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히브리서 강해 제52강(히10:26-29)(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2. 21. 23:32

히브리서 강해 제52(10:26-29)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7 6 17()

 

모세의 율법을 폐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시키시는 하나님의 엄청난 결단과 심판의 단호함을 생각하고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히브리서 저자의 말씀에 대하여(10:26-29);

 

히브리서의 저자는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을 희생의 제물로 바치신 대속의 십자가의 의미를 다각도로 조명하고 있습니다. 그의 지적은 상당히 강력하면서도 예리합니다. 다음과 같이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첫째,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 들이고 대속의 십자가를 의지하여 회개를 한 성도는 다시는 율법에 따른 속죄의 제사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율법에 따른 제사로 의로움을 얻는 시대에서 이미 하나님과 주님의 구원역사를 바라보고 그것을 실천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움을 얻게 되는 새 언약의 시대로 넘어와 버렸기 때문입니다(10:26).

(2)  둘째, 이미 성도가 된 자가 주님의 구원역사에 동참하지 아니하고 제멋대로 세상의 이익과 탐욕을 추구하면서 마냥 살게 된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히브리서의 저자가 무섭고도 두려운 그들의 미래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는 속죄의 제사가 없기에 그저 불심판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10:27). 그러므로 시간이 늦기 전에 빨리 회개를 하고서 복음전파와 실천의 삶을 살아가야만 할 것입니다. 더 이상 율법에 따른 속죄의 제사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주님의 복음을 위하여 희생하고 헌신하는 그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3)  셋째, 여호와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게 되면 어떠한 대가를 치르게 되는 것일까요? 히브리서의 저자는 알기 쉽게 율법을 폐하시고 믿음의 의로 구원을 얻는 새 언약의 시대를 열기 위하여 자신의 몸을 대속의 십자가에서 만민구원을 위한 제물로 희생하신 예수님의 경우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율법의 절차에 비추어 보게 되면 두세 증인으로 모세의 율법을 어긴 죄가 인정이 되어 유죄판결을 받고서 십자가에 처형이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10:28).

(4)  넷째, 그렇게 하나님의 법을 어기게 되면 자신의 목숨을 내놓아야만 합니다. 하물며 만민구원을 위하여 자신의 아들을 성육신시키고 대속의 제물로 희생시키신 아버지 하나님의 그 마음을 외면하고 부정하게 되면 어떠한 징벌을 받게 될까요? 그것은 목숨만 내놓아서 해결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까지 내어놓고 영벌에 들어가는 처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10:29).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10:26);

(1)  진리는 창조주 하나님께 속하고 있는 것입니다(4:23-24, 14:17). ‘비진리는 거짓이며 그것은 거짓의 아비인 마귀가 소유하고 있습니다(8:44). 사람들은 그 사이에서 헤매고 있습니다;

1)    그 옛날 에덴동산의 아담부부처럼 어느 쪽을 따라야 할지 고민하게 됩니다(3:1-6). 만약 탐욕에 이끌리고 있는 육신의 생각을 쫓아 창조주의 뜻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비진리진리로 알고서 잘못 선택을 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였으므로 율법에 따라 매년 대 속죄일에 대제사장이 드리는 속죄의 제사에 참여를 해야만 합니다.

2)    그리하면 일년 동안 지은 죄가 탕감이 됩니다. 그리고 다시 죄를 범합니다. 또다시 그 다음해 대 속죄일의 제사에 가축을 제물로 바치고 참여를 하면 됩니다. 참으로 편리한 율법에 따른 속죄의 제사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백성들이 죄를 밥 먹듯이 짓고 있습니다. 매년 하루 속죄의 제사를 드리면 되는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그것이 율법이 주고 있는 적폐입니다.

(2)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두가지의 조치를 취해 주십니다. 그것이 구원의 길입니다;

1)    첫째, 하나님께서는 진리를 알 수 있는 지식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가르쳐 주시고 또한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은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사람들이 쉽게 알 수 있도록 복음으로 가르쳐 주십니다. 복음은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을 돌보고 그 생명을 전부 살리고자 하신다는 뜻을 말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만민구원과 영생구원 그리고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이 그 핵심입니다.

