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22년 손진길 목사 설교문

다윗왕조 유대왕국 멸망 1년전에 발생한 초유의 사건(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11. 15. 07:20

제목; “다윗왕조 유대왕국 멸망 1년전에 발생한 초유의 사건”(34:8-17, 참조; 21:1-6, 25:10, 39-46)

설교일; 주후 20221120일 주일

작성자; 손진길 목사(1115일 화요일 작성)

 

선지자 예레미야는 흔히 눈물의 선지자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생전에 조국인 다윗왕조 유대왕국이 시드기야 왕 11년 곧 주전 586년에 신바벨론제국의 황제 느부갓네살이 지휘하는 갈대아군대의 침입으로 멸망하는 광경을 예루살렘에서 목도한 선지자이기 때문입니다.

주전 627년 곧 성군 요시야 통치 13년에 예레미야는 약관의 나이에 선지자로 세움을 받아 41년 동안 여호와의 예언의 말씀을 동족들에게 줄기차게 외쳤는데 그 이유는 임박한 조국의 멸망만은 진정으로 예방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결국 허사가 되고 만 것입니다.

따라서 선지자 예레미야는 자신이 동족들에게 외친 여호와의 말씀을 정리하여 그의 선지서에 기록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물론 그 가운데 일부는 제자인 서기관 바룩에게 예레미야가 구술하여 그것을 적도록 한 것입니다(36:32). 그가 선지서를 남긴 이유는 후세와 만민의 구원을 위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선지자 예레미야가 눈물을 흘리며 이 세상에 남기고 있는 그의 선지서는 두가지 내용을 적고 있는 것입니다;

첫째, 지상 마지막 선민의 나라인 조국 유대왕국이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적나라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둘째, 선민의 나라가 멸망을 당하고 선민이 사라진 후세에 어떠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만민에게 임하게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두가지 사항을 먼저 자세하게 말씀드리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 다윗왕조 유대왕국이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기 쉽게 한문장으로 요약해봅니다; “마지막 선민인 다윗왕조 유대왕국의 국왕과 신민들이 하나같이 여호와신앙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며 세상적인 탐욕과 육신적인 정욕을 쫓아 마치 이방인처럼 제마음대로 살아갔기 때문에 선민의 나라가 멸망하고 만 것입니다”;

(2)  둘째, 선민이 이방인처럼 살아감으로써 이제는 선민과 이방인을 구별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방인에게 임하는 약육강식의 역사섭리가 그대로 다윗왕조 유대왕국에 찾아오고 마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더이상 보호하지 아니하시므로 신바벨론제국 갈대아군대에 의하여 주전 586년에 예루살렘이 점령되고 지상에서  유대왕국이 완전히 사라지고 맙니다.

(3)  셋째, 선민의 나라가 완전히 이 땅에서 사라지고 나면 이제는 이방인만이 존재하게 됩니다. 그들 만민에 대한 여호와의 구원계획이 무엇일까요? 이스라엘 12지파를 선택하여 만민을 구원하는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삼고자 하신 여호와의 구원계획이 이제는 누구에 의하여 발동이 되는 것일까요? 그 점에 대하여 선지자 예레미야는 그의 선지서 제31장 제31-34절에서 메시아의 오심과 하나님의 영의 마음속 임재를 암시하는 글을 새 언약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4)  넷째, 여호와 하나님이 원하시는 정의와 공의를 실행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시는 메시아의 존재에 대하여 선지자 예레미야는 새 언약가운데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15. 그날 그때에(선민이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면) (여호와 하나님)가 다윗에게서(다윗의 가문에서) 공의로운 가지(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할 수 있는 인물을)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진실로 원하시는) 정의공의를 실행할 것이라”(31:15). 오늘의 본문말씀에 대한 깊은 이해에 도움이 되도록 먼저 위의 말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풀이를 해보고자 합니다;

