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65강(마11:16-19)(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6. 13. 03:17

마태복음 강해 제65(11:16-19)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5112()

 

유대교 율법사회의 타락에 대한 예수님의 날카로운 지적; “재판장이신 하나님의 판결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스스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자기들의 판결이 곧 하나님의 말씀의 뜻이라고 주장하면서 신앙생활을 영위하고 있다”(11:16-19, 21:22).

 

예수님은 아이들이 피리를 불고 있는 비유를 먼저 말한 다음에 당시 율법사회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의 잘못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11:16-19a). 그들이 그들 나름대로 함부로 사람의 행동을 판단하고 있는데 그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한 마디로, “하나님의 지혜로운 판정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제멋대로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11:19b).

먼저 아이들이 피리를 불고 있는 비유’(11:16-17)에 대하여 살펴봅니다;

(1)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서 자기 동무들을 불러놓고 피리를 불고 있습니다(11:16-17a). 피리소리가 흥겹게 울려 나오고 있습니다. 저절로 어깨가 들썩이고 일어나서 춤을 추고 싶습니다. 그런데 동무들은 피리소리를 듣고서도 감응하지 않으며 일어나서 춤을 추지를 않고 있습니다(11:17b).

(2)  다음에는 슬픈 곡조가 피리를 통하여 흘러나가고 있습니다. 피리를 불고 있는 아이들은 너무나 가슴이 아파서 슬피 울면서 연주를 하고 있습니다(11:17c). 그런데 정작 그 피리소리를 듣고 있는 동무들은 전혀 슬퍼하지를 아니하고 있습니다(11:17d). 마치 불감증에 걸려있는 환자와 같습니다.

(3)  여기서 피리를 불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 뜻을 성령님의 감동으로 백성들에게 전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를 들면, 선지자 세례 요한이나 메시아 예수님 그리고 그 제자들이라고 하겠습니다. 또한 동무들은 당시의 유대인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4)  선지자나 메시아 그리고 사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전달하고 있는 도구입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영적인 불감증에 걸려 있는 환자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감동을 받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뜻이 자신들의 뜻과 다르다고 생각을 하고서 아예 무시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영적으로 이미 코드가 달라져 있다고 하겠습니다.

다음에는 비유가 아니라 예수님 일행이 당하고 있는 실제 사례를 가지고 예수님이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11:18-19). 그것은 유대교 율법사회의 타락에 대하여 실제적인 사례를 가지고 예수님이 날카롭게 지적을 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그 속에 숨어 있는 말씀의 뜻을 미리 제시를 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선민 유대인들은 재판장이신 하나님의 판결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스스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자기들의 판결이 곧 하나님의 말씀의 뜻이라고 주장하면서 남의 눈만을 의식하는 율법적인 신앙생활을 영위하고 있습니다”(11:16-19, 21:22). 조금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세례 요한이 선지자로 이 세상에 와서 금욕주의(asceticism) 고행생활을 했습니다(3:1, 4). 백성들에게 회개를 하라고 외치면서 물세례를 베풀었습니다(3:1-2, 5-6). 천국을 이루기 위하여 오시는 메시아를 맞이할 준비를 갖추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갈릴리의 분봉 왕 헤롯 안디바의 잘못을 질책했습니다(14:4). 그리고 회개하지 아니하는 백성들에게는 심판이 임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3:7-12). 그 말이 듣기에 거슬렸던 사람들은 세례 요한을 비판했습니다;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고 있으니) 세례 요한은 귀신이 들렸다!”(11:18).

둘째로, 세례 요한이 나실인으로서 금욕주의 생활을 했지만 예수님과 제자들은 그러하지를 않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백성들 가운데 귀신들린 자를 고쳐주시고 세리와 같은 죄인들을 불러서 제자로 삼고 있습니다(8:28-32, 9:9). 그리고 예수님 일행은 세리 마태나 삭개오가 베푼 잔치자리에 기꺼이 참석하여 함께 먹고 마시고 있습니다(9:10, 11:19a, 19:5-7). 그 모습을 바라보고서 심정이 상한 유대교인들이 역시 한 마디를 하고 있습니다;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11:19b).

결국은, 세례 요한처럼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지 아니하여도 유대인들로부터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일행처럼 백성들과 함께 먹고 마셔도 역시 유대인들로부터 비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 가지 사실을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대인 율법주의자들은 진리에 입각하고 있는 비판의 기준이 없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놓쳐버리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변함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 곧 진리의 진정한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진리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유대인들처럼 이중적인 잣대를 가지고 함부로 휘두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자신의 의를 절대화하여 자신이 옳다고 하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하여 모두를 함부로 재단(裁斷)하고 남을 비판하는데 사용이 되고 있는 도구가 결코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처럼 그렇게 하다가 보면, 마침내 하나님보다 자신들이 더 옳다고 하는 위험한 지경에 반드시 이르게 되고 말 것입니다. 그 결과 자신들의 손으로 하나님께서 보내어 주신 말씀의 선지자와 구원의 메시아를 모두 죽이고 맙니다(7:52). 그리고 자신들의 사회도 파멸을 맞이하고 맙니다. 역사적으로 AD 70년 곧 예수님이 처형되고 난 후 40년 만에 예루살렘과 유대인의 율법사회가 로마군대에 의하여 처참하게 종말을 고하게 됩니다. 그 후 해외난민들에 의하여 유대인들의 회당문화가 겨우 명맥을 유지하게 됩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그 처방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11:19c). 여기서 지혜는 사람의 지혜가 아니고 하나님의 지혜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창조주의 것이므로 피조물을 공평하게 다루는 공의로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해당사자 모두의 형편을 헤아리고 모두의 생명을 돌보며 구하고자 합니다. 결코 사람들이 따르고 있는 자기위주의 일방적인 판단과 주장에 편승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 점은 이미 율법의 정신에도 구체적으로 반영이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임신한 여인을 쳐서 낙태하게 하였으나 다른 해가 없으면 그 남편의 청구대로 반드시 벌금을 내되, 재판장의 판결을 따라 낼 것이니라!”(21:22).

사람들은 함부로 제멋대로 판단하고 행동함으로써 실수를 합니다. 특히 선민사회가 그러합니다. 그들은 율법을 아전인수(我田引水, 제 논에 먼저 물 끌어대기)격으로 해석을 하여 적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판단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을 전개하고 재판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선민들만의 여론에 의한 정치이며 편협한 논리의 전개라고 하겠습니다. 그들의 눈에 만민구원을 주장하고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의 공의의 정신을 설파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는 한 마디로 이단아(異端兒)로 비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을 이방인과 죄인의 친구라고 지탄을 하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지혜와 공의로운 판정은 설 자리가 없다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