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22년 손진길 목사 설교문

여호와의 종 다윗이 실천한 선민의 정의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실천한 창조주의 공의와 사랑(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11. 8. 06:36

제목; “여호와의 종 다윗이 실천한 선민의 정의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실천한 창조주의 공의와 사랑”(33:14-18)

설교일; 주후 20221113일 주일

작성자; 손진길 목사(118일 화요일 작성)

 

선지자 예레미야가 기록하고 있는 본문 여호와의 말씀 가운데 백미는 제15절입니다; “15. 그날 그 때에 (창조주 여호와)다윗에게서 한 공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정의공의실행할 것이라”(33:15);

그 구절의 자세한 의미에 대해서는 본문말씀에 대한 각 구절의 풀이에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렇지만 본문말씀 전체의 깊은 이해를 위하여 여기서는 서론격으로 구약 히브리정경에서 말하고 있는 정의공의의 차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대체적인 개념을 미리 설명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첫째,정의’(justice)라고 하는 것은 사회의 법정에서 옳다고 선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 집단의 이익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사회의 안정에 기여하고 있는 것이면 정의입니다. 그 반면에 사회의 안정을 해치고 있는 것이면 불의입니다. 법정에서 그와 같이 정의와 불의를 판정하고 그에 따른 사법적인 처리가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사회의 구성원들이 편안하게 잠을 자고 아침에 깨어나면 사회생활을 안정적으로 영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둘째, 그렇지만 인간의 정의는 창조주의 입장에서 보면 치명적인 약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정의의 개념이 지극히 집단 이기적인 판정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간략하게 살펴봅니다; “이 세상은 기본적으로 제로섬게임을 하고 있습니다. 일방이 많이 가지게 되면 타방은 적게 가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편이 많이 가지자면 상대편은 적게 가져야만 합니다. 이 세상의 재화가 한정이 되어 있기에 그것을 불가피한 현상입니다. 따라서 하나의 사회가 안정을 유지하고 경제적으로 유익을 얻자면 다른 사회에 대해서는 불이익을 주는 것을 자신들의 정의라고 선포할 수 밖에 없다고 하겠습니다”. 그와 같은 이유에 기인하여 두나라가 국가이익을 두고서 전쟁할 때에 서로 자신들의 전쟁이 정의라고 부르짖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 집단 이기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는 인간사회의 정의의 개념으로는 결코 실천할 수 없는 것이 하늘의 법정에서 선포가 되고 있는 창조주의 공의(righteousness)와 자기 희생적인 아가페 사랑의 개념입니다. 그 이유는 창조주 하나님은 피조물의 살기다툼의 속성을 뛰어넘어 모든 피조물을 함께 사랑하고 동시에 그 생명을 전부 살리고자 하시는 공의와 사랑의 소유자이시기 때문입니다(3:4, 5:44-48). 그와 같은 넓은 공의와 사랑을 하나님께서 실천할 수 있는 근거는 창조주로서 당연히 보유하고 있는 그 전능하심 곧 하나님의 창조적인 능력입니다. 그 능력은 태초의 창조에 그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장차 죄악과 사망에 물든 이 세상을 전부 심판하고 새로운 하늘과 땅을 창조하며 만민을 구원하여 영생으로 인도하는 새 예루살렘을 이 세상에 임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인 것입니다(1:1, 6:5-9, 11:1-9, 65:17-18, 21:1-2);

넷째, 조금 쉽게 설명을 하겠습니다. 사람들이 서로 정의를 부르짖으며 상대방의 것을 빼앗고자 하는 이유가 바로 이 세상의 재화가  한정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창조주는 유일하게 그 재화를 크게 만드는 능력의 소유자입니다. 그리고 창조주는 인간의 이기적인 속성 때문에 망가지고 있는 자연을 회복하는 능력으로 역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기적인 인간들이 서로 죽이고 나만 살겠다고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전개하고 있지만 아직도 이 세상은 완전히 망가지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질서회복의 능력으로 여전히 유지가 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5:44-49, 1:20).

