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22년 손진길 목사 설교문

사도 바울의 동역자들(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10. 18. 12:45

제목; “사도 바울의 동역자들”(16:1-7)

설교일; 주후 20221023일 주일

작성자; 손진길 목사(1018일 화요일 작성)

 

사도 바울은 생전에 13편의 서신서를 기록하여 이 세상에 남기고 있습니다. 그 내용의 핵심은 자신이 바리새인으로서 과거 랍비 사울로 살고 있었을 때에 다메섹 도상에서 환상 가운데 자신에게 임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나타난 하나님과 대화를 함으로써 자신의 신관이 획기적으로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그로 말미암아 창조주 여호와는 유대교에서 주장하고 있는 바와 같은 산술적인 하나의 하나님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그 대신에 예수 그리스도의 주장과 같이 여호와는 성부, 성자, 성령이라고 하는 31체의 신비를 가지신 유일한 창조주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요10:30, 14:16, 엡4:6).

그와 같은 놀라운 영적인 체험을 한 랍비 사울은 수년간 히브리경전을 다시 연구하면서 31체 하나님께서 어떻게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이루시기 위하여 인류의 역사를 섭리하고 계시는지를 하나님의 복음으로 깨닫고 있습니다;

그와 더불어 랍비 사울이 사도 바울이 되는 변화가 초래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메섹 도상에서 환상 가운데 자신을 부르신 주님께서는 그를 더 이상 랍비 사울이 아니라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사도로 삼으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이 그때부터 그 사명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제자이며 종으로서 온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하고 계시는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는 증인으로 신실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큰 갈등이 그의 내면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의 선교지가 동족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예루살렘과 유다 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는 이방인인 헬라인과 로마인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 복음을 전파하는 주님의 사도입니다. 그 점을 사도 바울은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방인보다 동족인 유대인들을 먼저 구원하고 싶은 것이 사도 바울의 소망이기 때문입니다(9:3, 10:1);

그는 자신의 친척과 골육을 먼저 구원하고 싶은데 그의 거듭난 인생의 주인이신 주님께서는 그것을 허용하지 아니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이방인 선교사로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주님께 간구하고 있습니다. 부디 자신의 친척과 골육 그리고 동족들을 구원하여 달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이방인 사도로 끝까지 충성할 것이니 주님께서는 자신의 마음속 소원을 아시고 부디 동족들을 구원하여 달라는 간절한 기도입니다.

그와 같은 사도 바울의 간구가 주님의 긍정적인 응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이 너무나 기뻐서 자신이 작성한 서신서에 그 내용을 자신의 동역자의 이름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대목이 바로 로마서 제16장입니다;

 그곳에 이름이 드러나고 있는 동역자 35명 가운데 적어도 4명이 그의 친척으로 명기가 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전체의 10% 이상입니다.

그 점에 비추어 볼 때, 해외선교의 중요성을 다시 인식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민족의 구원을 위하여 진력할수록 주님께서는 선교자의 친척과 골육 그리고 동족을 구원하여 사도 바울의 경우와 같이 해외선교를 위한 동역자로 세워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그것이 해외선교로 말미암아 국내에서 얻을 수 있는 주님의 놀라운 축복의 열매입니다. 그와 같이 주님을 먼저 대접하고 주님의 대접을 성도가 받는(If you treat Lord with respect, Lord will treat you) 소위 상호 호혜적’(reciprocal)인 은혜를 우리 모두가 함께 누려야 하겠습니다.  

참고로, 사도 바울의 서신서는 다음과 같은 4가지의 큰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1)  첫째, 사도 바울의 서신서는 그 작성 및 회람의 시기가 초대교회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앞선 것입니다. 그의 초기서신이 주후 60년을 전후하여 이 세상에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의 옥중서신은 공관복음과 비슷한 시기에 작성이 되었다고 볼 수 있지만 사도 바울의 서신서는 제4복음서를 비롯한 사도 요한의 여러 서신서보다는 분명히 25년 이상 앞선 것입니다.

(2)  둘째, 사도 바울은 유대교에서 주장하고 있는 유일한 산술적인 하나의 하나님이 아니고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라는 31체의 신비를 가지고 있는 유일하신 창조주 여호와의 존재와 그 역사하심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설명의 방법이 자신이 경험한 영적인 체험과 깨달음 그리고 그가 연구한 히브리경전의 증거들입니다.

