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22년 손진길 목사 설교문

살롬이 사라진 케파타의 시대(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11. 29. 08:33

제목; “살롬이 사라진 케파타의 시대”(7:23-27, 참고; 6:11-13, 15:6)

설교일; 주후 2022124일 주일

작성자; 손진길 목사(1129일 화요일 작성)

 

구약시대 대선지서를 남긴 선지자가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등 4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순서로 그들이 작성한 글들이 배열되고 있습니다. 어째서 그러한 순서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일반적으로 두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설명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차제에 다음과 같이 다소 깊이 있게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하나님말씀에 대한 그들 선지자의 예언의 분량의 크기가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사야가 66, 예레미야가 52, 에스겔이 48, 다니엘이 12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보는 경우에 두가지의 문제가 있습니다.

(1)  하나는, 예레미야애가의 배치 순서입니다. 애가는 단지 5장에 불과한 짧은 글인데 어째서 분량상 다니엘의 선지서 다음 맨 끝으로 가지 아니하고 대선지서 예레미야 뒤에 곧바로 배열이 되고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본래 애가(哀歌)라고 하는 것이 내용상 당대에 조국의 멸망을 자신의 눈으로 보게 된 선지자 예레미야의 지극한 슬픔을 적은 애도의 글이기에 대선지서 예레미야의 부속문서로 처리하여 그 다음에 곧바로 배치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만약 애가서를 합산한다고 하더라도 선지자 예레미야가 작성한 글이 총 57장에 머물고 있으므로 그것은 66장이나 되는 대선지서 이사야에는 그 분량이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2)  또 하나는, 그와 같은 설명이 지니고 있는 본질적인 오류에 관한 것입니다. 성경말씀을 손쉽게 찾아볼 수 있도록 장과 절로 구분한 것은 사실 주후 13세기 이후입니다;

 (, chapter)의 구분이 먼저인데 그것은 13세기초 영국의 성경선생 스티븐 랭턴(Stephen Langton)의 구분방식을 따른 것입니다. (, verse)의 구분은 구약에서 먼저 이루어지고 신약은 16세기 중반에 프랑스의 인쇄업자이며 성경학자인 로베르 에스티엔(Robert Estienne)의 구분을 따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후 12세기 이전에는 성경말씀에 대하여 장, 절의 구분이 없습니다. 그에 따라 히브리인들은 대선지서의 경우 그 분량의 차이를 장으로 인식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 점을 반영하여 생각해보면 오늘날 개역개정판 한국어성경의 경우 대선지서의 분량이 다음과 같습니다; 이사야 83페이지, 예레미야 92페이지, 에스겔 81페이지, 다니엘 25페이지입니다. 그러므로 실제분량에 있어서는 예레미야가 이사야보다 월등합니다;

 그렇다면 대선지서의 배열순서는 그 분량에 따른 것이 아니라 다른 분류에 따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대선지자들이 활동한 시기의 순서입니다.

둘째로, 선지자활동을 시작한 그들의 순서를 반영하여 대선지서를 배열하고 있다는 설명입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사야가 다윗왕조 중기 웃시야왕 말년인 주전 739년부터(6:1), 예레미야가 다윗왕조 말기의 문을 여는 성군 요시야 통치 13년인 주전 627년부터(1:2), 에스겔이 다윗왕조 마지막 왕 시드기야 통치 5년인 주전 593년부터(1:2) 각각 선지자활동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1)  그렇지만 그 설명도 하나의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에스겔보다는 다니엘의 선지자활동이 더 앞서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다니엘은 신바벨론제국의 황제인 느부갓네살이 통치한지 2년이 되는 해 곧 주전 604년에 벌써 여호와의 지혜로 그의 꿈풀이를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2:1, 28, 25:1).

(2)  그 점을 고려한다고 하면, 선지자 다니엘을 언급하지 말고 대선지서를 기록하고 있는 대선지자 3사람만 서로 비교하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예컨대, 대선지서 가운데 분량이 큰 3권의 저자는 그 기록의 시기로 보아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등인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타당한 설명입니다.  