다섯째,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신들의 정의를 부르짖고 있는 선민의 시대가 지나고 나면 이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이 그리스도로 성육신하여 공생애를 살아가면서 창조주의 공의와 사랑이 무엇인지를 자신의 생애와 교훈으로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알기 쉽게 창조주의 능력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십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3가지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과 칠병이어의 기적’, ‘자발적인 십자가 대속의 희생’, 그리고 창조주의 능력으로 무덤속에서 3일만에 영생의 몸으로 부활하여 40일 후에 승천하는 것입니다. 간략하게 설명을 해봅니다;

(1)  오병이어의 기적과 칠병이어의 기적은 이세상의 재화가 아니라 하늘의 곳간을 열어서 이 땅의 백성들을 먹이신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그것은 제로섬(zero-sum)게임을 넘어선 플러스섬(plus-sum)게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파이를 크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그것이 고유한 창조주의 능력입니다.

(2)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아버지 하나님의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뜻을 실현하기 위하여 창조주의 아가페 사랑을 실천하지 못한 인간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신을 십자가 제물로 희생하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이 세상 피조물이 자신을 희생해보아야 그와 같은 창조주의 공의와 사랑을 실천할 수가 없습니다.

(3)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유월절 어린양은 스스로 희생하여 제물이 되심으로 말미암아 그 공로로 3일만에 무덤에서 영생의 몸으로 부활하는 새로운 복음의 시대를 이 세상에 가지고 오게 됩니다. 그것은 이 세상이 잘못된 것을 창조주가 스스로 책임을 지셨기에 그 다음에 새로운 세상이 창조가 될 수 있다는 하나의 진리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1:15, 27-30, 36). 그 사실을 하나님의 복음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자들에게는 그때부터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갈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지고 있습니다(1:12-13, 1:8). 그들은 남은 인생을 자신이 주인이 아니라 무덤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그 종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 결과 성령의 세례로 인하여 영적으로 창조주를 모시고 남은 인생을 동행하게 됩니다(14:16-20). 그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고 실천하는 성도들의 영적인 거듭난 삶입니다(3:5). 그로 인하여 성도들이 죽은 다음에 그리스도가 이미 얻은 영생의 부활을 얻게 되며 하나님의 법정에서 공의를 실천한 자로 인정이 되어 그리스도와 함께 상급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22:28-30);

 

여섯째, 예수님은 복음사역을 통하여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설명하시면서 모든 생명을 돌보고 살리시는 창조주의 사랑과 공의에 대하여 누누이 제자들에게 가르쳐주고 계십니다(5:43-48, 3:4).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사건이 발생하기 전에는 제자들이 그 깊은 의미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2:22). 평생을 모세의 율법에 따라 예루살렘성전에서 가축을 제물로 삼아 속죄의 제사를 드리며 그것으로 죄사함을 받은 의인인 선민으로 살아온 유대인들이기에 그 차원을 넘어서고 있는 스승 예수님의 말씀이 이상하기만 합니다(16:29-34). 선민들이 이 세상의 유일한 의인이며 그들의 법정에서 선포가 되는 것이 정의이며 하나님의 공의라고 굳게 믿고 있는 유대인들이기에 그들의 유대교가 다른 민족들에 대해서는 엄청난 죄악이 된다고 하는 사실을 결코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그 결과 만민을 사랑하고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해야 한다고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한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교의 최고기관인 산헤드린 대공회에서 정죄를 받고 십자가에 처형이 되고 맙니다.

일곱째, 그러나 예수님이 무덤에서 3일만에 아버지 하나님의 부활의 영에 의하여 영생의 몸으로 되살아나자 인류의 역사는 그것을 분깃점으로 하여 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8:11-18). 이제는 집단 이기적인 선민의 정의가 설자리를 잃게 됩니다(8:12). 예수 그리스도가 실천한 자기 희생적인 복음의 삶을 살아가지 아니하게 되면 영벌(永罰, eternal punishment)에 들어가는 미래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5:29, 25:40-46, 16:19-23). 그와 같은 시각에서 본문의 구절풀이를 통하여 여호와의 종이었지만 다윗대왕이 선민의 정의만을 실천하는데 불과했다는 사실을 알아보고 그와 달리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처음으로 창조주의 공의와 사랑을 실천했다는 사실을 알아보고자 합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본문말씀을 한 구절 씩 풀이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얻은 교훈과 메시지를 아울러 다음과 같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14.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이스라엘 집유다 집에 대하여 일러 준 선한 말을 성취할 날이 이르리라. 15. 그날 그때에 내가 다윗에게서 한 공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정의와 공의를 실행할 것이라”(33:14-15); 다음과 같이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14.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이스라엘 집유다 집에 대하여 일러 준 선한 말을 성취할 날이 이르리라”(33:14); 다음과 같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구절입니다;

1)    첫째, 북조 이스라엘왕국과 남조 유다 왕국으로 나누어져서 살아가고 있는 시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여호와께서는 다윗과 솔로몬의 이스라엘제국이 둘로 쪼개어졌지만 그들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여전히 동일한 기대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것은 여호와의 선하신 뜻을 성취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선민의 의무를 말하고 있습니다.

