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강해 제270강(렘51:20-24)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9년 2월 16일(토)
여호와께서는 이 세상을 심판하기 위하여 신바벨론의 군대를 어떻게 사용하셨으며 이제는 그들을 심판하기 위하여 어떻게 버리시는가?(렘51:20-24)
신바벨론제국의 갈대아 군대가 주전 600년을 전후하여 중근동에서 천하무적입니다. 그렇지만 주전 539년이 되면 갑자기 아리안족인 메대와 바사의 기병에 의하여 갈대아 군대가 박살이 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역사적으로 카스피해에서 동서양의 유목민들이 함께 살게 됨으로써 혼혈민족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들을 서양에서는 ‘유러피안 아리안’(European Aryan)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훗날 아리안족이 인도까지 들어갔을 때에는 ‘인도 아리안’(Indo Aryan)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들은 유러피안과 몽골리안의 혼혈입니다. 아리안족은 동서양 유목민의 피를 모두 가지고 있는 그 후예들이기 때문입니다. 그에 따라 그들은 초원을 누비는 유목민 특유의 두가지 무기체계가 발달이 되어 있습니다;
(1) 하나는, 기가 막힌 기마술을 어려서부터 익히고 있습니다.
(2) 또 하나는, 눈이 밝아 먼 곳을 볼 수 있으며 그곳까지 도달하는 무기인 강한 활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말 위에서 달리면서 그러한 강궁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므로 그 공격을 막아 내기가 농경민족으로서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아리안족은 강성하게 되면 따뜻한 남쪽의 비옥한 땅에서 살고자 남하를 합니다. 그들의 꿈은 비옥한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점령하여 한번 살아보는 것이지만 그것이 어렵습니다. 역사적으로 강대국들이 차례로 그곳을 점령하고 있으므로 아직 아리안족이 그들을 이기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리안족은 카스피해와 티크리스 강 사이에 살면서 메대 왕국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전 610년경이 되면 일부 아리안족이 더 남하를 하여 이란 북부 고원지대를 차지합니다. 그곳을 지배하고 있는 엘람 왕국이 당시 앗수르제국과 신바벨론제국 사이의 전쟁에 휘말려서 그만 약소국이 되어버렸기에 그 기회를 틈타 아리안족인 바사인들이 그 땅을 점령한 것입니다.
그때부터 아리안족인 메대 왕국과 바사왕국은 서로 내통을 하면서 오로지 신바벨론제국의 세력이 약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마침내 그 기회가 포착이 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주전 539년 신바벨론제국의 수도인 바벨론을 그들이 기습하여 빼앗게 된 것입니다.
아리안족에게 그러한 호기를 허용하고 만 신바벨론제국의 사정에 대하여 조금 알아봅니다;
(1) 천하무적의 영웅인 신바벨론의 황제 느부갓네살이 주전 562년에 서거하고 나자 6년간 혼란과 내분의 시대가 전개됩니다. 느부갓네살의 아들인 에윌므로닥 황제가 2년만에 폐위가 되고(렘52:31) 느부갓네살의 큰 사위인 네르갈사레셀이 황위를 찬탈합니다(렘39:3). 그러나 4년후에 승하를 하면서 아들에게 황위를 물려주자 마자 반란을 만나게 됩니다. 느부갓네살의 작은 사위인 나보니더스 장군이 주전 556년에 반란에 성공하여 새로운 황제가 됩니다.
(2) 그렇게 신바벨론제국의 수도인 바벨론 성에서 반역사건이 꼬리를 물게 되자 지방에서는 두가지 사건이 발생합니다;
1) 하나는, 아리안족들이 신바벨론의 견제를 벗어나 독립을 한 것입니다. 메대와 바사 왕국이 독립을 쟁취하고 점점 강성해지기 시작합니다.
2) 또 하나는, 변방 아라비아에서 대규모 반란이 발생합니다. 그곳에서 가나안 일대의 망한 왕국을 재건하겠다고 하는 부흥운동이 다시 거세게 나타난 것입니다.
(3) 어쩔 수 없이 신바벨론의 나보니더스 황제는 주전 550년경부터 갈대아 군대를 이끌고 아라비아 데마에 주둔을 하게 됩니다. 그는 그곳에 별궁을 짓고서 10년간 반군들을 소탕하는 지루한 소모전에 휘말리고 맙니다. 그러자 황제는 내치(內治)를 태자인 벨사살에게 맡기게 됩니다. 그런데 제국의 수도인 바벨론을 지키고 있는 벨사상 왕은 천하무적인 갈대아 군대의 위력을 믿고서 연회를 즐기고 있습니다(단5:1-3). 그것이 오판이며 착각입니다. 메대와 바사의 연합 기병이 야습을 하자 갈대아 군대가 제대로 힘을 써보지도 못하고 그대로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단5:30-31).