그런데 그 3명의 대선지자는 하나의 큰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들은 공히다윗왕조 유대왕국의 왕도인 예루살렘성이 멸망을 당하고 나면 먼 훗날 영원한 도성 새 예루살렘의 시대가 도래한다는 사실을 여호와의 예언으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1)     선지자 이사야는 여호와께서 히스기야 왕의 눈물을 보고서 그의 수명을 15년 연장해주고 예루살렘성을 신위적인 방법으로 구원하여 주시지만 전쟁이 끝난 후에 현세적인 자랑과 축복만을 탐하는 히스기야 왕의 잘못된 행태를 보고서는 예루살렘과 다윗왕조의 멸망을 예언하고 있습니다(39:4-8). 그 다음에는 선지자 이사야가 이스라엘의 회복과 관련하여 오로지 메시아의 오심과 새로운 하늘과 땅 그리고 하나님나라의 도성인 새 예루살렘의 창조에 대한 여호와의 말씀을 중점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65:17-25).

(2)     예레미야는 시드기야 왕 11년 곧 주전 586년에 신바벨론제국의 갈대아군대에 의하여 예루살렘성이 함락되고 다윗왕조 유대왕국이 멸망 당하는 것을 개인적으로 목격한 선지자입니다(39:2, 14). 그 이유는 선민 유대인들이 여호와신앙을 떠나 끝까지 우상을 섬기며 세상적인 탐욕과 육신적인 정욕을 쫓아 살아갔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는 다윗왕조의 부활이 아니라 장차 메시아와 하나님의 영이 이 세상에 직접 임하여 만들어내는 새언약의 시대를 소망하고 있습니다(31:31-34, 33:14-8).

(3)     에스겔은 특이한 선지자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선지자 활동한 것이 아니라 신바벨론제국의 수도인 바벨론 그발 강가에서 선지자로 활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시드기야 왕 5년인 주전 593년에 30세의 나이로 선지자로 세움을 받지만(1:1-3) 다윗왕조 유대왕국이 멸망을 당하는 그해 곧 주전 58610월까지 7년 동안 벙어리 선지자로 지내게 됩니다(3:26-27, 33:21-22).

(4)     하나님의 평강이 임하고 있는 도시 예루살렘이 멸망을 당하고 나자 비로서 선지자 에스겔이 벙어리 신세를 면하고 말을 할 수가 있게 됩니다. 그때부터 에스겔은 제스처가 아니라 말로써 강력하게 여호와의 묵시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가 동족들에게 전파하고 있는 두가지의 환상이 가장 인상적인데 그것이 바로 새로운 예루살렘의 규모가 대단하다는 것, 그리고 여호와의 능력으로 심판의 골짜기에서 마른 뼈들이 여호와의 군대로 부활한다는 것입니다(37:10, 45:1-5). 그 두가지는 여호와의 세상심판과 새로운 영생의 나라의 창조에 관한 것입니다.

여기서 본문말씀과 관련하여 선지자 에스겔이 기록하고 있는 새로운 예루살렘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말씀을 더 드리고 싶습니다;

첫째로, 예루살렘의 이름은 본래 하나님의 평강인 살롬이 깃들어 있는 성읍을 뜻하고 있습니다. 그 이름의 유래는 일찍이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전공을 세우고 개선할 때에 그를 마중 나온 살렘 왕 멜기세덱에게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14:18). 멜기세덱이 하나님나라의 제사장이므로 예루살렘은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이 보호하시는 특별한 성읍입니다(7:1-3, 17). 그러므로 다윗왕조 유대왕국의 히스기야 왕이 예루살렘성전에 들어가서 여호와 하나님께 구원을 호소하자 여호와의 사자가 성을 포위하고 있던 앗수르 대군 185천명을 도륙하고 그 성을 구원하여 주신 것입니다(왕하19:34-36);

둘째로, 그와 같은 여호와의 구원은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선민 유대인들이 여호와신앙을 보전하고 있을 때에 국한되고 있습니다. 그들 선민이 여호와신앙을 버리고 우상을 대신 섬기며 세상적인 탐욕과 육신적인 욕정으로 포악한 사회를 만들어버리자 여호와께서는 미련을 두지 아니하고 예루살렘성을 떠나 버리십니다. 그 결과 세상적인 약육강식의 법칙에 따라 강대국의 군대가 약소국 다윗왕조 예루살렘과 유대왕국을 멸망시키고 마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이신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 섭리이기에 시공간을 뛰어넘어 동일합니다. 그 옛날 노아의 시대에 발생한 홍수심판, 그리고 선지자 예레미야 시대에 발생한 다윗왕조 유대왕국의 멸망이 전부 그러한 것입니다. 그 점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먼저, 노아의 시대 홍수심판에 대한 창세기의 기록입니다; “1.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2.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3.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120년이 되리라 하시니라”(6:1-3),  12.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 13.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6:12-13).