1)   애굽의 제국에서 중노동에 시달리고 있는 노예와 같은 이스라엘 자손을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보내어 해방시키고 광야에서 여호와의 백성으로 훈련시키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 옛날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처럼 살아가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신앙을 파수하고 있는 아브라함은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하여 이방인들이 살고 있는 가나안 땅과 그 주변으로 들어가서 창조주 여호와를 믿는 삶이 무엇인지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명령으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자에게는 중보의 기도와 화해의 제사를 대신 드리고 있습니다(20:7, 17, 21:22-33). 그 점을 출애굽기 제19시내산 언약으로 모세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6. 너희가 내게(창조주 여호와에게) 대하여 (아브라함처럼, 12:1-5) 제사장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모세)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19:6);

2)   그러나 시내산 언약의 핵심내용을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전혀 실천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주변의 이방민족을 원수로 알고 미워만 할 뿐 결코 그들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전파하고 구원을 얻기 위하여 회개하라고 외치지를 아니하고 있습니다(5:43). 선민들이 모든 민족을 살리고자 하시는 창조주 여호와의 아가페 사랑공의의 정신을 외면한 것입니다. 그것을 보시고 여호와께서는 갈릴리 변방의 선지자 요나를 앗수르의 수도가 되고 있는 니느웨로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나마저 선민구원사상에 젖어서 이방인의 구원을 엄청 싫어하고 있습니다(1:3, 4:1-5). 예수님께서 유대인 사회에 그리스도로 오셨을 때에도 선민구원사상이 유대교리의 본질이 되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동족들에게 요나의 표적밖에는 전할 말씀이 없다고 강조하십니다(12:39, 16:4);

3)   그렇다면, 선민들이 자신들의 동족사회에 있어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정의를 제대로 실천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오늘의 본문말씀에서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히브리정경의 첫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모세오경의 기록에 따르면 출애굽기 제21장의 내용과 레위기 제25장의 내용 가운데 엄청난 모순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선민들이 동족 히브리인을 종으로 삼는 경우에 언제 해방을 시켜주면 되는가?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제21장에서는 안식년 곧 7년만에 해방을 시켜주라고 되어 있는데 그것이 레위기 제25장에서는 희년 곧 50년만에 해방을 시켜주면 되는 것으로 이중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느 율법규정이 옳은 것일까요? 진실한 여호와의 뜻은 전자일까요? 아니면 후자일까요? ;

4)   조국이 완전히 멸망을 당하기 1년전에 선지자 예레미야는 시드기야 왕이 역사상 처음으로 히브리종에 대한 전면 해방을 선포하고 있다고 본문에서 기록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압제를 받고 있는 히브리종들이 예루살렘성을 공격하고 있는 갈대아군대의 편에 서서 반란을 도모할까 우려하여 부득이 취하고 있는 긴급조치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적의 공격이 약화되자 얼른 예루살렘의 부자들이 자신들의 종들을 다시 노예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서조차 여호와의 정의는 진정으로 실현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에 대한 마지막 구원의 기회마저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선지자 예레미야가 본문에서 눈물로 기록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8. 시드기야 왕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백성과 한가지로 하나님 앞에서 계약을 맺고 자유를 선포한 후에, 여호와께로부터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9. 그 계약은 사람마다 각기 히브리 남녀 노비를 놓아 자유롭게 하고 그의 동족 유다인을 종으로 삼지 못하게 한 것이라. 10. 이 계약에 가담한 고관들과 모든 백성이 각기 노비를 자유롭게 하고 다시는 종을 삼지 말라 함을 듣고 순복(順服, 순종하고 복종함)하여 놓았더니, 11. 후에 그들의 뜻이 변하여, 자유를 주었던 노비를 끌어다가 복종시켜 다시 노비로 삼았더라”(34:8-11); 다음과 같이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8. 시드기야 왕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백성과 한가지로 하나님 앞에서 계약을 맺고 자유를 선포한 후에”(34:8a);

1)    유다 왕 시드기야 9년인 주전 588년경 신바벨론제국의 황제 느부갓네살이 대군을 이끌고 다윗왕조 유다 왕국을 침략합니다(왕하25:1). 왕도인 예루살렘성을 함락하기 위하여 포위공격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때 반() 바벨론 동맹을 이끌고 있는 애굽의 바로가 연합군을 이끌고 가나안 해변길을 따라 북상하면서 남서쪽으로부터 느부갓네살 황제의 군대를 치고자 합니다(37:5). 배후에서 공격을 받게 된 느부갓네살 황제는 작전상 퇴각을 하고 맙니다(37:11).