2)    그런데 연약한 육신을 가진 사람들이 그러한 하나님의 진심을 알고서 그 뜻을 제대로 실천할 수가 있을까요? 그것이 의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자신의 생애를 통하여 그것이 가능하다고 그 모범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의 성육신과 공생애 그리고 대속의 십자가의 죽으심의 의미가 모두 그러한 삶의 본을 보여주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3)    둘째, 진리의 성령님과 함께 성도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14:16-17). 예수님께서 비록 성도의 삶의 모범을 보여주셨다고는 하지만 그리스도와 성도들 사이에는 한가지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있었지만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성도들의 복음적인 삶을 돕기 위하여 아버지 하나님께 부탁하여 또 다른 보혜사인 진리의 성령님을 성도들에게 보내어 주십니다(24:49). 성령님께서 성도들에게 임재하여 내주 역사하시게 됨으로써 거듭난 영적인 삶이 가능해집니다. 진리를 쫓아서 실천하는 복음적인 생애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3)  그와 같은 조치가 이루어지고 있기에 이제는 율법에 따른 속죄의 제사가 사라지고 있습니다(10:26);

1)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제부터는 세가지를 의지하여 살아가야만 합니다; ①첫째, 그리스도의 복음을 제대로 배우는 것입니다. ②둘째, 예수님의 생애를 묵상하면서 그 모범을 따라 제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③셋째, 성령님과 함께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항상 명심해야만 합니다. 성령님의 생각과 움직임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창조주를 모시고 하나님 자녀로서 살아가고 있으므로 모든 생명을 돌보고 살리고자 하는 공의의 정신을 실천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결코 이기적이고 육신적인 욕심에 사로잡혀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이 세상에서는 이웃을 돌보고 살리기 위하여 자신이 먼저 희생하고 헌신하는 삶의 모범을 보여야만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이며 그리스도의 제자인 성도들의 삶의 방법론입니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이 다시 고의로 죄를 범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유대교인들처럼 매년 율법에 따라 드리도록 되어 있는 편리한 대 속죄일의 제사를 더 이상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기독교인이 되어 있는 성도들에게는 어떠한 속죄의 방법이 남아 있는 것일까요? 사도 바울의 설명에 따르게 되면 그 해법이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8:1-4).

3)   간략하게 풀이를 해봅니다; ①첫째, 성도는 그 삶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 말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자신의 거듭난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서 그 뜻만을 실천하는 종으로서 살아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뜻을 고집하고 그것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게 되면 안됩니다. ②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의 속성을 여전히 지니고 있는 육신이 자신을 죄 가운데로 끌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주 역사하시는 성령님께 도우심을 구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로 끝까지 살아갈 수 있도록 강력하게 역사하시고 자신의 삶을 인도해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그 기도로 말미암아 성도들은 성령님의 능력으로 육신을 이기고 영적인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만약 그와 같은 간구가 없다고 한다면 평안의 회복을 얻지 못하고 죄의식에 계속 사로잡혀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둘째로,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10:27);

(1)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의 희생의 능력을 무시하고 또한 내주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능력을 무시하고서 성도가 살아가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기간 중에 다음과 같이 대답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12:31-32).

(2)  신령과 진정은 창조주 하나님의 속성이므로 그것이 예배의 조건이 되고 있습니다(4:23-24). 그러므로 하나님의 속성을 무시하거나 모독하는 것은 피조물이 창조주를 거역하고 모독한 것이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되는 직접적인 요인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정확한 뜻이 복음으로 선포가 되거나 성령님께서 역사를 하실 때에는 피조물들이 옷깃을 여미고 말을 삼가해야 합니다. 함부로 자신이 더 옳다고 주장하거나 하나님의 역사를 폄하하게 되면 죄 사함을 받지를 못하고 영원한 처벌 가운데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10:27). 그것이 부활 승천하신 진리의 주님과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의 역사를 성도들이 항상 두려워하며 경외해야만 하는 이유입니다.

셋째로,모세의 법을 폐한 자두세 증인으로 말미암아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10:28);

(1)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는 만민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대속의 제사의 현장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유대교인들의 입장에서 바라보게 되면 그것은 저주를 받은 나무에 매어 달리신 것입니다(21:23, 3:13). 모세의 율법에 따라 에루살렘성전에서는 매년 대 속죄일에 대제사장이 모든 백성들의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속죄의 제사를 드리고 지성소를 출입하고 있습니다(16:29-34). 그렇게 일년에 한번씩 선민 유대인들이 전체적으로 속죄의 제사를 드리고 있으므로 그들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의인들입니다.

(2)  그렇게 자랑하고 있는 선민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겉으로만 율법을 지키는 척하고 있는 외식적이며  이중적인 신앙인들이라고 야단을 치십니다(15:7-9, 23:1-33). 그리고 예루살렘성전을 헐어버리고 3일만에 새로운 성전을 짓겠다고 호언장담을 하고 있습니다(2:19). 그것은 모세의 율법과 성전의 제례의식에 뿌리를 두고 있는 유대교리를 전면 부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민 유대인들을 견딜 수가 없어서 산헤드린 대 공회에서 율법에 따라 두세 사람의 증인을 세우고 하나님 모독죄로 예수를 정죄합니다(26:60-66, 10:28). 그리고 억지로 로마총독의 협조를 얻어서 나사렛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한 것입니다(27:23-26).