(2) 다음은 마지막 선민의 나라 다윗왕조 유대왕국의 멸망에 대한 역사서의 기록입니다; “7. 또 자기가 만든 아로새긴 아세라 목상(예루살렘) 성전에 세웠더라. 옛적에 여호와께서 이 성전에 대하여 다윗과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한 이 성전과 예루살렘에 내 이름을 영원히 둘지라. 8. 만일 이스라엘이 나의 모든 명령과 나의 종 모세가 명령한 모든 율법을 지켜 행하면 내가 그들의 벌로 다시는 그의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떠나 유리하지 아니하게 하리라 하셨으나, 9. 이 백성이 듣지 아니하였고 므낫세의 꾐을 받고 악을 행한 것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멸하신 여러 민족보다 더 심하였더라. 10. 여호와께서 그의 종 모든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여 이르시되, 11. 유다 왕 므낫세가 이 가증한 일과 악을 행함이 그 전에 있던 아모리 사람들의 행위보다 더욱 심하였고 또 그들의 우상으로 유다를 범죄하게 하였도다. 12.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이제 예루살렘과 유다에 재앙을 내리리니, 듣는 자마다 두 귀가 울리리라. 13. 내가 사마리아를 잰 줄과 아합의 집을 다림 보던 추를 예루살렘에 베풀고 또 사람이 그릇을 씻어 엎음 같이 예루살렘을 씻어 버릴지라”(왕하21:7-13);

셋째로, 노아의 시대에 여호와의 심판으로 멸망을 당하고 있는 세상은 한마디로, 여호와의 뜻을 어기고 세상사람들이 포악을 일삼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창조주의 말씀을 따르는 신앙을 버리고 탐욕과 욕정에 눈이 멀어 물리적인 힘 곧 폭력으로 세상을 지배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이 축복하신 일부일처제’(monogamy)라는 아름다운 가정의 질서가 사라지고 짐승의 세계처럼 마음에 드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취하는 소위 일부다처제’(polygamy)의 사회가 되고 맙니다. 그에 따라 영이신 하나님께서는 육신을 숭상하는 이 세상을 떠나고 마십니다. 그 결과는 인간세상이 약육강식의 짐승사회로 전락하고 여호와의 역사심판이 그대로 임하고 마는 것입니다.  

넷째로, 그와 동일한 현상이 다윗왕조 유대왕국의 말기에 발생하고 있습니다. 선민임을 자랑하고 있는 유대인들이 여호와신앙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며 세상적인 탐욕과 육신적인 정욕에 사로잡혀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장 심한 사례가 히스기야 왕의 아들 므낫세 왕의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그때 벌써 다윗왕조 유대왕국을 버리시기로 결정하고 마십니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살롬의 도읍인 예루살렘이 약육강식의 철칙에 따라 멸망을 당하고 맙니다. 달리 말하자면, 하나님의 평강인 살롬’(שָׁלֹ֖ום)이 사라지고 세상적인 멸망인 케파타’(קְפָ֖דָה)가 이 세상에 임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예나 지금이나 이 세상이 포악한 폭력이 난무하는 사회 곧 하마스’(חָמָ֖ס)의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그와 같은 간단한 히브리 용어를 사용하여 선지자 에스겔이 본문에서 어떠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지를 알아보고자 합니다. 구체적으로, 본문을 한 구절 씩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얻은 소중한 교훈과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함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로, “23. 너는 쇠사슬을 만들라. 이는 피 흘리는 죄가 그 땅에 가득하고 포악(하마스, חָמָ֖ס)이 그 성읍에 찼음이라. 24. 내가 극히 악한 이방인들(패권국의 군대)을 데려와서 그들이 그 집들을 점령하게 하고, 강한 자(예루살렘의 평강을 깨고 있는 지배자)(여호와를 업신여기는) 교만을 그치게 하리니, 그들의 성소가 더럽힘(성전 모독과 붕괴)을 당하리라”(7:23-24); 다음과 같이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23. 너는 쇠사슬을 만들라. 이는 피 흘리는 죄가 그 땅에 가득하고 포악(하마스, חָמָ֖ס)이 그 성읍에 찼음이라”(7:23);

