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히브리서 강해 제56강(히11:1-4)(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2. 23. 15:44

히브리서 강해 제56(11:1-4)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7 6 21()

 

믿음의 정의 그리고 믿음으로 알 수 있는 우주와 인생의 창조주에 대하여(11:1-4);

 

히브리서에서 가장 유명한 대목을 꼽으라고 한다면 대부분의 성도님들이 본문을 말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믿음이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가 가장 잘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11:1-2).

그런데 사람들이 익숙하게 알고 있다고 하여 그 말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본문에 대한 구절해석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다음과 같이 그 말씀의 뜻을 풀이해보고자 합니다;

(1)  첫째, 사람들이 바라고 있는 것은 미래에 대한 소망입니다. 아직 시간적으로 다가오지도 아니하고 있으며 경험하지도 못한 것이 미래입니다. 그 미래가 과거나 현재와는 달리 자신들의 소망을 이루어 줄 것으로 기대하고서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소망을 사람들은 누구에게 빌고 있는 것일까요? 사람들에게는 미래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지혜나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대상은 사람의 지혜와 능력을 초월하고 있는 그 무엇임이 분명합니다. 그것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미래의 일까지 좌우하면서 사람들과 소통을 할 수가 있는 존재입니다. 한 마디로, 영적인 존재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 영적인 존재는 둘로 갈라지고 있습니다; ①하나는 악한 영들입니다. ②또 하나는 하나님의 영입니다. 그 밖에 영적인 능력이 없지만 사람들이 신처럼 섬기고 있는 대상이 있습니다. 그것이 우상입니다. 그러므로 이상 세가지에 대하여 먼저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우상(偶像)은 영어로는 보통 idol로 표현하고 있지만 그 의미는 사람이 만든 신들”(man-made gods)입니다. 사람이 만든 것이므로 그 지혜나 능력이 사람의 것을 초월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상에게 미래의 소망을 빌어보아야 효과가 없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우상을 만드는 자는 다 허망하도다. 그들이 원하는 것들은 무익한 것이거늘, 그것들의 증인들은 보지도 못하며 알지도 못하니 그러므로 수치를 당하리라. 신상을 만들며 무익한 우상을 부어 만든 자가 누구냐? 보라 그와 같은 무리들이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그 대장장이들은 사람일 뿐이라. 그들이 다 모여 서서 두려워하며 함께 수치를 당할 것이니라”(44:9-11).

2)    사람이 만들지 아니한 것들 가운데 악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영들이 있습니다. 그 악한 영들은 사람들을 자신들에게 익숙한 죄와 사망의 법으로 지배하고자 합니다. 성경에서는 그것들을 악한 영들 또는 악령들’(evil ghosts)이라고 부릅니다(삼상16:23, 2:2, 6:12). 그들은 우월한 영적인 능력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시공간에 갇혀 있는 인간들로부터 신(, god)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그들의 출신성분에 대하여 히브리전승에서는 본래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던 미()의 천사장 루시엘이 교만하여 자신의 보좌를 창조주의 자리로 올리려고 감히 반역하다가 자신을 따르던 천사들과 함께 징벌을 받아 이 세상에 내어쫓긴 것이라고 합니다. 참고로, 루시엘이 루시퍼가 된 이야기를 이사야가 그의 선지서에 적고 있으며 타락한 천사들에 대한 이야기를 장로 유다가 유다서에 기술하고 있습니다(14:12-17, 1:6). 그러므로 악한 영들에게 자신의 소망을 빌어보아야 그 결과는 자신의 영혼이 죄와 사망의 늪으로 빠져드는 것 뿐입니다.

3)    그렇다면 사람들이 죄와 사망의 사로잡힘을 벗어나서 영원한 구원의 미래를 맞이하자면 누구를 의지해야만 할까요? 그 해답이 성경에서 주어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자신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하시고 흙으로 만든 육신에 자신의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어 주신 창조주 곧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야만 합니다(1:26-27, 2:7, 30:19-20). 그런데 영이신 아버지 하나님을 육신을 가지고 시공간에 갇혀 있는 인간들이 쉽게 만날 수가 없습니다. 창조주의 영광의 진면목을 보는 순간 피조물이며 죄인들인 사람들이 죽게 되고 그 체질이 녹아 버리기 때문입니다(33:20, 벧후3:12).