그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요? 그 이유를 시사해주고 있는 대목이 오늘의 본문인 제20-2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의 철퇴 곧 무기라. 나는 네가 나라들을 분쇄하며, 네가 국가들을 멸하며, 네가 말과 기마병을 분쇄하며, 네가 병거와 병거대를 부수며”(렘51:20-21).
언뜻 보면, 그 대목은 여호와의 무기로 신바벨론제국의 갈대아 군대가 쓰임을 받고 있는 것을 알기 쉽게 ‘여호와의 철퇴’와 같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하필이면 왜 ‘철퇴’로 표현을 하고 있는 것인지를 곰곰 생각해보면 다음과 같은 이치를 깨닫게 됩니다;
(1) 첫째, 갈대아 군대는 농경사회인 갈대아 우르에서 조련이 된 군대입니다. 농경사회에서는 일반적으로, 비옥한 토지와 평야를 지키는 산성이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새지 산성을 함락하게 되면 그 아래의 들판을 차지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갈대아 군대는 공성용(攻城用) 무기를 많이 개발하고 있습니다. 돌을 쏘는 기계와 성문을 부수는 기계 등입니다. 그것들의 특징이 한마디로, ‘철퇴’입니다.
(2) 둘째, 평야지대에서 갈대아 군대의 무기는 철제용 전차입니다. 강력한 전차로 적의 진영을 휩쓰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약한 적의 전차가 부수어지고 적의 기마대가 쓰러지는 것입니다. 그것 역시 기능면에서는 철퇴와 같습니다. 그와 같은 갈대아 군대의 위용 앞에 가나안 일대의 왕국들과 애굽의 군대가 맥을 쓰지 못하고 멸망을 당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주전 539년부터 3년간 계속이 된 아리안족과의 전투에서 갈대아 군대가 대패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한마디로, 갈대아 군대의 ‘철퇴 작전’이 무용지물과 같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조금 구체적으로 살펴봅니다;
(1) 첫째, 유목민 출신인 아리안족의 군대가 갈대아 군대의 전차를 상대하기 위하여 강궁을 개발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전차를 박살내는 것이 아니라 그 전차를 타고서 진격하고 있는 병사들을 표적으로 삼고 있습니다. 물론 전차를 몰고 있는 갈대아 병사들은 중무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멀리서 정확하게 화살을 날려서 저격을 하고 있는 것이므로 육신을 가진 병사들이 죽임을 도저히 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2) 둘째, 갈대아 군대의 기마대를 상대하기 위하여 아리안족 군대가 사용하는 것이 말위에서 화살을 날리는 기술입니다. 갈대아의 기병들은 적진을 차고 들어가서 큰 칼과 긴 창으로 적을 척살하는데 능숙합니다. 그리고 활은 말을 정지한 다음에 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리안족 기병들은 다릅니다. 적의 주위를 멀리서 돌면서 말위에서 화살을 한꺼번에 날리는 것입니다(렘50:14). 멀리서 날아오는 화살의 소낙비를 갈대아 기병들이 피할 도리가 없습니다. 손방패를 사용하지만 아리안족의 화살이 정확하게 그 허점을 파고 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3) 셋째, 접근전이 발생한 경우에는 아리안족 기병들이 사용하고 있는 짧은 투창이 또한 위협적입니다(렘50:42). 가까운 거리에서 번개같이 던지는 그 투창을 갈대아 기병들이 피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많은 갈대아 군사들이 전사를 당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아리안족의 투창과 강궁 그리고 기마술이 훗날 인도까지 점령하게 되는 승리의 비결이 되고 있습니다. 참고로 그 점을 말하고 있는 지오산 박사의 지적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인더스 문명이 전적으로 기후 변화로 인해 사라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같은 시기에 철기와 말, 마차를 가진 인도-아리안의 문화가 유입되고 있었다. 그러나 겨울 계절풍이 한 가지 역할을 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의 철퇴 곧 무기라. 나는 네가 나라들을 분쇄하며, 네가 국가들을 멸하며, 네가 말과 기마병을 분쇄하며, 네가 병거와 병거대를 부수며”(렘51:20-21); 다음과 같이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의 철퇴 곧 무기라. 나는 네가 나라들을 분쇄하며, 네가 국가들을 멸하며”(렘51:20); 갈대아 군대가 개발한 공성용 무기가 농경민족들의 나라를 정복하는데 있어서 크게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마치 철퇴처럼 공성용 무기들이 적의 성곽을 부수고 성문을 깨부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농업사회인 시리아와 가나안 일대의 왕국들이 하나같이 갈대아 군대에게 멸망을 당하고 맙니다. 나일강 유역의 애굽의 성읍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전 582년경 신바벨론의 느부갓네살 황제가 갈대아 군대를 지휘하여 애굽을 치자 애굽의 제26왕조가 그들의 공격용 무기를 당하지 못하고 나일강 유역을 전부 내주고 맙니다.