(3)  셋째,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의 뿌리가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원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피조물 사랑 그리고 모든 피조물을 돌보고 그 생명을 하나같이 살리고자 하시는 이른바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이라는 사실을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설명의 방법이 그가 랍비 사울로서 익숙하게 알고 있는 히브리경전의 내용을 메시아의 오심과 성령님의 오심이라는 새 언약 곧 복음적인 시각에서 재해석하는 것입니다;

(4)  넷째, 사도 바울은 자신의 주장이 진리라는 사실을 진리의 성령님의 임재와 내주 역사라는 자신의 거듭난 영적인 삶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8). 따라서 그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증거에 있어서 단지 학문적인 주장에 머무르지 아니하고 자신의 인생 가운데 역사하고 계시는 31체 하나님에 대한 고백으로 생생하게 간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도 바울의 서신서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한 구절 씩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 가운데 깨달은 소중한 교훈과 메시지를 함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로, “1. 내가 겐그레아 교회일꾼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추천하노니, 2. 너희는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줄지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라”(16:1-2);

(1)  겐그레아는 고린도에서 남동쪽으로 30리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의 서신서에서 최초의 여집사’(헬라어 διάκονον, 영어로는deaconess)로 표현하고 있는 뵈뵈가 그녀의 고향으로 보이는 그곳 겐그레아에 교회를 개척하고 있습니다(1a). 그녀가 여성으로서 대담하게 겐그레아교회를 개척할 수 있게 된 것은 사도 바울로부터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큰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의 기록을 참조하면 사도 바울은 주후 50년대초에 16개월간 고린도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르친 적이 있습니다(18:11). 그때 대도시 고린도는 물론 그 주변지역의 젊은이들이 많이 참석하여 체계적인 바울의 설명을 듣고 큰 깨달음을 얻어 복음전파와 교회개척의 역군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 가운데 여집사 뵈뵈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2)  사도 바울이 로마서 마지막 장인 제16장에서 자신의 동역자의 이름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그 수가 실명으로 거론된 자만 하더라도 35명이나 됩니다. 그 가운데 가장 먼저 바울은 로마의 교회 성도들에게 여집사 뵈뵈를 추천하고 있습니다(1b).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도 바울이 로마서라는 서신서를 작성하여 로마교회의 성도들에게 보내고 있는 목적과 관련되고 있습니다. 그 목적이 크게 보아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자신이 개척하지 아니한 자생적인 로마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자신이 깨닫고 있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핵심을 체계적으로 설명해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로마제국의 수도에 살고 있는 로마교회의 성도들은 부유하며 권세가 있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장차 로마교회를 방문하여 그곳 성도들과 교제를 나누고 그들의 도움을 받아 로마시 이서지역의 서방선교에 나서기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3)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로마교회에 추천하여 보내고 있는 뵈뵈는 그 사명이 두가지입니다;

하나가 사도 바울이 작성한 서신서를 로마의 성도들에게 무사히 전달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가 로마교인들과 교제를 하면서 그 도움을 받아 훗날 사도 바울과 함께 서방선교에 나설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첫번째 사명이 바로 뵈뵈가 사도 바울의 서신을 들고 가는 사자의 역할입니다. 그러므로 그 서신의 수신자인 로마교회의 성도들은 마치 사도 바울을 대하듯이 여집사 뵈뵈를 맞이해야 합니다. 그 점을 사도 바울이2. 너희는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2a)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번째의 사명과 관련하여서는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줄지니”(2b)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로마교인들이 이제는 서방선교에 나설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며 그 준비에 나서고 있는 여집사 뵈뵈를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4)  그 점은 로마서 제15장에서 바울이 벌써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23.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스페인을 말함, 그 항구가 다시스임, 1:3)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기를 바라고 있었으니, 24.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사귐으로 얼마간 기쁨을 가진 후에 너희가 그리로 보내주기를 바람이라”(15:23-24). 로마교회의 유지들이 여행자인 뵈뵈에게 베풀어주어야 하는 정치적 사회적인 지원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후원자(헬라어 προστάτις, 영어로는 patron 또는 sponsor)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후원자의 보증이 없으면 로마의 도시에서는 여행자가 신분의 보장과 사회복지의 혜택을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5)  사도 바울이 이방인 선교에 나서고 있던 당시 로마제국에서는 그만큼 후원자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후원자가 없으면 로마의 도시를 여행하거나 머무를 수가 없는데 그 이유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로마의 도시에서 여행자가 숙식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식주인(食主人)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그 식주인이 바로 후원자입니다. 둘째, 후원자가 신원보증을 해주어야 여행객이 취업을 할 수가 있으며 로마가 주는 각종 혜택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셋째, 후원자의 재정보증을 받아야 여행객은 로마의 도시에 거주할 수가 있습니다. 초대교회시대 이방선교에 나서고 있는 사도들은 모두가 로마제국의 입장에서는 여행객들입니다. 그러므로 선교사들은 현지교회의 유력인사로부터 반드시 후원을 받아야 의식주의 문제가 해결되며 동시에 다음 여행지까지 무사히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6)  그와 같이 중요한 역할을 그리스 남부 고린도 인근에 있는 겐그레아에서는 현지교회를 개척한 뵈뵈가 감당하였다고 사도 바울이 설명하고 있습니다(2c). 그녀가 선교사들을 그렇게 많이 도왔으므로 그 점을 감안하여 로마교회의 지도자들이 뵈뵈를 위하여 법적인 후원자가 되어주는 것이 마땅하다는 사도 바울의 말입니다. 특히 사도 바울은 개인적으로 겐그레아 지역을 방문하였을 때에 뵈뵈가 후원자가 되어 주었기에 도움을 받은 경험이 있음을 여기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뵈뵈에 대한 자신의 추천이 진실임을 거듭 강조하고 있는 대목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로, “3.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브리스가아굴라에게 문안하라. 4.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 5. 또 저희 집에 있는 교회에도 문안하라. 내가 사랑하는 에배네도에게 문안하라. 그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께 처음 맺은 열매니라”(16:3-5);