1)    여기서 쇠사슬이 언급되고 있는 이유는 자유민인 선민 유대인들이 쇠사슬에 묶여서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기 때문입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예언의 말씀을 통하여 벌써 멀지 아니하여 조국인 선민의 나라 다윗왕조 유대왕국이 신바벨론제국 갈대아군대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고 국왕과 신민(臣民)들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쇠사슬에 묶여 끌려가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2)    일단 바벨론에 도착하게 되면 유대인 포로들은 쇠사슬 대신에 쇠 멍에를 매고 70년동안 바벨론 황제를 섬기는 노예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 점을 예레미야가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예언하고 있습니다; “14.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쇠 멍에로 이 모든 나라의 목에 메워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섬기게 하였으니, 그들이 그를 섬기리라. 내가 들짐승도 그에게 주었느니라 하라”(28:14), “11. (유대왕국의) 모든 땅이 폐허가 되어 놀랄 일이 될 것이며, 이 민족(선민 유대인과 주변의 이방인)들은 70년 동안 바벨론의 왕을 섬기리라”(25:11).

3)    어째서 마지막 남은 선민의 나라 다윗왕조 유대왕국이 이방인의 지역 패권국 신바벨론제국의 군대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고 지상에서 사라지고 마는 것일까요? 여호와께서 임재하고 계시는 예루살렘성전이 있는데 어찌하여 패망의 역사가 찾아오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그들 선민 유대인들이 여호와신앙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며 세상적인 탐욕과 육신적인 정욕을 쫓아 폭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무죄한 자의 피가 그 땅에 만연하고 약자의 호소가 여호와의 귀에 쟁쟁합니다.

4)    그 점을 선지자 에스겔이, 이는 피 흘리는 죄가 그 땅에 가득하고 포악(하마스, חָמָ֖ס)이 그 성읍에 찼음이라”(7:23b)고 정확하게 기록으로 남기고 있는 것입니다. 에스겔의 예언 그대로 예나 지금이나 포악한 정권의 폭력행사(하마스, חָמָ֖ס)는 정권의 몰락을 초래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그와 같은 포악한 시대가 반복되면 노아의 시대처럼 창조주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사라지고 그에 따라 국가의 패망과 세상의 멸망이라는 역사적인 심판을 당하고 맙니다. 그것이 창조주 여호와의 역사 섭리임을 재삼 명심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2)  24. 내가 극히 악한 이방인들(패권국의 군대)을 데려와서 그들이 그 집들을 점령하게 하고, 강한 자(예루살렘의 평강을 깨고 있는 지배자)(여호와를 업신여기는) 교만을 그치게 하리니, 그들의 성소가 더럽힘(성전 모독과 붕괴)을 당하리라”(7:24);

1)    선민 유대인들은 주전 701년 히스기야 왕 때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구원의 역사를 언제까지나 의지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이 두가지입니다; 첫째, 북조 이스라엘왕국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여호와라고 섬기는 우상숭배의 잘못을 범했습니다(왕상12:28-33). 그 때문에 주전 722년에 앗수르제국의 군대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고 맙니다(왕하17:21-23). 그러나 그러한 잘못을 범하지 아니한 다윗왕조 유대왕국은 멸망을 당하지 아니한 것입니다.

2)    둘째, 유대왕국의 지방 성읍이 앗수르제국의 군대에 짓밟히고 말았습니다. 도성 예루살렘성에서 완강하게 저항하고는 있지만 애굽의 구원군마저 앗수르 군대에 의하여 패퇴를 당하고 말았기에 이제는 절망적인 상황입니다(왕하18:17, 19:8-11). 그때 마지막 수단으로 히스기야 왕과 신하들이 예루살렘성전에 들어가서 여호와 하나님께 구원을 호소합니다(왕하19:14-19). 그때 하나님께서 사자를 보내어 하룻밤에 앗수르 군사 185천명을 몰살하게 합니다(왕하19:34-36). 그와 같은 여호와의 구원하심을 경험하고 있는 선민 유대인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때부터 그들은 예루살렘성전에서 매년 속죄의 제사만 드리고 있으면 이방인 제국이 감히 예루살렘을 멸망시킬 수가 없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3)    그러나 여기서 에스겔은 달리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이방 강대국의 군대를 끌고 와서 선민의 나라 유대왕국을 멸망시키기로 결정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강한 자(예루살렘의 평강을 깨고 있는 지배자)(여호와를 업신여기는) 교만을 그치게 하리니, 그들의 성소가 더럽힘(성전 모독과 붕괴)을 당하리라”(7:24b)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뜻을 간략하게 풀이해봅니다;