(2)  둘째,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영생의 하나님을 만나도 죽지 아니하도록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중보자를 보내어 주십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그 정체가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 육신을 가지시고 제자들과 함께 공생애를 지내십니다. 구체적으로, 히브리정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하나님말씀의 본뜻을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천국복음으로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대속의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회개하는 자들에게 하나님 아버지의 죄 사함과 칭의의 은혜가 주어지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으로 간주가 된 성도들에게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어 주십니다(24:49, 1:8). 그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제자들인 성도들은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며 그리스도의 제자를 길러내는 목양의 삶을 살게 됩니다(28:18-20). 따라서 성경에서는 예수님을 구원주 그리스도로 믿고서 그 제자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장차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게 되는 미래의 소망을 얻을 수가 있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점을 본문에서 히브리서의 저자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11:1a)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 뜻은 한 마디로, “예수님을 구원주 그리스도로 믿고서 그 제자로 살아가는 믿음생활이 장차 영생의 구원이라는 열매를 얻게 한다는 것입니다.

(3)  셋째,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이며 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그 믿음으로 증거를 얻었다고 히브리서의 저자가 적고 있습니다(11:1b-2). 그 의미를 풀이하기 위하여 먼저 보이는 것보이지 않는 것의 개념을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1)    보이는 것은 사람들이 육안(肉眼, physical eye)으로 볼 수 있으며 일상생활에 있어서 친숙한 세계입니다. 그러한 세계는 그 크기로 보아 보통 mm에서 km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보다 작거나 더 크게 되면 사람들의 육안에서는 사라지게 됩니다. 그에 따라 사람들은 도구를 활용하여 더 작은 미시의 세계’(micro-world)와 더 큰 거시의 세계’(macro-world)를 과학적으로 탐구하고 있습니다.

2)    현대과학으로 대충 짐작을 하고 있는 미시의 세계거시의 세계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가 있습니다; “물질의 기본단위인 원자의 세계로 들어가자면 10의 (-8승)cm의 미시세계에 도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차원에서 비로서 원자의 둘레를 돌고 있는 전자를 만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핵물리학자들이 그 단위를 옹스트롬 Å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사람이 볼 수 있는 cm의 세계로 말하자면 우라늄의 경우 그 원자의 수가 약 6x(10의 23승)정도가 됩니다. 그 숫자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은 거시의 세계를 추정하는데 있어서 역시 유용하기 때문입니다. 지구과학자들은 지구에는 약 10의 23승개의 모래알이 있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주과학자들은 전체 우주에는 지구와 같은 행성이 약 10의 23승개가 존재하고 있다고 가정하고 있습니다.”

3)    가정’(假定, assumption)이라고 하는 것과 확증’(確證, assurance)이라고 하는 것은 다릅니다. 왜냐하면, ‘가정가설’(假說, hypothesis)로 발전하고 있지만 확증이론’(理論, theory)이 현실로 증명이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증거’(證據, evidence)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가정이나 가설에 어울리는 용어가 아닙니다. 적어도 이론이 현실로 증명이 된 경우를 염두에 두고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히브리서의 저자가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후자의 경우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일까요? 사람의 육안으로 보이지 아니하고 있는 세계에 대하여 어떻게 그렇게 확언을 할 수가 있는 것일까요? 이제 그 비밀을 알아볼 차례입니다.

4)    히브리서의 저자는 영적인 안목이 육적인 눈보다 더 정확하며 더 확실한 것이라고 하는 가정에서부터 그의 사유의 출발을 하고 있습니다. 보이는 물질적인 세계가 보이지 아니하는 영적인 세계의 투영으로 말미암아 창조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세계가 참 형상인 실체이며 물질적인 세계는 그것의 허상이며 가짜 형상에 불과합니다(9:24, 10:1). 그것은 일견하기로는 헬라 시대의 영지주의자’(靈智主義者, Gnostics)들의 관념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한가지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창조주가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입니다”.

5)    헬라의 철학자들은 하늘의 지혜를 가진 영적인 세계와 그 영적인 지혜가 투영이 되고 있는 마치 그림자와 같은 허상인 물질적인 세계는 별개의 것이라고 사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그냥 자연적으로 움직이며 존재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고 그 창조주가 없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유물론입니다. 단지 이 세상을 발생시키고 있는 그 영적인 지식 곧 영지’(靈智, Gnosis)를 철학자가 깨닫게 되면 신과 같은 철학왕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력(自力)구원사상이며 인본주의적인 범신론을 말하고 있습니다.