2)    신바벨론제국의 군대가 잠시 후퇴를 했다고는 하지만 언제 다시 전열을 가다듬어 재침을 할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애굽의 구원병은 적이 물러가는 것을 보고서 철수를 하고 맙니다. 그때 예루살렘 성안에 있는 유다 왕 시드기야와 다윗왕조의 신하들 그리고 성내의 주민인 부자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그들은 애굽을 움직여서 신바벨론의 군대를 물러가게 해주셨으니 여호와께서는 다음에도 그렇게 해달라고 간구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맨입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3)    그래서 유다 왕 시드기야와 대신들이 예루살렘성의 부자들과 함께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한가지 서원을 합니다. 그 내용이 다음과 같습니다; “예루살렘성에서 모든 백성들이 자유를 구가할 수 있도록 선민 유대인들이 솔선수범하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호와의 율법에 따라 히브리종을 해방시키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리하면 여호와께서는 자유를 누리는 예루살렘성을 이방인에 의하여 점령을 당하지 아니하도록 지켜 주신다고 하는 것입니다”(34:8a의역). 그것은 예루살렘성을 일종의 자유해방구로 선포하면서 여호와 하나님께 이방인의 침입을 막아 달라고 간구하고 있는 서약인 것입니다.

(2)  여호와께로부터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9. 그 계약은 사람마다 각기 히브리 남녀 노비를 놓아 자유롭게 하고 그의 동족 유다인을 종으로 삼지 못하게 한 것이라”(34:8b-9);

1)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유다 왕 시드기야와 다윗왕조의 신하들 그리고 유다 왕국의 지도자들이 살고 있는 도성 예루살렘에서 그와 같은 서원이 있게 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 이유는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이 출애굽기 제21장 첫머리에 기록되어 있는 히브리종의 안식년 해방에 관한 율법을 그동안 무시했기 때문입니다(21:1-4).

2)    그 대신에 그들은 레위기 제25장에 희년이 되면 히브리종을 해방시켜준다는 조항을 만들어 그것을 지키고 있습니다(25:10, 39-42). 그것은 실효성이 없는 조항입니다. 왜냐하면 평균 나이 40세에 인생을 마감하는 고대사회에서 종살이한지 50년이 되면 자유민으로 돌려보내겠다고 제도화하고 있으니 그것은 죽을 때까지 동족을 종으로 부려먹겠다고 하는 심보인 것입니다.

3)    그러한 이스라엘 자손들의 악함과 율법에 대한 왜곡 및 변질에 대하여 잘 알고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이제 유다 왕국이 망하기 일년 전에 그나마 약간 정신을 차리고 히브리종에 한하여 자유를 주겠다고 맹세하고 있으니 그것을 한번 지켜보고자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그 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하기에 여호와께서는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본문의 말씀을 계속하십니다(34:8b-9).  

(3)  10. 이 계약에 가담한 고관들과 모든 백성이 각기 노비를 자유롭게 하고 다시는 종을 삼지 말라 함을 듣고 순복(順服, 순종하고 복종함)하여 놓았더니”(34:10);

1)    권력자들과 부자들은 현세적인 자신의 이익에 매우 밝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무지한 자와 사회적인 약자를 억누르고 착취하여 자신들의 부와 권력을 늘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평상시 같으면 자신들이 편리하게 부리고 있는 히브리종에게 결코 자유를 주고 싶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비상시국입니다. 신바벨론제국의 군대가 예루살렘성을 에워싸고서 공격을 계속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루살렘 성내에서 불순한 무리들이 조직적으로 적과 내통을 한다면 그야말로 유대왕국이 종말을 맞이하기 십상입니다;

