니다(11:2b).

요한이 자신의 제자들을 풀어서 예수님의 행적을 추적하고 있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는 메시아가 어떤 일을 해야만 하는지에 대하여 여느 유대인들처럼 하나의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후계자로 이 세상에 오시는 메시아는 첫째, 선민의 영광을 사방에 떨쳐야만 합니다. 부국강병을 이루고 중동 땅에서 패권을 행사해야만 합니다. 둘째, 당장은 외세를 몰아내고 다윗의 제국을 재건해야만 합니다. 로마의 주둔군은 물론 이방 에돔 족속출신인 헤롯 왕가도 몰아내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 일행은 그럴 기미가 조금도 보이고 있지 않으니 심히 답답하고도 이상한 일입니다. 감옥 안에서 빨리 메시아 예수가 헤롯 왕가를 몰아내고 자신을 석방시켜주기를 고대하고 있는 세례 요한은 더욱 그러합니다. 그래서 길게 참지를 못하고 제자들을 예수님에게 보낸 것입니다(11:2c). 그들이 다음과 같이 스승 세례 요한의 궁금증을 예수님에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오실 그 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11:3). 과연 예수님의 답변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그가 행하고 있는 일을 그대로 세례 요한에게 보고하라고 답을 하고 있습니다(11:4). 예수님께서 행하시고 있는 일은 다음과 같습니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11:5-6). 예수님의 말씀은 굉장히 정직한 것입니다; (1) 실제로 맹인을 보게 해주고 있습니다(9:27-31). (2) 못 걷는 사람을 걷게 해줍니다(5:6-9).  (3)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낫게 했습니다(8:1-4). (4) 못 듣는 자를 고쳤습니다(7:34-35).  (5) 죽은 자를 살렸습니다(9:24-26).  (6)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있습니다(9:35-38, 4:40-42).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고 계시는 내용과 세례 요한이 실제로 듣기를 원하고 있는 답변은 상당히 다른 것입니다. 한 마디로, 세례 요한은 선민 이스라엘을 외세의 압제에서부터 구원해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마치 그 옛날 애굽의 노예상태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해낸 모세를 다시 기다리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한 메시아를 가질 수 있는 것이 선민 이스라엘의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의 답변은 전혀 다릅니다; 첫째, 구원의 본질은 민족구원이 아닙니다. 개인별 구원입니다. 둘째, 의인이기 때문에 구원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질병과 장애를 가지고 살고 있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죄인이라고 부르고 있는 그들을 구원해주고 있습니다(9:12-13). 셋째, 세례 요한이 기대하고 있는 선민 이스라엘 제국을 재건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각종 질병과 장애 그리고 죽음의 문제는 남아 있습니다.

환언하면, 인간의 근본문제는 전혀 구원함을 얻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를 다시 기다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 궁극적인 메시아가 나사렛 예수라는 이름으로 목하 활동 중에 있습니다(11:5). 그러므로 세례 요한이 빨리 자신의 잘못된 고정관념을 버리고 예수님 앞으로 나아와야만 합니다. 그런데 그는 그러한 때와 기회를 얻지 못한 채 감옥에서 고생만 하다가 죽을 것만 같습니다(14:8-12). 그 점을 걱정하고 계시는 예수님의 부연설명이 다음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