4)    첫째, 예루살렘성에서는 정치적인 권력이 종교적인 권력과 결탁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교만을 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권력의 힘을 빌려서 포악한 행동을 일삼는다고 하더라도 그와 상관없이 선민의 수호신 여호와께서는 다윗왕조 유대왕국을 언제나 이방인 강대국의 침략으로부터 구원해 주신다고 하는 이상한 현세적인 기복신앙에 빠져 있습니다(7:4, 8-11). 대표적으로, 거짓선지자 하나냐가 예루살렘에서 그렇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 예레미야는 그것이 잘못된 거짓 예언이라고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28:1-9).

5)    둘째, 선민 유대인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떠나 제멋대로 신앙생활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의 우상을 도입하여 섬기며 이방인과 마찬가지로 탐욕과 욕정으로 포악한 행동을 일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태여 선민과 이방인을 구별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에 따라 노아의 홍수 때와 마찬가지로(6:3) 창조주 여호와께서는 그곳을 떠나고 마십니다; “17. 내가 그들을 그들의 원수 앞에서 흩어 버리기를 동풍으로 함같이 할 것이며, 그들의 재난의 날에는 내가 그들에게 등을 보이고 얼굴을 보이지 아니하리라”(18:17). 여호와께서 떠나시고 버리신 그 예루살렘성은 더 이상 평강의 성이 아닙니다(왕하23:26-27). 그 때문에 이방인군대에 의하여 성소가 더럽혀지며 성전이 불에 타서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왕하25:8-9);

둘째로, “25. 패망(케파타, קְפָ֖דָה־)이 이르리니, 그들이 평강(살롬, שָׁלֹ֖ום)을 구하여도 없을 것이라. 26. (말세가 되어) 환난에 환난이 더하고, 소문에 소문이 더할 때에 그들이 선지자에게서 묵시를 구하나 헛될 것이며, 제사장에게는 율법이 없어질 것이요, 장로에게는 책략이 없어질 것이며”(7:25-26); 다음과 같이 분설(分說, 나누어서 설명함)합니다;

(1)  25. 패망(케파타, קְפָ֖דָה־)이 이르리니, 그들이 평강(살롬, שָׁלֹ֖ום)을 구하여도 없을 것이라”(7:25);

1)    여호와께서 사람들과 맺고 있는 언약은 두가지입니다; 하나가 축복의 언약이고 또 하나가 저주의 언약입니다. 어느 것이 실제로 역사 가운데 임하게 되는가? 하는 것은 백성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 점을 모세오경을 기록하면서 모세가 결론삼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19.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사망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20.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영원한 생명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약속의 땅은 사실 가나안이 아니고 천국이다, 11:16)에 네가 거주하리라”(30:19-20).

2)    선지자 예레미야가 그 사실을 다시 강조하고 있습니다; “10.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얼굴을 이 성읍(예루살렘)으로 향함은 을 내리기 위함이 아니요, 를 내리기 위함이라. 이 성읍이 바벨론 왕의 손에 넘김이 될 것이요, 그는 그것을 불사르리라”(21:10). 예레미야는 주전 627년 성군 요시야 13년부터 선지자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예언의 대부분은 악한 왕 여호야김과 시드기야 시대에 선포가 되고 있습니다.