2)    성내에서 가장 위험한 세력이 누구인지를 파악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같은 동족이면서 종살이를 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전쟁의 승패에 상관이 없습니다. 전쟁에 이겨도 여전히 동족인 유대인들의 종입니다. 전쟁에 진다고 하면 바벨론 사람들을 주인으로 섬기면 됩니다. 그런데 약간 모험적이기는 하지만, 적진에 예루살렘성의 내부정보를 제공하게 되면 종의 신세를 면하고 도리어 부귀와 영화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반역의 기회를 엿보고 있습니다.

3)    그와 같은 위기를 유다 왕 시드기야와 신하들 그리고 부자들이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차제에 히브리종들에게 자유를 주고 그들을 유대인 병사로 동원하고자 합니다. 그것이 예루살렘의 안보를 튼튼히 하는 아주 좋은 정책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10. 이 계약에 가담한 고관들과 모든 백성이 각기 노비를 자유롭게 하고 다시는 종을 삼지 말라 함을 듣고 순복(順服, 순종하고 복종함)하여 놓았더니”(34:10)라는 구절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성을 안전하게 방어하기 위해서는 그 정책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4)  11. 후에 그들의 뜻이 변하여, 자유를 주었던 노비를 끌어다가 복종시켜 다시 노비로 삼았더라”(34:11);

1)    유다 왕 시드기야 10년에 신바벨론제국의 황제 느부갓네살이 대군을 이끌고 재침하여 예루살렘성을 계속하여 포위공격하고 있지만 도무지 함락을 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남서쪽 애굽으로 통하는 길목이 불안합니다. 요새지의 철옹성 라기스아세가에서 유다의 병사들이 죽기 살기로 항전을 계속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 애굽의 바로가 구원병을 파견해올지 모릅니다.

2)    생각보다 라기스와 아세가 성에서 유다의 병사들이 잘 버티어 주고 있기 때문에 예루살렘성을 방어하고 있는 시드기야 왕과 신하들 그리고 부자들이 한숨을 돌리고 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본전생각이 나고 있습니다. 히브리인 종이라고 하면 언어가 같으므로 참으로 부리기 좋은 노예입니다. 그 몸값만 하더라도 장정이면 은 30세겔이고 어려도 은 20세겔입니다(37:28, 21:32, 26:15, 27:9).

3)    이제 위기국면에서 좀 벗어나고 있는 것 같으므로 그들을 다시 잡아 들여서 종으로 삼고 있습니다(34:11). 그 모습을 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조치하실까요? 끝까지 이행하지 아니하는 서원에 대해서는 그 효력을 인정하지 아니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애굽의 구원병이 도착하지 못하고(37:7) 아세가라기스 성 그리고 예루살렘성이 모두 느부갓네살 황제의 군대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도록 역사를 섭리하고 마시는 것입니다(37:8). 그와 같은 의미가 11. 후에 그들의 뜻이 변하여, 자유를 주었던 노비를 끌어다가 복종시켜 다시 노비로 삼았더라”(34:11)라는 구절에 진하게 스며들어 있다고 하겠습니다;

둘째로,12.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13.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너희 선조를 애굽 땅 종의 집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 그들과 언약을 맺으며 이르기를, 14. 너희 형제 히브리 사람이 네게 팔려 왔거든 너희는 7년 되는 해에 그를 놓아줄 것이니라. 그가 6년 동안 너를 섬겼은즉, 그를 놓아 자유롭게 할지니라 하였으나, 너희 선조가 내게 순종하지 아니하며, (선지자의 대언에)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였느니라. 15. 그러나 너희는 이제 돌이, 내 눈 앞에 바른 일을 행하여, 각기 이웃에게 자유를 선포하되,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집에서, 내 앞에서 계약을 맺었거늘”(34:12-15); 다음과 같이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12.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13.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34:12-13a); 여기서 여호와의 말씀여호와가 따로 역사하시는 광경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이 풀이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    첫째,여호와께로부터 여호와의 말씀이 나와서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1:1)로고스 그리스도론과 더불어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을 주관하시며 선지자에게 계시하시는 성자 하나님의 존재성”(11:27)을 진작에 암시해주고 있는 표현법입니다. 그와 같은 표현기법은 창세기 제15장에서 벌써 다음과 같이 선을 보이고 있습니다; “1. 이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15:1).

