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62강(마10:38-42)(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6. 10. 22:36

마태복음 강해 제62(10:38-42)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518()

 

영접하는 자가 받는 것 그리고 주는 자가 받는 상급(10:38-42)

 

백성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 사도를 영접하는 것이 왜 어려운 것일까요? 그 이유는 근본적으로 예수님 일행이 전하고 있는 복음이라고 하는 것이 그들 백성들의 종교나 문화와 영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유대인들이 생각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요지는 선민 이스라엘을 보호하고 엄청난 복을 주는 것입니다. 반면에 이방인들에 대해서는 저주하고 벌을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은 다릅니다; “선민 이방인 구별이 없이 모두가 죄인이며 구원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사장나라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의무가 있습니다. 이방인들의 구원을 위하여 중보자의 삶을 살아야 하며 대속의 제사를 드려야만 되는 거룩한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의 우상문화는 공통적으로 실용적이며 도구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그들이 바라고 있는 복을 우상을 통하여 얻어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말을 잘 듣는 우상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면,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이라고 부르고 있는 우상은 무조건 푸짐한 제사를 받고서는 백성들의 소원을 잘 들어주어야만 합니다. 비록 백성들의 요구가 자신들만 잘 먹고 잘사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우상의 입장에서는 상관이 없습니다. 자신들만 승리를 얻고 상대방을 죽이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그와 같은 우상문화는 정확하게 예수님의 복음사상과 정반대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선민 유대인이거나 헬라 세계의 이방인이거나 예수님 일행이 하나님 말씀의 본래 뜻이라고 전하고 있는 복음을 반대하는 것은 실로 당연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러한 종교와 문화를 지니고 있는 세상으로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송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갈릴리 여러 고을에 들어가서 예수님을 대신하여 복음사역을 행하는 자 곧 사도’(使徒, apostle)로 발령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10:6-8). 예수님은 만전을 기하기 위하여 축사(逐邪, exorcism)병 고침의 능력’(healing power)을 사도들에게 이미 부여했습니다(10:1). 그리고 선교지역에서 명심해야만 하는 여러 가지 주의사항도 일일이 가르쳐주었습니다(10:5-37). 이제는 마지막 당부의 말씀을 주시고 있습니다(10:38-42);

첫째로, 모두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모범을 따르라고 하십니다(10:38). 예수님은 골고다 언덕에서 실제로 극형의 십자가 형벌을 받으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그 길을 향하여 전진하고 있는 고행의 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은 고난과 고통의 길을 제자들 보고 모두 묵묵히 따라오라고 하십니다. 비록 제자들이 사도가 되어 백성들의 구원을 위하여 복음을 전파하지만 그들 현지인들은 사도들을 냉대할 것이며 배척하고 박해할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15:18-19). 그 마지막은 순교의 현장이 될 것입니다(21:19). 그래서 주시고 있는 예수님의 말씀이 바로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10:39)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대속의 제물이 되고자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일이 구원과 영생을 얻을 수 있는 방책이 된다고 단언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그 근거는 한 마디로, 창조주 하나님께서 보증을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대속의 십자가를 지게 되면 무덤 속 부활과 승천이라는 상급을 주시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뜻을 예수님이 이미 알고 있기에 제자들에게 위와 같이 넌지시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으로 이해가 됩니다(12:32, 8:18).

둘째로, 사도들이 방문하는 고을에서 모든 백성들이 복음을 외면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극소수일지라도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푸짐한 상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10:40). 간단하게 풀이를 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아로 영접한 백성들은 하나님 아버지를 영접한 것으로 간주가 되고 있습니다(10:40b, 13:20). 그런 차원에서 예수님은 자기를 본 자는 이미 하나님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14:9). 그리고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며 자신은 아버지가 주신 말씀만을 백성들에게 전하고 있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5:30, 6:38, 10:30, 12:48-50). (2) 결국 파송 받은 자를 영접하는 자는 그를 파송한 자를 영접하는 것과 같다는 논리입니다. 그 논리는 예수님이 사도를 갈릴리의 백성들에게 파송하는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이 되고 있습니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10:40a).

셋째로, 사도들의 활동시대가 지나고 나면 새로운 영적인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나타나서 온 세상에 복음의 말씀을 전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일종의 선지자와 같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생활화하면서 세속과 구별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성도를 여기서는 의인이라고 부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의인들인 성도들은 그들의 삶으로 복음이 무엇인가를 현지인들에게 보여주면서 전도와 선교에 나서는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경우에 적용이 될 수 있는 말씀이 다음과 같습니다;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10:41). 말씀의 종을 영접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게 된 자는 훗날 믿음의 성숙을 이루고 역시 말씀의 종으로 활동을 하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생활화하고 있는 의인을 영접하여 함께 생활을 한 자는 역시 그 뒤를 잇게 되는 의인이 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의 방향임을 넌지시 알려주고 있는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넷째로, 전도와 선교여행을 떠나는 사도나 제자들 그리고 성도들이 현지에서 항상 대접이나 영접을 받기만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베풀어야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10:42). 여기서 작은 자는 누구일까요? 마태복음 제25마지막 비유를 참조하면주린 자, 목마른 자, 헐벗은 자, 병든 자, 나그네 된 자, 옥에 갇힌 자등입니다(25:35-40). 그들을 돌보게 되면 주님으로부터 상급을 받게 됩니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25:40)고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예수님의 제자라면 대접을 받는 것에 머무르지 아니하고 소자를 돌보고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대접을 해주어야만 합니다(7:12). 그렇게 베풀어줄 때에 더 큰 상급을 받을 수가 있다고 결론 삼아 말할 수가 있습니다(10:42, 25:34). 그것은 여전히 성도들의 삶에 있어서 황금률이라고 불리고 있다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