2)    둘째, 여호와께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들을 시내 산 앞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면서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고 기대를 하십니다(19:4-6). 그 뜻은 그 옛날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여호와께서 언약을 맺으신 것처럼(12:2-3) 이스라엘 자손들 역시 이방인들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전파하고 하나님의 축복과 구원의 복을 전파하는 거룩한 백성 곧 언약의 백성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3)    셋째, 여호와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신정국가 이스라엘에게 율법에 따른 제례의식을 주십니다. 여호와께 속죄의 제사를 제사장들이 드림으로써 백성들에게 속죄의 은혜가 임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제는 선민들이 이방인들 가운데 여호와께 속죄를 하고자 하는 자들을 위하여 제사를 드려주는 제사장나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여호와 앞에서 선민의 거룩한 의무입니다. 

4)    그러한 여호와의 기대는 선민들에 의하여 철저하게 배신을 당하고 맙니다. 그들은 이방인들을 미워하고 있으며 이웃을 정복하여 속국의 백성이나 노예로 삼고자 합니다(5:43). 그러므로 만민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여호와의 선하신 뜻은 설 곳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만민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여호와의 선하신 뜻은 언제 누구에 의하여 성취가 되는 것일까요? 한마디로, ‘새 언약에 의한 복음의 시대를 염두에 두고 있는 구절입니다(31:31-34). 선민의 나라가 철저히 망하고 먼 훗날 하나님의 아들이 대속의 그리스도로 이 세상에 오셔야만 여호와의 선하신 뜻이 성취가 되기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2)  15. 그날 그때에 내가 다윗에게서 한 공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정의와 공의를 실행할 것이라”(33:15); 하나님의 아들이 대속의 그리스도로 이 세상에 나타나실 때에 어디에서 누구의 후손으로 오시게 되는지를 예언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이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 북조 이스라엘 왕국에 참여한 이스라엘 10지파의 후손 가운데 그리스도가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남조 다윗왕조의 유다 왕국에 참여하고 있는 2지파와 레위인 가운데서 하나님의 아들이 그리스도로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이라는 이름이 여기서 등장을 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2)    둘째,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는 그 아버지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1:35). 그리고 어머니는 아론의 후손인 마리아입니다(1:5, 36). 예수님은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시고 그 의붓아버지 목수 요셉에 의하여 다윗의 가문에 장자로 등재가 되고 있습니다. 참고로, 유다 왕국의 구성원은 유다 지파, 베냐민 지파, 그리고 레위인들입니다.

3)    셋째, “15. 그날 그때에 내가 다윗에게서 한 공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33:15a)라는 문구는 다윗왕이 미처 실천하지 못한 하나님의 공의를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성취하게 된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그 사실이 중요하므로 선지자 이사야 역시 그의 선지서에 비슷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11:1-2).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피조물을 하나같이 돌보고 그 생명을 전부 살리고자 하십니다. 그것이 여호와의 공의의 정신입니다. 그런데 다윗왕은 그러하지를 못합니다. 이스라엘 12지파의 영광을 위하여 주변의 이방인들을 칼로써 무찌르고 그들을 복속하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그것은 선민들의 현세적인 정의의 실현일 수는 있을지 몰라도 여호와의 만민사랑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4)    넷째, “그가 이 땅에 정의와 공의를 실행할 것이라”(33:15b)는 말은 선민사회에 있어서는 정의를 구현하고 이웃 이방인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선민들이 여호와의 심판으로 멸망을 당하게 되는 이유는 그들 선민사회에서도 정의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현세적인 욕심과 이기심이 극대화됨으로써 사회적인 약자와 무죄한 자들의 피가 그 사회에 흘러 넘치게 되고 맙니다(왕하21:16). 대속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시면, 그러한 약육강식의 육신적인 사회를 청산하고 하나님의 영을 성도들에게 부어주어 하나님 자녀로서의 영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8:1-4).