2)    둘째,여호와의 말씀이신 성자 하나님 또는 그리스도께서 선지자에게 임재하여 계시하고 있는 그 말씀은 31체 하나님께서 벌써 합의하신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성부 하나님의 말씀이나 성자 그리스도의 말씀이나 성령 하나님의 말씀이나 전혀 차이가 없습니다. 그와 같은 말씀의 진리성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애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밝히고 계십니다; 25. 그들이 이르되, 네가 누구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 26. 내가 너희에게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 말하노라 하시되, 27. 그들은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더라”(8:25-27), “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14:26).

(2)  내가 너희 선조를 애굽 땅 종의 집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 그들과 언약을 맺으며 이르기를, 14. 너희 형제 히브리 사람이 네게 팔려 왔거든 너희는 7년 되는 해에 그를 놓아줄 것이니라. 그가 6년 동안 너를 섬겼은즉, 그를 놓아 자유롭게 할지니라 하였으나, 너희 선조가 내게 순종하지 아니하며, (선지자의 대언에)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였느니라”(34:13b-14);

1)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들은 애초에 종이 없습니다. 그들 자신들이 애굽에서 대대로 노예로 살아왔는데 히브리인들에게 무슨 노예가 따로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광야생활을 지낸 후에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면 히브리 종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 요인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남의 물건을 훔치다가 그것을 율법에 따라 갑절로 배상하지 못하게 되면 그 주인의 종이 됩니다(22:3-4). 둘째, 빚을 갚지 못하게 되면 종이 됩니다(21:30-31). 셋째, 먹고 살 방도가 없으면 그 몸을 부자에게 종으로 팔게 됩니다(47:19);

2)    그렇게 동족을 종으로 부리게 되는 경우에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 답게 히브리 종을 너무 심하게 부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제7년 안식년이 되면 해방을 시켜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출애굽기 제21장에 율법의 총칙으로 기록되고 있는 중요한 규정입니다(21:1-6). 그 의미는 출애굽의 구원을 베풀어 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그렇게 안식년 히브리 종의 해방으로 갚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서 정착생활을 하면서 삶의 풍요를 누리게 되자 이스라엘 자손들이 배은망덕하게 행동하기를 시작합니다.

3)    그들은 현세적인 이기주의에 물들어 약한 자를 힘으로 누르고 가난한 자를 종으로 부리려고 합니다. 그 결과 노예제도와 관련하여 두가지 악행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하나는, 히브리 종을 제7년 안식년에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제50년 희년에 해방시키는 것으로 율법규정을 추가하여 그것을 시행하고 맙니다(25:10, 39-41). 그것은 여호와의 뜻이 아닙니다. 따라서 예레미야 제34장에서는 히브리 종에 대한 희년 해방에 대하여 전혀 언급이 없습니다(34:9-16). 그것은 언급할 가치도 없다는 의미입니다.

4)    또 하나는, 히브리 종 뿐만 아니라 이방인 종까지 전부 해방을 시키고 자유를 주고자 하는 것이 여호와의 말씀의 본래 취지입니다(25:10, 42, 34:15). 왜냐하면,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만이 아니시고 온세상을 창조하셨으므로 모든 인류와 피조물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과 구원의 말씀을 선민들은 이방인들에게 전해주고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의 의무를 여호와 앞에서 다하여야 합니다(19:6). 그런데 그러한 노력이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역사적으로 전혀 없습니다(12:39).