3)    그러므로 시드기야 왕 5년에 해당하는 주전 593년 바벨론 그발 강가에서 선지자 활동을 시작하게 되는 에스겔은 그 전 여호야김 시대에 선지자 예레미야가 선포한 여호와의 예언의 말씀을 많이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가 여기서 ““25. 패망(케파타, קְפָ֖דָה־)이 이르리니, 그들이 평강(살롬, שָׁלֹ֖ום)을 구하여도 없을 것이라”(7:25)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여호와의 축복의 언약이 아니라 이제는 저주의 언약이 예루살렘에 임하고 있다는 사실을 동일하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4)    그 내용으로 보아, 다윗왕조 유대왕국의 왕과 신민들이 여호와신앙을 파수하고 있으면 여호와의 축복의 언약이 그 땅에 임하고 예루살렘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인 살롬(שָׁלֹ֖ום)이 넘치게 됩니다. 반대로, 여호와신앙을 떠나서 이방에서 도입한 우상을 섬기며 포악한 폭력을 행사하고 있으면 여호와 하나님께 버림을 받게 되고 마침내 저주의 언약이 그 땅에 임하고 맙니다. 그에 따라 예루살렘성에는 패망인 케파타(קְפָ֖דָה־)의 역사가 찾아오고 마는 것입니다. 그때에는 뒤늦게 평강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로 매어 달려도 소용이 없습니다(7:15-16);

(2)  26. (말세가 되어) 환난에 환난이 더하고, 소문에 소문이 더할 때에 그들이 선지자에게서 묵시를 구하나 헛될 것이며, 제사장에게는 율법이 없어질 것이요, 장로에게는 책략(신앙생활의 모범과 올바른 자문)이 없어질 것이며”(7:26);

1)    이 세상에 남은 마지막 선민의 나라가 다윗왕조의 유대왕국입니다. 그 왕국을 존속시키기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얼마나 고심하시는가를 선지자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말씀으로 다음과 같이 백성들에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1.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5:1). 주전 21세기에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 성읍의 구원을 위하여 중보기도를 할 때에 그 조건이 의인 10명을 찾으면 그 성읍에 패망하는 역사가 없을 것이라는 여호와의 답변입니다(18:32). 그 조건이 다시 한사람으로 완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조건마저 충족시키지 못하여 예루살렘의 멸망이 찾아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 멸망의 소문만이 무성한 절망적인 시대 곧 말세에 있어서 영적인 지도자 3부류 즉, 선지자, 제사장, 장로들은 과연 어떠한 타락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일까요? 본문에서 선지자 에스겔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선지자들이 진짜 여호와의 예언의 말씀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거짓 예언을 진짜인 것처럼 꾸며서 백성들에게 묵시로 선포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둘째, 제사장들이 율법을 주신 여호와의 취지와 본 뜻을 모르고 그저 형식적으로 전통적인 제례의식만을 집행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 점을 훗날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통렬하게 지적하고 계십니다; “6.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7.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 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15:6-7);

3)    셋째, 장로들은 백성들에게 신앙생활의 모범을 보여야 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영적으로 타락하고 말았기에 신앙생활의 모범이 되지 못하고 젊은이들을 올바로 이끌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책략(counsel)이 없어졌다는 말의 뜻입니다. 참고로, 선지자 에스겔이 기록하고 있는 내용은 예레미야의 다음 기록과 많이 닮아 있습니다; “30. 이 땅에(말세가 되니 선민사회에서도) 무섭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31.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장로들까지) 그것을 좋게 여기니,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5:30-31);

셋째로, “27. 은 애통하고, 고관은 놀람을 옷 입듯 하며, 주민의 손은 떨리리라. 내가 그 행위대로 그들에게 갚고, 그 죄악대로 그들을 심판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7:27); 다음과 같이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27. 은 애통하고, 고관은 놀람을 옷 입듯 하며, 주민의 손은 떨리리라”(7:27a); 영적으로 타락하게 되면 먼저 영적인 지도자들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여호와신앙이 사라지고 우상문화와 무당문화가 성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무속신앙이 만연하고 있다는 것은 패망의 역사가 찾아오고 있다는 일종의 경고가 됩니다. 그때에는 세속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왕과 대신들 그리고 일반백성들이 다음과 같은 징후를 보이게 된다고 선지자 에스겔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1)     첫째, 정보가 가장 많은 국왕이 나라의 멸망을 가장 먼저 눈치채고 있습니다. 나라가 망하게 되면 자신의 안위도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그것을 애통해하고 있습니다.

2)    둘째, 자신의 능력으로 나라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자격미달의 왕이 우왕좌왕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최고지도자의 실수 연발을 바라보면서 그를 보좌하고 있는 대신들이 거듭 놀라서 정신이 아득합니다. 어떻게 수습을 할지 몰라서 그들 역시 허둥거리고 있을 뿐입니다.