둘째로, “16. 그날에 유다가 구원을 받겠고, 예루살렘이 안전히 살 것이며, 이 성은 여호와는 우리의 의라는 이름을 얻으리라”(33:16);

(1)  여기서 말하고 있는 그날에 발생하게 되는 일은 선지자 예레미야가 경험하고 있는 역사적인 사실과는 정반대입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유다 왕 시드기야 10년부터 예루살렘 왕궁에 있는 시위대의 뜰 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하고 있습니다(32:1-2). 그는 얼마 지나지 아니하면 예루살렘성을 포위하여 공격하고 있는 신바벨론제국의 갈대아 군대에 의하여 성이 함락이 되고 마지막 선민의 나라 유다 왕국이 멸망을 당할 것임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예언의 말씀이 그것이기 때문입니다(32:3-5).

(2)  그런데 지금 그에게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은 다음과 같이 그와 정반대입니다; 

1)    첫째,  유다가 멸망이 아니라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2)    둘째, 예루살렘이 적에게 함락이 되지 아니하고 그 주민들이 참으로 안전하게 살게 되는 그러한 도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3)    셋째, 예루살렘성의 이름이 창조주 여호와의 공의를 드러내는 성이라고 하는 칭송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3)  어떻게 그렇게 꿈과 같은 미래가 이 세상에 임하게 되는 것일까요? ‘그날을 이 세상에 이루게 하는 동인(動因)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반드시 그 답을 찾아야만 합니다. 그 답은 인간의 지혜와 능력으로 그러한 놀라운 시대를 이 세상에 임하게 할 수가 결코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러한 여호와의 뜻을 실천하는데 있어서 철저하게 실패를 하고 그 나라가 전부 멸망하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놀라운 시대는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대속의 그리스도로 오시고 하나님의 영이 성도들에게 임재하여 내주 역사하심으로 비로소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17.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이스라엘 집의 왕위에 앉을 사람이 다윗에게 영원히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며, 18. 내 앞에서 번제를 드리며 소제를 사르며, 다른 제사를 항상 드릴 레위사람 제사장들도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33:17-18);

(1)  선민의 나라와 다윗의 왕조가 자신들에게 맡겨진 여호와의 사명을 감당하는데 실패하고 있습니다. 그 모습이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 주전 930년경 다윗왕조를 버리고 독립한 이스라엘 10지파의 북조 이스라엘 왕국은 정치적인 목적으로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설치하고 그것을 여호와라고 섬기기를 시작합니다(왕상12:16-20, 26-33). 그것은 절기 때에 남조 유다 왕국의 수도인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떠나는 이스라엘 10지파의 행렬을 막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이지만 명백하게 여호와의 십계명을 어기고 우상을 만들어 섬긴 것입니다;

2)    북조 이스라엘왕국에 살고 있는 레위인들은 금송아지를 섬기는 제사장의 직무를 맡지 아니하고자 탈북을 하고 맙니다. 그들은 그 옛날 시내 산 앞에서 대제사장 아론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출애굽의 신 여호와라고 백성들에게 소개하면서 섬기라고 했다가 혼이 난 적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32:1-10, 20-30).

3)    그러므로 북조 이스라엘왕국에서는 레위인이 아닌 자를 제사장으로 세우고 금송아지 우상을 섬기는 생활을 200년이나 지속합니다(왕상12:30, 왕하17:22). 그 결과 여호와의 진노와 재앙으로 주전 722년에 북조 이스라엘왕국이 앗수르제국에 의하여 망하고 이스라엘 10지파가 앗수르 변경으로 끌려가서 그 선민의 족보가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왕하17:1-6, 21-23).

4)    둘째, 여호와께서는 젊은 다윗의 중심에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음을 알고서 그를 새로운 이스라엘왕국의 왕으로 삼고자 하십니다(삼상16:7, 12-13, 17:45-50). 그러나 이스라엘의 초대왕인 사울이 청년장군 다윗을 시기합니다(삼상18:8-11). 그때문에 다윗은 도망자신세가 되어 10년 세월을 사울 왕에게 쫓기게 됩니다(삼상19:18-20, 24:1-2, 26:1-2). 그동안에 여호와께서는 다윗을 두차례나 시험하십니다. 은밀하게 사울 왕의 목을 취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입니다.