6)    그러나 히브리정경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그러한 무주공산(無主空山)의 피조세계가 아닙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1:1-2). 한 마디로, 창조주가 계시며 우주의 질서를 주관하고 계신다는 유신론(有神論)이며 특히 유일신론(唯一神論)입니다. 지금도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창조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계십니다. 미시세계가 되었든지 거시세계가 되었든지 아니면 사람들에게 익숙한 친밀한 세계가 되었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모든 세포와 우주의 질서가 여호와의 창조의 섭리와 말씀 그리고 명령에 따라 움직이고 있습니다.

7)    그러므로 영적인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이 세상 물질계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피조물인 인간의 생사도 그들의 삶인 인생도 그리고 그들의 역사도 모두 하나님의 장중에서 섭리가 되고 있습니다. 그 사실을 확신하고 있기에 히브리서의 저자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존재와 그 능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그의 영적인 안목 곧 그의 믿음으로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11:1b-2). 히브리정경에 기록이 되고 있는 그 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그 사실을 믿고서 믿음의 인생을 신실하게 살아간 결과 모두 영생의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구원주를 만나고 있다는 것입니다(19:23-27, 3:17-19, 11:14-16, 19, 26).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믿음바라는 것들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증거,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11:1-2);

(1)  히브리서의 저자가 본문에서 믿음의 정의를 두가지로 내리고 있습니다;

1)    첫째, 믿음이란 미래에 대한 소망을 그 열매로 성취하는 삶의 방식이라는 것입니다(11:1a). 믿음은 현세적인 소망을 넘어서는 영생의 구원의 소망을 실현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한한 생명을 가진 인간이 창조주로부터 영생을 얻을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바로 창조주 여호와를 믿고서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의 말씀의 뜻대로 살아가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2)    둘째, 보이지 아니하는 영생의 천국과 하나님의 존재를 어떻게 알 수가 있을까요? 시공간에 갇혀서 제한적인 육신을 가지고 100년 안팎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인간들의 형편으로는 도무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자신을 계시’(啓示, revelation)하십니다. 창조주의 살아 계심을 믿으며 계시의 말씀을 믿고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인생을 살아가라고 하십니다. 그렇지만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고 있는 인간의 안목으로써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여호와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믿을 수 있도록 성령의 감동을 주십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믿음이란 하나님의 선물이며 성령님께서 열어 주시는 영적인 안목입니다(11:1b).

(2)  그렇게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섬기고 살아감으로써 영생의 구원을 확신하고 있는 믿음의 선진들이 히브리정경에 기록이 되고 있습니다(11:2). 여호와 하나님께서 성령의 감동으로 그들에게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삶의 방식을 가르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영에 감동을 받은 선지자들이 여호와의 계시의 말씀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선포하고 생도들에게 가르쳐주며 선지서를 기록했습니다. 나중에는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셔서 공생애를 통하여 제자들과 함께 복음사역을 하시고 대속의 십자가를 지십니다.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앙망하고 있는 구약상의 믿음의 선진들과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고 있는 모든 성도들이 영생구원을 얻도록 조치하신 것입니다(11:16, 19, 26, 22:28-30).  

둘째로,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11:3);

(1)  믿음이 무엇인가를 잘 알 수 있도록 히브리서의 저자가 믿음에 속하지 아니한 두가지 예를 의미상으로 시사하고 있습니다;

1)    하나는 범신론’(汎神論, 여러 신을 믿는 인본주의 사상)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다른 여러 신들이 이 세상을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경우입니다(11:3a 반대해석임). 그러므로 여러 신들은 각자 세상사람들에게 섬김을 받기 위하여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사람들은 자신의 입지를 넓혀 나갈 수가 있으며 운신의 폭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입장에서 그것은 인본주의적인 사고방식에 속하고 있습니다. , 여러 신들이 사람들의 주인이 아니라 일종의 도구주의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2)    또 하나는 무신론’(無神論)입니다. 이 세상이 자연 발생적인 것이라는 견해입니다(11:3b 반대해석임). 만약 창조의 신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창조만 했을 뿐 이제는 그 운영에서 손을 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조의 질서를 따라서 이 세상은 자연의 이치대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 이치만 깨닫게 되면 누구나 이 세상의 지배자가 될 수 있습니다.