(1)  사도 바울이 로마시민권을 가지고 있으며 로마시에 거주한 경험을 가진 부부 브리스가와 아굴라를 만난 장소가 바로 고린도입니다(18:1-2). 그때가 주후 50년대초입니다. 로마시에 살고 있던 그들 부부가 이태리 반도를 떠나 멀리 그리스반도 남부에 있는 고린도로 이주한 이유는 당시 로마의 제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재위 AD 41-54)40년대 후반에 로마시에서 유대인들을 모두 축출하였기 때문입니다(18:2). 그 당시 유대인들이 유대교와 기독교로 갈라져서 분쟁을 일으킨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을 로마황제는 옥석을 구분하지 아니하고 전부 로마시 바깥으로 축출하고 만 것입니다.

(2)  로마시에서 천막 만드는 직업에 종사하고 있던 유대인 부부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아예 그리스의 남부 대도시 고린도로 이주하여 다시 천막제조업을 경영하고 있습니다(18:3). 그곳에 자비량 선교사인 사도 바울이 찾아와서 함께 지내고 있습니다;

 그것은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체계적으로 배우게 되는 좋은 기회가 되고 있습니다(18:4, 11). 참고로, 성서학자들은 아굴라가 소아시아 본도 출신이며 그의 아내인 브리스가는 로마시에 살고 있던 유대인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훗날 그들 부부는 사도 바울을 따라 소아시아 에베소로 간 후 그곳에서 교회생활에 힘쓰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그들 부부는 알렉산드리아에서 건너온 성경학자 아볼로를 만나 그들이 바울로부터 배운 성령세례에 관하여 가르쳐 주기도 하는 것입니다(18:24-26);

(3)  주후 54년에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서거하자 유대인 추방령이 유야무야가 되고 있습니다. 그때쯤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가 다시 로마로 들어간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이 이와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3.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브리스가아굴라에게 문안하라. 4.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 5. 또 저희 집에 있는 교회에도 문안하라”(16:3-5a).

(4)  다음 3가지 내용을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방세계에 전하는데 있어서 그들 부부는 사도 바울의 동역자가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사도 바울은 선교지에서 죽음의 위기를 수없이 넘기고 있습니다(고후11:23). 그 가운데 한번은 그들 부부가 사도 바울을 피신시키고 자신들이 대신 잡혀서 목숨의 위협까지 감수하고 있습니다(4). 그 정도로 바울의 선교활동을 돕고 있는 진실한 복음의 일꾼들이 바로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라는 사실을 사도 바울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셋째, 브리스가와 아굴라가 로마시로 되돌아가서 지금은 자신의 집에 초대교회를 하나 세우고 있습니다(5a). 그러므로 로마의 자생적인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그들 부부를 찾아보고 주님안에서 교제를 나누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입니다.

(5)  그 다음에 사도 바울이 내가 사랑하는 에배네도에게 문안하라. 그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께 처음 맺은 열매니라”(16:5b)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의미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가 로마시에서 개척한 교회를 찾아가서 그들과 교제를 하게 되면 그곳에서 에배네도라는 성도들 만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에배네도는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특별한 성도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제1차 선교여행 당시 소아시아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의 제자로 거둔 성도가 바로 에배네도이기 때문입니다(13:43, 52, 비시디아 안디옥, 14:1, 4, 이고니온, 10, 루스드라, 21, 더베 중의 하나임);

