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히브리서 강해 제55강(히10:36-39)(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2. 23. 15:42

히브리서 강해 제55(10:36-39)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7 6 20()

 

시간의 흐름은 역행하는 법이 없으며 생각보다 빠르다는 사실을 알고서 믿음생활에 인내를 더하라는 말씀에 대하여(10:36-39);

 

히브리서의 저자는 본문에서 성도들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세가지 용어 곧 인내, 믿음, 구원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그것이 중요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1)  첫째, 인내가 필요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얻기 위함입니다(10:36). 환언하면 신앙생활에 있어서 인내가 없으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얻을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쉽게 이해하기 위하여 한가지 성경상의 예화를 들어보고자 합니다;

1)    사도 바울의 기록에 따르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성도들은 500명이 넘습니다(고전15:6). 그들이 주님께서 약속하신 성령님의 임재를 얻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떠나지 아니하고 함께 모여서 기도를 시작합니다(24:49-53). 그런데 막상 오순절이 될 때까지 기도의 처소에 끝까지 남아서 성령님의 임재를 얻은 성도의 수는 120명 정도입니다(1:12-15, 2:1-4).

2)    어째서 그렇게 24% 정도만이 성령님의 임재를 얻게 된 것일까요?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성도들에게 성령님께서 언제 임재하실지 그 때를 정확하게 말씀해주시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1:6-8). 예수님께서는 처음 초실절에 부활하시고 40일 후에 베다니에서 승천을 하십니다(24:50-51, 1:3). 그러므로 두번째 초실절인 오순절까지는 10일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2:1-4).

3)    만약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10일 후 오순절에 성령님이 강림하실 것이라고 정확하게 말씀하셨더라면 모든 성도들은 만사를 제쳐 두고 성령님의 임재를 기다렸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의 임재와 감동으로 말미암아 선민 유대인사회에서 선지자가 된다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왕이나 대제사장이 되는 것과 같은 영광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것을 원하고 계시지 않습니다. 오로지 주님의 약속만을 믿고서 그 때를 모르지만 인생이 다할 때까지 인내로 참고 견디며 믿음으로 전진하는 신앙생활만이 상급을 얻게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10:36). 

(2)  둘째, 믿음이 필요한 이유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10:38).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성도가 의인이 되고 구원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 뜻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하여 사도 바울이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고 있는 아브라함의 경우를 살펴봅니다;

1)    여호와께서는 메소포타미아의 중심지 갈대아 우르에서 잘 살고 있는 족장 데라와 그의 가문을 이방인 선교를 위하여 불러내십니다(11:31, 12:1, 7:2-4). 그들에게 선교지역이 서쪽의 변경 가나안 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족장 데라는 도중에 북부 시리아지역에서 좋은 땅을 발견합니다. 그곳을 도시로 개발하면 엄청난 이익을 있을 것임을 직감합니다. 따라서 그는 목적지로 향하지 아니하고 그곳을 일찍 죽은 아들 하란으로 명명하고서 개발을 시작합니다(11:28). 여호와께서 여러 번 족장 데라에게 지시하시지만 그는 들은 척도 아니합니다(12:31-32).

2)    족장 데라의 장남이 아브람입니다(11:26). 그의 아내는 불임여성인 사래입니다(11:30). 여호와께서는 족장 데라 대신에 이제는 아브람에게 임하셔서 가나안 땅으로 남하를 하라고 명령하십니다(12:1). 그리하면 자손의 번성을 비롯하여 여러가지 축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12:2-3). 그 가운데 아브람과 사래의 마음을 크게 움직인 것은 자손의 번성으로 보입니다. 자식이 없는 그들에게 상속자와 후계자를 주신다고 하는 그 말씀이 고마운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 데라의 집을 떠나서 아브람이 가족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75세에 남하를 합니다(12:4-5).

3)    이방 땅 가나안과 애굽 등지에서 하나님의 선지자로 나그네의 삶을 살아간다고 하는 것이 여간 고생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자손의 번성을 주신다는 그 약속을 믿고서 10년 세월을 헌신합니다. 그러나 약속의 성취를 보지를 못합니다. 그 결과 아브람은 기다림에 지쳐서 그만 여호와께 자신의 충성스러운 젊은 가신 다메섹 엘리에셀을 후계자로 삼을 것이니 그를 상속자로 인정하시고 축복을 해달라고 간구합니다(15:2-3).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그 청을 거절하십니다. 아브람에게 후사를 아들로 주시겠다는 약속을 믿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15:4-5).