5)    여호와께서는 선지자들을 보내어 선민들의 회개를 계속 종용하고 있습니다(34:14, 7:13, 25). 그러나 그들은 요지부동입니다(7:26). 그 때문에 그들은 선민의 신분과 기업을 상실하고 선민의 나라의 멸망과 함께 이방인이 되어 떠돌이생활을 역사적으로 경험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시드기야 왕 말기에 참으로 이상한 현상이 예루살렘성에서 발생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여호와의 말씀의 취지를 실천하고자 하는 획기적인 하나의 움직임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것은 아주 짧은 기간 일회성으로 그것도 아주 제한적인 것으로 그치고 맙니다. 그로 말미암아 일년 내에 예루살렘성이 적군에게 넘어가고 유다 왕국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 내용이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3)  15. 그러나 너희는 이제 돌이, 내 눈 앞에 바른 일을 행하여, 각기 이웃에게 자유를 선포하되”(34:15a);

1)    때는 시드기야 왕 10년입니다. 장소는 선지자 예레미야가 옥중생활을 하고 있는 예루살렘성입니다. 역사적으로 이듬해 주전 586년에 예루살렘성의 멸망이 도래하게 됩니다(왕하25:1-7). 당시 신바벨론제국의 느부갓네살 황제가 대군을 이끌고 재침하여 유다의 전역을 휩쓸고 있습니다. 느부갓네살 황제는 한해 전에 유다 왕국을 침공하고 예루살렘성을 포위하여 공격하다가 물러간 적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애굽의 바로가 동맹군을 이끌고 서남방향에서 갈대아 군대의 후방을 공격했기 때문입니다(37:5). 앞뒤로 적을 두고 있는 느부갓네살 황제는 작전상 후퇴를 하고 만 것입니다(37:11).

2)    그 다음해에 전열을 가다듬어 다시 쳐들어오면서 느부갓네살 황제는 아예 군사를 둘로 나누고 있습니다; ①하나는 요단 강을 건너 여리고 쪽으로 들어와서 가장 빠르게 예루살렘성을 포위하여 공격하고 있습니다. ②또 하나는, 해변도로를 타고서 남하하여 예루살렘 서남쪽의 요충지 라기스아세가를 공격하는 한편 애굽군이 진격하는 통로를 봉쇄한 것입니다. 신바벨론제국의 황제 느부갓네살 황제의 영리한 전략전술 때문에 예루살렘성에 갇혀서 저항을 계속하고 있는 유다 왕 시드기야와 주전파 신하들은 걱정이 태산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고자 합니다.

3)    무엇을 맹세하면서 여호와의 구원하심을 바라보아야 할까요? 시드기야 왕과 신하들이 그 정답을 찾아내고 있습니다; “15. 그러나 너희는 이제 돌이, 내 눈 앞에 바른 일을 행하여, 각기 이웃에게 자유를 선포하되”(34:15a). 이 대목은 두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 여호와의 말씀의 뜻에 맞는 바른 일이 무엇인가를 그들 유대인들이 벌써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34:15aa). 알면서도 그동안 실천하지 아니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실천하는 경우 자신들의 희생과 부담이 발생하게 되는데 그것을 싫어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이 아닙니다. 나라가 망하게 생겼으므로 작은 희생을 기꺼이 감수해야만 합니다.

4)    둘째,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은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며 귀하게 인간대접을 해주고 상대방에게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같은 창조주의 말씀의 뜻을 실천하지 아니한 이유는 그것이 전면적인 노예해방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와 권력을 가진 자들은 사람을 종으로 부리고 편하게 살고자 하지 결코 자신이 남을 섬기는 자로 살고 싶지가 않습니다. 그러므로 창조주의 명령이라고 하더라도 생리적으로 그대로 실천하기가 싫은 것입니다;