소아시아에 살고 있던 에배네도가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를 따라 로마시에 들어가서 그곳 교회에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에배네도 역시 이방지역에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헌신하고 있는 젊은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로마교회의 성도들에게 자신 있게 에배네도를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6. 너희를 위하여 많이 수고한 마리아에게 문안하라. 7. 친척이요 나와 함께 갇혔안드로니고유니아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사도들에게 존중히 여겨지고 또한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16:6-7);

(1)  복음서를 보면 여러 명의 마리아가 등장합니다. 그만큼 당시 마리아는 흔한 이름입니다. 따라서 그 구분을 위하여 출신 고향을 이름 앞에 붙이거나 유력인사와의 관계를 명기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막달라 마리아, 베다니 마리아, 예수의 모친 마리아,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19:25) 등이 그러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고향이나 유력인사와의 관계가 전혀 없이 사도 바울이 그냥 마리아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마리아가 너희를 위하여 많이 수고하였으므로 그녀에게 문안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6).

(2)  따라서 두가지로 해석이 됩니다; 하나는, 어떠한 마리아이든지 상관없이 초대교회에서 성도들을 돌보는 일에 헌신한 여성에게 교회성도들이 문안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이름도 없이 명예도 없이 그저 주님의 사랑으로 성도들을 돌보고 있는 헌신적인 여성들의 대표자로 그리고 상징으로 마리아라는 이름을 사도 바울이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3)  7절에서 사도 바울은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하라고 로마교회의 성도들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7a). 그 이유가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그 두사람이  복음을 위하여 감옥살이를 한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 사도 바울이 함께 감옥생활을 하였기에 그 점을 확실하게 증언할 수가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안드로니고와 유니아가 사도 바울의 친척으로서 사도들의 존경을 받으며 사도 바울보다 먼저 그리스도를 믿은 복음의 일꾼이라는 것입니다;

(4)  여기서 두가지 사실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방인 사도인 바울이 그토록 친척과 골육인 동족 유대인들의 구원을 주안에서 소원하고 있었는데 그 기도를 주님께서 들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 사도 바울이 여기서 내 친척 안드로니고와 유니아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바울이 친척인 두사람과 이방인선교를 같이하면서 감옥살이도 함께하고 있습니다;

(5)  그리고 사도 바울은 친척인 안드로니고와 유니아로부터 놀라운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회심을 하고서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섬기고 있는데 그들의 헌신에 대하여 여러 사도들이 크게 칭찬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해외선교에 전념하고 있는 동안에 그러한 일들이 수없이 유대인사회에서 발생하고 있는 것입니다”(7b). 그것은 사도 바울의 마음속 소원을 아시고 주님께서 그의 친척과 골육인 유대인들을 많이 구원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국내전도가 먼저일까요? 아니면 해외선교가 먼저일까요? 그것은 마치 달걀이 먼저이냐 아니면 닭이 먼저이냐를 논하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국내전도의 연장선상에서 해외선교가 이루어지며 해외선교에 전념할 때에 동족에 대한 전도도 왕성해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선민이라고 자처하고 있는 그들이 주변의 이방인들에게 창조주 여호와의 구원의 말씀을 전혀 전달하지 아니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자신들의 영토를 침입하고 있는 주변의 이방국가를 미워하여 그들이 여호와의 말씀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지내다가 여호와의 진노로 멸망을 당하는 것을 선민 모두가 고대하였기 때문입니다(5:43).

그에 따라 변방 갈릴리 가드헤벨의 선지자인 요나가(왕하14:25) 두가지의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동편의 이방도시 니느웨로 가서 여호와의 예언의 말씀을 전하는 것을 아주 싫어하여 요나가 정반대로 서쪽 끝 다시스로 가는 선박에 타고 있는 것입니다(1:1-3).

또 하나는, 큰 물고기 배속에서 비로소 회개를 하고 니느웨로 가서 여호와의 말씀을 전파한 결과 그들 이방인들이 자발적으로 회개를 하고 여호와의 구원을 얻고 있습니다(3:1-10). 그것을 매우 싫어한 요나가 고향으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니느웨 주민들이 다시 여호와께 범죄하여 멸망을 당하는 역사를 보고 싶어합니다(4:5).

예수님이 선민 유대인에게 그와 같은 요나의 잘못을 범하지 말라고 재삼 강조하고 계십니다(12:39-41, 16:4). 따라서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자신의 동족 뿐만 아니라 다른 민족에게도 똑같이 전하여야 합니다. 사도 바울처럼 이방인 선교에 진력하게 되면 그만큼 친척과 동족을 구원하여 주시는 주님의 은혜를 맛볼 수가 있습니다.

아무쪼록 본문을 읽으시면서 그와 같은 사실을 분명히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코비드19 전염병이 거의 끝나가고 국제적으로 인적교류가 다시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차제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방나라에 힘있게 전파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