4)    아브람이 하늘의 별을 쳐다보면서 그곳에 계시는 창조주 여호와를 생각합니다. 자신의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지만 여호와는 창조주이시므로 약속의 아들을 반드시 이 세상에 있게 하실 수가 있습니다. 그 사실을 다시 한번 믿기로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약속이 85세가 되어 있는 늙은이 아브람과 75세가 되어 있는 불임여성 사래에게 임하게 됩니다. 그들은 한번의 시행착오를 겪은 다음에(16:2-3, 15-16) 15년후에 마침내 하나님의 역사로 약속의 아들 이삭을 얻게 됩니다(17:5-6, 19, 18:10, 21:1-7). 그러므로 모세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니라”(15:4-7).

(3)  셋째, 히브리서의 저자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구원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어야만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 의미를 잘못 이해하고 있으면 신앙생활이 침체에 빠지고 실족하게 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1)    히브리서의 저자는 한 마디로,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일견하기로는 완전한 설명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람이라고 하면 근본적으로 영혼과 육신으로 구성이 되어 있는데 그는 영혼의 구원만을 얻을 수 있는 믿음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육신의 구원이 없이 영혼의 구원만을 받아서 어떻게 하겠다는 말입니까? 히브리서의 저자가 잘못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이 아닙니다. 그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과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서 그렇게 설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조금 설명을 가해봅니다;

2)    첫째,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두가지 밖에 없습니다; ①하나는 자신의 지혜와 능력으로는 자신의 영혼과 육신을 도저히 영원히 살릴 수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②또 하나는 그러므로 영생의 존재이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나의 영혼을 받으시고 부디 그 영혼을 영원히 담을 수 있는 그릇인 영생의 육신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는 것입니다.

3)    둘째,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두가지 있습니다; ①하나는 창조주의 권능으로 영원히 죽지 아니하는 육신을 만들고 그 영생의 육신에 사람의 영혼을 담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②또 하나는 누구에게 영생을 주실지를 결정하신다는 것입니다(25:34-40). 왜냐하면,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한 인간의 영혼을 그 영생의 육신에 담아 영원한 저주 가운데로 들어가게 하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시기 때문입니다(3:22-24). 따라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회개하고 인내로 믿음생활을 끝까지 함으로써 영혼의 구원을 받은 성도에게만 영생의 몸을 부활로 선물하신다는 것입니다(10:36-39).

4)    참고로, 이 세상에서는 사람의 목숨이 육신에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영혼도 육신에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육신이 사라지게 되면 사람의 목숨이 끊어질 뿐만 아니라 영혼마저 없어지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사고(思考, 이성적인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것이 아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2:7). 조금 더 설명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5)    사람의 육신이란 흙에서 취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목숨이 끊어지게 되면 이 땅에서의 육신의 용도가 다하므로 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3:19). 하지만 그 속에 들어 있는 사람의 영혼은 다릅니다. 그것은 본래 창조주 여호와께서 사람의 육신 속에 불어넣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영혼의 주인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자연히 영혼이 머물고 있던 육신이 호흡을 중단하고 흙으로 돌아가게 되면 그 영혼은 본래의 주인을 찾아서 되돌아가고 마는 것입니다.

6)    지혜의 대왕인 솔로몬이 정확하게 그 사실을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곳으로 가거니와, 인생들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3:20-21). 예수님께서도 영혼이 육신과 함께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10:28).  

7)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운명을 하실 때에도 그와 같은 취지의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큰소리로 부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23:46). 창조주이신 아버지 하나님께 자신의 영혼을 맡아 달라고 부탁하면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운명을 하셨기에 무덤속에서 3일만에 부활의 역사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창조주의 능력으로 영생의 몸을 만들어 그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혼을 다시 넣어 주신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영생의 부활의 몸을 입으시고 승천하시며 아버지 하나님의 보좌 오른쪽으로 들어가십니다(2:9-10, 3:1, 4:14, 5:6-10, 7:21-22, 8:19:24, 2810:12-13). 그 뒤를 따르고자 하는 자들이 바로 사도들이며 예수님의 제자들인 성도들이라고 하겠습니다(3:10-16).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10:36-37);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실제로 받게 되는 자는 누구일까요? 히브리서의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을 묵상하면서 그 해답을 다음과 같이 찾아내고 있습니다;

(1)  첫째, 끝까지 인내하는 자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얻게 됩니다; 그렇다면, 성도가 언제까지 인내해야 할까요? 그 정답은 죽을 때까지 인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경우에는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그 고통을 인내하시면서 운명을 하십니다(15:33-37);

1)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인간의 수명이란 100년 안팎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긴 인내라고 하더라도 육신을 지니고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그 기간으로 한정이 되고 있습니다. 그 기간만 끝까지 참고 인내하게 되면 영원한 상급을 얻게 됩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신 것은 전부 영생에 속하고 있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17:3).