5)    그러나 청년장군 다윗은 하나님이 기름을 부은 자의 목을 자신이 여호와의 허락이 없이 함부로 취할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삼상24:6-7, 26:9-12). 그것은 간단하게 이스라엘왕국의 왕이 되고 도망자신세를 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지만 그것과 여호와의 말씀을 경외하는 자신의 마음을 바꿀 수가 없다고 하는 위대한 선언입니다;

그 모습을 보시고 여호와께서는 다윗에게 조그만 이스라엘왕국이 아니라 중근동의 패권국인 이스라엘제국을 형성하도록 도와 주십니다(삼하8:1-14).

6)    그러나 위대한 대왕 다윗도 여호와의 십계명을 어기는 중한 죄인이 되고 맙니다. ‘왕자무치’(王者無恥, 왕은 죄를 범하고 부끄러운 일을 행한다고 하더라도 아무도 그 잘못을 물을 수가 없다는 것)의 사상에 젖어 그만 우리야의 아내를 취하고 장군 우리야를 흉계로 살해한 것입니다(삼하11:2-5, 14-17). 여호와께서는 나단 선지자를 보내어 다윗의 잘못을 질책하는 한편 남은 인생 가운데 그 처벌로 칼날 위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십니다(삼하12:1-15).

7)    다윗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철저하게 회개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남은 인생을 죄인의 심정으로 여호와 앞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다윗대왕의 위대한 신앙은 잘못을 전혀 범하지 아니한 것이 아니라 그 잘못에 대하여 징벌하시는 여호와의 조치에 철저하게 복종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다윗에게 여호와께서는 훗날 대속의 그리스도를 보내어 줄 것이라고 예언하십니다(110:1-7).

(2)  북조 이스라엘왕국에 참여한 이스라엘 10지파가 금송아지 우상을 섬기다가 멸망을 당했으며 위대한 신앙인 다윗왕이 십계명을 어기고 여호와의 징계를 받아 죄인으로 평생 살아가게 됩니다. 더구나 다윗왕조의 유다 왕국이 여호와신앙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며 세상적인 탐욕과 육신적인 정욕을 쫓아 죄악을 범하며 이방인처럼 살아가고 맙니다. 그 모습을 보시고 진노하신 여호와께서는 다윗왕조의 유다 왕국마저 이방 강대국에게 멸망을 당하도록 재앙을 내리고 마십니다(7:12-16, 30-34, 25:11-12).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는 영원한 여호와의 종인 선민도 없으며 다윗왕도 끝까지 여호와의 마음에 든 것이 아닙니다. 그의 다윗왕조 역시 우상을 섬기고 이방인처럼 살아가다가 멸망을 당하고 만 것입니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에서는 17.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이스라엘 집의 왕위에 앉을 사람이 다윗에게 영원히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며, 18. 내 앞에서 번제를 드리며 소제를 사르며, 다른 제사를 항상 드릴 레위사람 제사장들도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33:17-18)는 여호와의 예언의 말씀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의미가 무엇일까요?

1)    첫째, 본문의 예언은 역사적인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이나 다윗의 왕가를 염두에 두고서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제31장에 벌써 기록이 되어 있는 새 언약에 따른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시대를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둘째, ‘새 언약은 이 세상에 대속의 그리스도와 또다른 보혜사로 성령님께서 오심으로 말미암아 가동이 됩니다. 선민이나 이방인 가운데 누구나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를 바라보고서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진심으로 회개를 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를 성도로 삼아 온 세상에 하나님의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성령님을 임재시켜 주신다는 것입니다(24:44-49, 1:8).

3)    셋째,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무덤에서 부활하신 주님과 하나님의 영이 성도들의 심령속에서 내주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뜻이 이 세상에서 온전히 이루어지는 새로운 시대가 전개된다는 것입니다. 마침내 다윗왕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왕이 되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이 되는 것입니다;

4)    넷째, 선민들이 아니라 성도들이 새 예루살렘성에서 여호와 하나님과 어린양 그리스도를 영원히 찬양하는 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나라의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성도들이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영원한 제사장들입니다.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 풍성한 본문입니다. 31장에 벌써 기록이 되어 있는 새 언약의 취지를 대입하여 본문의 내용을 묵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러한 복음의 시대를 염두에 두지 아니하고 본문의 말씀을 직역하게 되면 모순 투성이의 글이 되고 말 것입니다.

요컨대, 신약의 복음사상을 생각하면서 히브리정경을 읽어 볼 때에 어째서 우리 인생의 구원을 위하여 절실하게 그리스도와 성령님의 은혜가 필요한지를 재삼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선민의 나라의 멸망 가운데 벌써 만민구원이라고 하는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감사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