(2) “네가 말과 기마병을 분쇄하며, 네가 병거와 병거대를 부수며”(렘51:21);
1) 갈대아 군대가 사용하고 있는 전차와 공격용 무기가 적들의 것보다 더 강하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갈대아 군대의 전차가 상대국의 전차와 부딪히면 부수어지는 쪽은 상대방의 전차입니다. 그 이유는 철의 강도가 신바벨론의 것이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전차 뿐만 아니라 갈대아 군인들이 휘두르고 있는 칼과 긴 창 그리고 철퇴도 당시로서는 최강입니다. 그러므로 상대국의 마병 뿐만 아니라 때로는 말까지 그 머리가 박살나고 있습니다.
2) 그와 같이 두려운 갈대아 군대의 모습을 소선지서에서는 니느웨 성을 공격하는 모습으로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의 용사들의 방패는 붉고 그의 무사들의 옷도 붉으며, 그 항오를 벌이는 날에 병거의 쇠가 번쩍이고, 노송나무 창이 요동하는도다. 그 병거는 미친 듯이 거리를 달리며, 대로에서 이리저리 빨리 달리니, 그 모양이 횃불 같고 빠르기가 번개 같도다. 그가 그의 존귀한 자들을 생각해내니, 그들이 엎드러질 듯이 달려서 급히 성에 이르러, 막을 것을 준비하도다. 강들의 수문이 열리고, 왕국이 소멸되며, 정한대로 왕후가 벌거벗은 몸으로 끌려가니, 그 모든 시녀들이 가슴을 치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우는도다. 니느웨는 에로부터 물이 모인 못 같더니, 이제 모두 도망하니, 서라 서라 하나 돌아보는 자가 없도다. 은을 노략하라. 금을 노략하라. 그 저축한 것이 무한하고, 아름다운 가구가 풍부함이니라. 니느웨가 공허하였고, 황폐하였도다. 주민이 낙담하여 그 무릎이 서로 부딪히며, 모든 허리가 아프게 되며 모든 낯이 빛을 잃도다”(나2:3-10).
둘째로, “네가 남자와 여자를 분쇄하며, 네가 노년과 유년을 분쇄하며, 네가 청년과 처녀를 분쇄하며, 네가 목자와 그 양떼를 분쇄하며, 네가 농부와 그 멍엣소를 분쇄하며, 네가 도백과 태수들을 분쇄하도록 하리로다”(렘51:22-23); 다음과 같이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네가 남자와 여자를 분쇄하며, 네가 노년과 유년을 분쇄하며, 네가 청년과 처녀를 분쇄하며”(렘51:22); 갈대아 군대는 적군만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적의 성읍을 정벌할 때에는 남녀노소를 구별하지 아니하고 우선 학살을 합니다. 그 이유는 갈대아 군대에 대한 공포심을 최대한 심어 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하면 적들은 다시는 갈대아 군대에게 대항을 할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갈대아 군대를 지휘하고 있는 느부갓네살 황제의 명령이라고 하면 무조건 복종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공포심을 심어주고 있는 것이 갈대아 군대이므로 신바벨론제국의 수도인 바벨론 성이 역사적으로 악한 제국의 도성이라는 영적인 상징성을 지니게 된다고 하겠습니다(계17:5).