2)    그러므로 인내라고 하는 것은100년 안팎의 자신의 인생과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생의 것들을 바꾸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인내의 가치라고 하는 것은 아무리 높이 평가해도 부족합니다. 영원과 비교할 때 찰나에 불과한 인생 가운데 고통과 고난을 참고 견디는 그것으로써 영생에 속하는 하나님의 것을 얻을 수 있도록 만들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  둘째,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입니다; 그냥 인내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하면서 인내하는가가 중요합니다. 그 무엇이 바로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1)    예를 들어 자신의 야망과 욕심을 이루기 위하여 인내하는 경우는 이에 해당하지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자면, 먼저 자신의 이익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이익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뜻의 관철을 고집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뜻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2)    비록 자신이 싫어하는 자라고 하더라도 그 자가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고 있는 자라고 한다면 그자와 함께 동역하는 자세를 가지는 것이 인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경우를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9:50)고 말씀하십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공의를 행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3)  셋째, 잠시 잠깐 후면 그 약속의 성취가 이루어진다고 하는 사실을 믿고 있는 자입니다; 예수님께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14:18-20). 조금 설명을 해봅니다;

1)    첫째,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운명하신 예수님을 다시는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2)    둘째, 살아 있는 성도들은 살아 계신 예수님을 볼 수가 있습니다.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십니다. 영생의 몸을 입으시고 부활하셨기에 영원하도록 살아 계십니다. 그리고 영적으로 성도들에게 임재를 하시는 것입니다.

3)    셋째, 성도들도 살아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두가지로 해석이 됩니다;. ①하나는 성도들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고 죽을 때까지 인내로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장차 영생의 부활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영원히 사는 영생입니다. ②또 하나는 남은 인생을 살아가는 과정에 있어서도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보혜사 성령님을 임재시켜 주십니다(14:16-17). 그리고 영적으로 아버지 하나님도 부활하신 예수님도 성도들에게 임재하십니다(14:18-20). 그러므로 삼위일체 하나님과 함께 영적인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죽음에 매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살아 있는 자들입니다.    

둘째로,나의 의인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10:38);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나의 의인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10:38a); 히브리서의 저자는 모세가 창세기 제15장에서 기록한 글을 원용하고 하박국 선지자가 제2장에서 기록한 글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15:6),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2:4). 그러한 입장은 사도 바울의 로마서와 동일합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1:17).

(2)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10:38b); 히브리서의 저자가 본문 제37절과 제38절에서 인용하고 있는 글은 선지자 하박국의 글입니다. 그런데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2:3)는 구절의 해석에 있어서는 상당히 비약을 하고 있습니다. 그 구절의 의미에 대하여 히브리서의 저자는 나름대로 위와 같이 풀이를 하고 있습니다. 그 말의 뜻은 인내하는 믿음은 장차 올 큰 영생의 상급을 바라보면서 그것을 얻기 위하여 전진하는 것이지 결코 도중에 포기하고 마는 그러한 시시한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셋째로,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10:39); 성도는 자신의 능력과 지혜를 의지하여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를 않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주님의 대속의 십자가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거듭난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거듭난 인생의 주인은 주님이십니다. 주인을 모신 종으로서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매사를 하나님의 능력과 주님의 지혜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그에 따라 영생의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성도들의 믿음과 인내에 함께하십니다. 그 결과는 세상의 고난과 환난 때문에 믿음이 없어지거나 인내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며 인도하시는 성도들의 신앙생활이기에 자신과 온 세상의 영혼을 구원하기에 충분한 능력으로 발휘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본문은 사실 히브리서의 저자가 하박국 선지자의 글을 일부 원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2:3-4).

이 세상에 태어난 것들은 모두가 일정한 수명을 지니고 있는 피조물들입니다. 태어난 그 순간부터 죽음을 향하여 시간이 진행이 되고 있습니다.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법이 없습니다. 오직 영생하시는 창조주만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피조물을 돌보고 그 생명을 살리고 계실 뿐입니다.

이제 성도들이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이 세상의 피조물들을 돌보며 그 생명을 살리고자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고 영혼을 구원하고자 나서고 있습니다. 그 길에 세상적인 환난과 고난이 기다리고 있다고 하더라도 결코 인내하지 못하고 불신앙에 떨어지지를 않습니다.

그 이유는 그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벌써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부활과 승리를 가져오는 믿음과 인내를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에게도 동일한 믿음과 인내로 함께하실 것입니다. 아무쪼록 그와 같은 믿음과 인내로 영생을 소유하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