(2)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이란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믿음이 있어야 이 세상이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11:3). 그와 같은 맥락에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철저하게 유일신론을 신봉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주어지고 있는 창조주의 축복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놀라운 축복인 믿음을 가지고 성도들이 자신의 남은 인생을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 그리고 자신의 구원주이신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실천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장차 천국에서 다 함께 영생의 구원을 누리는 신앙생활입니다.

셋째로,믿음으로 아벨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11:4);

(1)  에덴동산에서 여호와 하나님과 동거하며 동행하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던 믿음의 조상 아담부부가 실족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욕심 때문에 그만 금단의 열매인 선악과를 따먹어버렸기 때문입니다(3:1-7). 그들이 에덴동산에서 동쪽으로 내어 쫓기게 됩니다(3:23-24). 아담부부에게서 두 아들이 태어납니다. 가인과 아벨입니다(4:1-2). 그들이 부모님으로부터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을 대물림하고 있습니다.

(2)  그런데 그 신앙이 두가지 형태로 갈라지고 있습니다;

1)    첫째, 장남인 가인은 이기적인 신앙심을 지니고 있습니다. 토지의 소산 가운데 좋은 것은 모두 자신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통하지 아니한 곡식의 열매로 여호와께 제사를 드립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마음에 여호와를 먼저 생각하는 마음이 없다는 사실을 직시하십니다. 그래서 그 제사를 열납하지 아니하십니다(4:5).

2)    둘째, 차남인 아벨은 그와 반대입니다. 그는 양을 치면서 모든 것이 여호와의 은혜라고 생각하면서 언제나 하나님이 우선입니다. 그러므로 양을 잡아서 제사를 드림에 있어서도 가장 좋은 것을 정성껏 바칩니다. 그 선의의 제사를 여호와께서 기쁘게 받으십니다(4:4). 그것이 아벨이 의롭다고 하는 증거입니다(1:17, 11:4a).

(3)  장남인 가인이 아벨의 제사를 받으시고 자신의 제사에 대해서는 퇴짜를 놓으신 하나님을 원망합니다(4:5). 그리고 동생을 시기하고 미워합니다. 마침내 아무도 모르게 동생을 살해하고서 암매장을 합니다(4:8). 그는 완전범죄를 도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피조세계를 두루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4:10-11). 징계를 받아 유배지로 떠나게 됩니다(4:12).

(4)  그 대목에 대한 창세기 제4장의 이야기를 히브리서의 저자가 원용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우선으로 섬긴 아벨이 믿음의 사람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11:4a). 따라서 그는 하나님 안에서 살아 있으며 그의 믿음이 지금도 살아서 창세기를 읽는 자에게 무엇이 올바른 믿음생활인가를 가르쳐주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11:4b).

결론적으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피조세계를 인간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적인 안목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육신적인 눈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고 보이는 것만을 실재하는 것으로 인정합니다. 그리고 보이는 것들의 변화와 움직임을 체계적인 지식으로 정리하고서 그것을 자연의 법칙으로 받아 들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을 가진 성도들의 영적인 안목은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육안으로 볼 수가 없는 하나님의 영생의 세계를 영적인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창조주의 살아 계심과 이 세상을 섭리하시는 역사를 깨닫고 있습니다. 나아가서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원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과 그것을 구현하기 위하여 자신을 제물로 바치신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감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남은 인생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감으로써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고자 합니다.

그와 같이 천국의 영생의 열매를 얻고자 하며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과 주님께서 원하시는 인생을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 성도의 믿음입니다(11:1). 그 믿음은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이전에도 구약상의 믿음의 인물들에게서 발견이 되고 있습니다(11:2). 따라서 벌써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복음서에서 읽고 있는 성도들은 이제 눈으로 보듯이 자신들의 믿음생활에 박차를 가하여야 하겠습니다(11:3-4).

그러므로 아무쪼록 본문의 의미를 깊이 묵상하시면서 성도님들에게 믿음이 견고해지는 은혜가 풍성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