5)    그러나 이제는 어쩔 수가 없습니다. 나라가 망하고 민족이 적군에게 모조리 사로잡혀서 포로생활을 하게 되었으므로 신위적인 여호와의 도우심이 100여년 전 히스기야 왕 때처럼 절실하기 때문입니다(왕하19:34-35). 따라서 예루살렘과 유다 왕국에서 앞으로 모든 노예를 해방하고 모든 사람들이 인간대접을 받고 자유스럽게 살도록 하겠다는 선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34:15ab);

(4)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집에서, 내 앞에서 계약을 맺었거늘”(34:15b);

1)    여호와께서는 비록 전시(戰時)에 나타난 선민 유대인들의 회심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귀하게 생각하십니다. 특히 다윗왕조 유대왕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인간대접을 해주고 노예상태에서 해방하여 자유를 누리도록 해주겠다고 다짐하고 있으니 그것을 마다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것이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의 취지이기 때문입니다. 그 점을 예수 그리스도의 다음 말씀에서 그대로 엿볼 수가 있습니다; “31.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12:31).

2)    유다 왕 시드기야가 정치적인 지도자들과 영적인 지도자들을 모두 대동하고 예루살렘성전으로 들어와서 여호와 앞에서 서원을 하고 있습니다(34:15ba). 그것을 여호와께서는 새로운 계약인 새 언약으로 받아 들이십니다(34:15bb). 이제는 그 새로운 계약을 선민 유대인들이 끝까지 준수하는지를 지켜보고자 하십니다. 만약 그들이 서원한 대로 이행을 하게 되면 여호와께서도 기꺼이 마지막 선민의 나라를 구해주실 것입니다.

셋째로,16. 너희가 돌이켜 내 이름을 더럽히고, 각기 놓아 그들의 마음대로 자유롭게 하였던 노비를 끌어다, 다시 너희에게 복종시켜, 너희의 노비로 삼았도다. 17.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나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각기 형제이웃에게 자유를 선포한 것을 실행하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너희를 대적하여 칼과 전염병과 기근에게 자유를 주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너희를 세계 여러 나라 가운데에 흩어지게 할 것이며”(34:16-17); 다음과 같이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16. 너희가 돌이켜 내 이름을 더럽히고, 각기 놓아 그들의 마음대로 자유롭게 하였던 노비를 끌어다, 다시 너희에게 복종시켜, 너희의 노비로 삼았도다”(34:16);

1)    갑자기 라기스아세가 요새지에서 낭보가 예루살렘성으로 날아들고 있습니다. 느부갓네살 황제의 군대가 계속 두 요새를 공격하고 있지만 아직 유다의 병사들이 굳건하게 수비를 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34:7). 그러므로 애굽의 바로가 동맹군을 이끌고 해변길로 올라오게 되면 그 통로를 이용하여 예루살렘성을 구원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소식을 듣게 되자 유다 왕 시드기야와 신하들 그리고 예루살렘의 부자들은 생각이 달라지고 맙니다.

2)    이제 세상적으로 살 길이 열릴 수도 있으므로 자신들의 손해를 감수하면서 구태여 노예를 해방시켜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해방시켜준 종들을 다시 잡아 들입니다(34:16b). 그리고 권세와 힘으로 그들을 굴복시킵니다(34:16c). 그 전처럼 종 노릇을 하도록 기필코 만들고 맙니다(34:16d). 그들은 순식간에 여호와 앞에서 맹세한 서원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것은 계약서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여호와의 이름을 더럽히고 모독한 참람한 행동입니다(34:16a). 따라서 여호와께서 격노하십니다.

(2)  17.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나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각기 형제이웃에게 자유를 선포한 것을 실행하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너희를 대적하여 칼과 전염병과 기근에게 자유를 주리라”(34:17a);

1)    비록 전시상황이지만 유다 왕 시드기야와 귀족들 그리고 예루살렘성의 부자들이 여호와를 찾아가서 그 성전에서 맺은 새로운 계약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다음과 같은 두가지의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 여호와의 축복의 언약이 임할 수가 있습니다. 만약 선민들이 여호와 앞에서 맹세한 그대로 형제인 히브리 종이웃인 이방인 종에게 자유를 준다면 여호와께서는 예루살렘성과 유다의 성읍을 전부 신바벨론제국의 군대로부터 구원하여 주실 것입니다. 둘째, 반대의 경우에는 여호와의 저주의 언약이 임할 수가 있습니다;