(2) “네가 목자와 그 양떼를 분쇄하며, 네가 농부와 그 멍엣소를 분쇄하며”(렘51:23a); 신바벨론제국은 중근동의 모든 재화와 보물을 약탈하여 그들의 수도인 바벨론 성으로 가지고 가려고 합니다(왕하25:13-17, 단5:1-3). 그리고 갈대아 군대의 군량미와 보급품은 현지에서 조달하고 있습니다. 그에 따라 점령지역의 목자의 양떼와 농부의 소가 모두 공물로 바쳐지고 맙니다(렘51:23a). 그것들을 도축하여 말려서 군대의 양식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3) “네가 도백과 태수들을 분쇄하도록 하리로다”(렘51:23b); 느부갓네살 황제는 메소포타미아의 지배국이 되는데 만족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중근동을 전부 정복하여 대제국을 세우고자 합니다. 따라서 시리아와 가나안 일대의 왕국들을 정복하면서 그곳의 왕족과 귀족들을 철저하게 처형하거나 포로로 삼아 끌고 옵니다. 그리고 그 땅을 신바벨론의 지방조직으로 바꾸어 버립니다. 그에 따라 적들의 지방 성읍을 다스리고 있는 도백과 태수들을 모두 처형하거나 포로로 삼습니다. 그 대신에 갈대안인이나 친 바벨론 인물을 그 지방을 다스리는 총독이나 지방의 도백으로 삼고 있습니다(렘40:5, 단2:49, 3:2). 느부갓네살 황제는 애굽의 나일 강 유역까지 정복하면서 그곳에서도 총독을 두고서 군정을 실시하고자 합니다.
셋째로, “너희 눈 앞에서 그들이 시온에서 모든 악을 행한대로, 내가 바벨론과 갈대아 모든 주민에게 갚으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51:24);
(1) 신바벨론제국의 갈대아 군대에 의하여 주전 586년 여름에 예루살렘성이 함락을 당합니다(렘39:1-3). 그리고 유다 왕국이 사라집니다(렘39:4-10).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가 되어 끌려가고 맙니다(렘39:9). 예루살렘성이 불에 타고 유다의 성읍들이 초토화가 되고 맙니다(왕하25:9-10, 렘7:34, 33:10-11, 38:18, 23). 수많은 유다의 군사들과 장정들이 죽임을 당하고 귀족들과 제사장들이 처형을 당하고 맙니다. 그와 같이 끔찍한 멸망이 도래한 이유를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예언의 말씀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선민 유대인들이 여호와신앙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며 세상적인 탐욕과 정욕을 쫓아 죄악을 범하며 살아갔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그 길을 돌이키라고 선지자들을 보내어 그토록 외치게 했지만 그들은 결코 그 어긋난 길에서 돌이키지 아니한 것입니다. 그 결과 여호와께서 갈대아 군대를 동원하여 선민의 나라를 멸하고 그 백성들을 이방 땅에서 포로생활을 하도록 처벌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이스라엘 자손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잘못에 대한 책임이 면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출3:7-12, 19:4-6). 왜냐하면, 선민 유대인들의 잘못을 처벌하는 것만이 그들을 여호와의 백성으로 선택하신 여호와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2) 또한 본문에서 유다 왕국을 멸망시킨 신바벨론제국의 죄악에 대하여 훗날 여호와께서 다시 처벌을 하신다고 하는 것도 이상합니다(렘51:24). 한때는 여호와의 칼과 철퇴로 유용하게 사용한 갈대아 군대입니다(렘25:1-11, 51:20). 그런데 나중에는 그들에게 여호와의 종으로 살아가지 아니하고 포로들을 학대하며 자신들의 신상인 ‘벨 므로닥’을 창조주 하나님으로 알고 섬기라고 우상숭배정책을 강행하였다고 하여 그 죄를 물어 완전히 소멸시키는 것이 마치 토사구팽(兎死狗烹)과 같은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렘50:1-3, 46). 그러므로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의 잘못에 대하여 그리고 신바벨론제국의 잘못에 대하여 그들을 차례로 전부 처벌하고 심판하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그들을 잘못 만드신 조물주 여호와 하나님께서 스스로 그 책임을 먼저 지시는 것이 올바른 순서입니다. 그와 같은 의미에서 본문의 말씀은 그 내용에 있어서 하나님의 아들이 대속의 그리스도로 이 세상에 오신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전제로 하고 있는 그러한 성격의 예언의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렘51:24, 사53:1-12, 요1:29, 3:16-17, 빌2:5-11).
결론적으로, 주전 605년부터 주전 540년까지는 신바벨론제국의 갈대아 군대가 천하무적입니다. 그러나 70년이 되지 못하여 세계 최강의 갈대아 군대가 아리안족의 기마병의 공격에 무릎을 꿇고 맙니다.
인간세상에서는 영원한 천하무적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의 육신이 연약하고 한시적이듯이 인간의 문명도 제국의 영광도 패권국의 군대의 강력함도 한시적일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겸허하게 영원하신 여호와의 이름 앞에 그 종으로 바로 서야만 합니다. 그것이 여호와의 병사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남은 평생 보람 있게 쓰임을 받을 수 있는 비결입니다. 아무쪼록 겸손하게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풍성하게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
(신바벨론의 왕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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