3)    셋째, 일반백성들은 두가지 사실 때문에 심히 떨며 불안을 느끼고 있습니다. 하나는, 참으로 무능하며 폭력적인 정권으로 말미암아 개인적으로 두려워 떨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그 때문에 국가의 안보가 위태롭기에 그것이 심히 불안한 것입니다.

(2)  내가 그 행위대로 그들에게 갚고, 죄악대로 그들을 심판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7:27b); 창조주 여호와의 역사심판의 기준이 두가지라고 선지자 에스겔이 여기서 짤막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가 그들의 행위입니다. 또 하나가 그들의 죄악입니다. 죄악이 심판의 기준이 된다고 하는 것은 금방 이해가 됩니다. 그렇지만 행위는 다소 생소합니다. 무엇을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 점을 다음과 같이 자세하게 살펴보고자 합니다;

1)    피조물인 인간은 창조주 여호와의 뜻에 따라 청지기의 직분에 충실하게 이 세상을 경영해야 합니다(1:26-28). 그러므로 하나님의 청지기로 창조되어 있는 인간은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종의 분수를 지켜야 합니다. 만약 종의 신분과 분수를 벗어나서 스스로 이 세상의 주인이라고 주장하면서 창조주 여호와의 말을 따르지 아니하고 제멋대로 행동하게 되면 그것이 여호와의 역사심판을 초래하고 마는 것입니다.

2)    그와 같은 악한 행위를 한국어성경에서는 신구약을 막론하고 패역’(悖逆, 가정의 패륜과 국가의 반역을 동시에 말함)이라는 특별한 용어로 설명하고 있습니다(32:20, 2:19, 대하6:37, 78:8, 6:14, 1:5, 30:9, 28:16, 2:3-8, 9:41, 2:40, 1:11). 그 뜻은 아버지 하나님을 무시하는 자식의 패륜과 국가의 왕을 폐하고자 하는 신하의 반역을 동시에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가정적으로도 국가적으로도 자식과 신하의 도리를 모두 저버린 자들이 창조주 앞에 종으로 바로 서지 못한 청지기의 잘못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종의 도리가 무엇일까요?

3)    첫째, 무엇보다도 먼저 피조물인 인간은 이 세상을 창조한 창조주 하나님이 계신다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고 창조주 하나님이 지금도 이 세상과 자신의 인생을 섭리하고 계신다고 하는 사실을 정직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점을 인정하지 아니하는 것이 바로 패역함의 시작인 것입니다.

4)    둘째,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매사 주인의 뜻을 묻고 그 뜻을 실천하는 삶을 신실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하지 아니하면 불충한 종이 됩니다. 불충한 종의 특징은 자신의 견해에 하나님의 말씀을 끌어들여서 그것을 정당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5)    셋째, 종이 할 수 있는 일과 주인이 할 수 있는 일을 구분하고 그 능력의 차이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이 스스로 창조주라도 되는 것처럼 행동해서는 안됩니다. 비록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한 겨리가 되어 밭에서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창조주와 종의 능력의 차이를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11:28-30). 같은 멍에를 매고 있다고 하더라도 주님이 큰 능력으로 큰 힘을 발휘하십니다. 그러므로 작은 힘과 능력을 가진 성도는 종의 자리에서 겸손하게 주님과 발걸음을 맞추어 동행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도의 멍에가 가벼워지는 비결입니다.

결론적으로, 한국사람들은 종의 도리와 분수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전통적으로 법도’(法度)가 무엇인지를 익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종의 분수를 넘어서지 아니하고 주인의 뜻을 받들며 실천하는 그것이 바로 법도입니다.

그 법도를 명심하면서 자신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주님 앞에서 인생을 살아가게 되면 살롬을 맛볼 수가 있으며 성도들이 살고 있는 세상은 살롬의 도성인 예루살렘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와 반대로 법도를 무시하고 포악한 하마스의 인간으로 행동하게 되면 이 세상은 패망이 찾아오는 케파타의 도성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주님 안에서 종의 법도를 지키는 저와 여러분들이 모두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사회와 조국이 살롬을 누리며 통일을 성취하는 길이라고 하겠습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