(3)  하나님의 아들이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모세의 법을 따르지 아니한 잘못 때문에 버림을 받고 저주의 십자가 처형을 당한 것으로 유대교인들은 생각하고 있습니다(10:28). 참고로, 나무에 매달려서 처형이 된다고 하는 것이 선민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가장 저주를 받은 죽음입니다(21:23).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금요일에 십자가에 못이 박히셨는데 그 다음날이 거룩한 안식일이므로 당일 시신이 십자가에서 내려지고 있습니다(19:31-34). 유대인들의 관념에 따라 저주의 나무에 시신을 매달아 놓는 것조차 부정하므로 십자가에서 그 시신을 제거한 것입니다.

넷째로,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10:29);

(1)  히브리서의 저자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처참함에 대하여 미리 말한 이유는 모세의 법을 어긴 경우와 만민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경우의 차이를 비교해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먼저 모세의 법에 대하여 다시 한번 간략하게 살펴봅니다;

1)    여호와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고 그들에게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의 사명을 감당하라고 하십니다(19:4-6). 율법을 주시고 여호와를 섬기는 신정국가를 만들고 이스라엘 자손들을 선민으로 삼으시는 이유가 바로 모든 이방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들의 속죄를 위하여 제사를 드려주는 나라 그리고 그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는 거룩한 백성의 역할을 하도록 만들기 위함입니다.

2)    그런데 그러한 선민의 의무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오로지 선민의 특권과 특혜만을 누리고자 합니다. 그들에게 모세를 통하여 준 율법과 성막 그리고 속죄의 제사만 있으면 항상 하나님 앞에 의인이 되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잘못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선민들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재천명하십니다. 그 결과 모세의 율법을 부인하고 성전의 제사를 폐지하는 자로 인정이 되어 유대교지도자들로부터 사형에 해당하는 자로 정죄가 되고 맙니다. 그 결과는 십자가의 참혹한 죽음입니다.

(2)  모세를 통하여 준 율법을 폐지하고자 한 예수 그리스도도 자신의 목숨을 내놓아야만 했습니다. 그렇다면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위하여 대속의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그 피의 공로 그리고 땅끝까지 성도들이 복음을 전파할 수 있도록 성령님께서 내주하여 역사하시는 것을 모두 부인하고 제멋대로 인생을 살아가게 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한 마디로,  십자가에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는 그 이상의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생명의 책에서 그 이름이 지워지며 거짓 선지자와 함께 영벌의 못에 던져지는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32:33, 20:10, 21:27). 그 점에 대한 히브리서 저자의 점잖은 결론이 다음과 같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10:29).

결론적으로, 유대교인들과 달리 기독교인들에게는 다시는 율법에 따른 속죄의 제사가 없다고 하는 것이 두려움으로 다가옵니다. 대 속죄일이 되면 예년처럼 가축을 대신 제물로 바치고 간단하게 자신이 일년 동안 지은 죄를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용서 받을 수 있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편리한 제도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러한 제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성도가 다시 죄를 범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사도 바울의 경우에는 여전히 죄에 연약한 자신의 육신을 발견하고서 참으로 곤고한 죄인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7:22-24).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령님의 내주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의 법에서 다시 벗어나고 있다고 감사하고 있습니다(8:1-2). 그러므로 정답은 예수님의 보혈로 다시 죄 씻음을 받고 성령님의 역사로 죄 의식을 몰아내고 평안을 회복하며 성도의 삶을 다시 신실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와 같은 하나님의 조치가 얼마나 좋은 것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매년 대 속죄일에 율법이 세운 대제사장을 통하여 가축으로 속죄의 제사를 드려보아야 그것이 지나간 한해 동안의 죄만 탕감이 될 뿐 여전히 선민 유대인들의 죄악된 삶을 어찌하지를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축의 피가 육신적인 정화의 효과만 있을 뿐 백성들의 양심과 마음까지 깨끗하게 하는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9:13, 10:4).

반면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대속의 십자가에서 흘린 보혈만이 단번에 드린 영원한 속죄의 제사이기에 성도들의 잘못을 마음속까지 용서해줄 수가 있습니다(9:12, 14-15). 그리고 마음과 양심에 그 대속의 피가 뿌려지면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과 칭의의 은혜를 얻었기에 진리의 성령님께서 임재하시고 내주 역사하십니다(14:16-17, 1:8, 2:1-4).

성도들은 그 능력으로 지상명령을 실천하면서 끝까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은혜가 본문 깊숙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그 사실을 발견하시고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