2)    그런데 그 반대의 경우가 예루살렘성에서 곧이어 발생하고 있습니다; “17.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나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각기 형제이웃에게 자유를 선포한 것을 실행하지 아니하였은즉”(34:17aa). 그러므로 정확하게 여호와의 저주의 언약이 다음과 같이 임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대적하여 칼과 전염병과 기근에게 자유를 주리라”(34:17ab). 여기서 자유를 강조하고 있는 것은 축복의 언약도 저주의 언약도 모두 백성들의 자유로운 선택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30:19-20).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선민 유대인들의 마지막 선택에 따라 그들에게 전염병과 기근의 발생이라는 하늘의 재앙과 전쟁으로 망하는 인간적인 재해가 전부 임하도록 그것들을 자유롭게 풀어 놓으신다는 것입니다.

(3)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너희를 세계 여러 나라 가운데에 흩어지게 할 것이며”(34:17b);

1)    마지막 선민의 나라 유대왕국이 전시상황에서 여호와께 잠시 회개하고 돌아오는 모양을 취하다가 끝내 그 새로운 맹세를 지키지 아니하고 맙니다. 그 때문에 여호와의 진노와 재앙으로 신바벨론에 의하여 유다 왕국이 멸망을 당하고 대부분의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가서 포로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후의 역사는 어떻게 전개가 되는 것일까요? 여기서 여호와께서는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너희를 세계 여러 나라 가운데에 흩어지게 할 것이며”(34:17b)라고 예언하십니다. 그 대목은 다음 두가지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2)    하나는, 바벨론 포로생활 70년이 끝나더라도 유대인들의 자손들이 온세상에 흩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페르시아 고레스 황제의 칙령으로 자유를 얻게 된 유대인들 가운데 고향으로 돌아온 수는 1할 정도에 불과합니다(2:3-65). 그러므로 유대인들의 자손들이 십중팔구는 온세상에 흩어지는 것이 맞습니다.

3)    또 하나는, 선민 유대인들처럼 여호와 앞에서 서원한 맹세를 어기고 제멋대로 세상적인 이익을 쫓아 살아가게 되면 오늘날에도 그러한 민족은 나라가 망하고 온세상에 망국의 백성으로 떠돌게 된다는 것입니다.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섭리는 그 옛날이나 오늘이나 변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선민 또는 이방인이라고 하는 차별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예루살렘성이 느부갓네살 황제의 군대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게 되는 절대절명의 위기 가운데 유다 왕 시드기야가 신하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성전에 들어갑니다. 그곳에서 창조주 여호와의 말씀의 뜻에 따라 모든 노예를 해방시켜줄 것이니 부디 창조주의 능력으로 신바벨론제국의 군대를 물리쳐 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율법의 규정을 넘어서고 있는 새로운 맹세이며 서원입니다. 왜냐하면, 동족인 히브리 종 뿐만 아니라 이방인 종에 이르기까지 해방과 자유를 주겠다고 하는 위대한 선언이기 때문입니다. 그 의미는 예레미야 제31장에 기록이 되어 있는 새 언약의 취지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항상 문제는 서원과 맹세가 아니라 그것을 온전히 지키고 이행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결국 전세가 약간 호전이 되자 선민 유대인들은 그 맹세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있습니다. 그 결과 대노하신 여호와에 의하여 재앙과 전쟁으로 마지막 선민의 나라가 망하고 그 백성들은 바벨론 포로가 되어 끌려가고 맙니다. 그 다음에는 온세상을 떠도는 민족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여호와의 역사섭리가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저주의 언약이 아니라 축복의 언약이 임하도록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정확하게 알고서 실천하는 일에 정진해야만 합니다. 아무쪼록 그러한 은혜가 성도님들에게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