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22년 손진길 목사 설교문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운 왕과 악한 왕(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9. 26. 00:59

제목;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운 왕과 악한 왕(22:10-12)

설교일; 주후 2022102일 주일

작성자; 손진길 목사(926일 월요일 재작성)

 

본문에서 선지자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말씀을 선민 유대인들에게 대언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이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 전쟁으로 말미암아 죽은 병사나 백성들을 위하여 애통하기 보다는 포로로 끌려가서 평생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불귀의 객이 되고 마는 동족들을 위하여 슬피 울라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십니다(22:10). 그 이유는 장차 망국의 백성이 되어 적국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유대인들의 고생과 고통이 극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2)  둘째, 다윗왕조의 왕이라고 하더라도 그러한 고통스러운 운명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군 요시야의 뒤를 이은 여호아하스왕의 운명이 그렇게 비참하기 이를 데가 없기 때문입니다(22:11-12, 왕하23:30-34).

그런데 본문에서는 여호아하스왕의 이름을(왕하23:30) ‘살룸이라고 부르고 있는데(22:11), 그것은 역대상 제3장에 기록이 되어 있는 다윗왕조의 공식적인 족보에 비추어 볼 때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1)  첫째로, 다윗 왕가의 족보에 있어서 장남은 어린 나이로 죽는다고 하더라도 그대로 장자의 이름으로 기록이 되고 있습니다. 성군 요시야의 장남인 요하난이 그러합니다(대상3:15). 그 이유는 장자상속의 원칙을 지니고 있는 고대사회에서는 죽은 장남의 양자로 똑똑한 조카를 입양하여 그 후계자로 세우고 가문을 물려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바벨론으로 끌려간 여호야긴 왕의 경우입니다. 그는 폐위가 되면서 옛날 이름 여고냐로 불리고 있는데(대상3:16), 나중에 석방이 되고 자신의 다윗가문을 바벨론에서 되살릴 수 있게 됩니다(왕하25:27-30). 여고냐는 3남인 브다야의 똑똑한 아들 스룹바벨을 일찍 죽은 자신의 장남 스알디엘의 양자로 입양하여 그에게 다윗의 가문을 물려주고 있는 것입니다(대상3:17-19);

다윗가문의 후계자가 된 스룹바벨이 페르시야 황제인 고레스의 배려로 동족들을 이끌고 고토로 돌아와서 주전 516년에 예루살렘 제2성전을 건축하게 됩니다(1:1-4, 3:8, 6:15-16).

(2)  둘째로, 적의 침입을 막지 못하여 폐위가 되고 그 치세가 짧은 왕은 왕의 이름 대신에 집에서 쓰는 이름으로 기록이 되고 왕으로는 그 서열이 뒤로 밀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다윗왕조의 족보가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 여호아하스 왕이 여호야김의 동생이고 시드기야의 형인데 그가 폐위가 되고 적국으로 잡혀가고 나자 집의 이름 살룸이 되고 그 서열이 뒤로 밀려서 막내가 되고 있습니다(대상3:15);

2)    둘째, 여호야김 왕이 11년 동안 통치를 하다가 신바벨론 갈대아 군대의 재침을 만나기 3개월 전에 죽고 맙니다(왕하23:34-37, 24:8-10). 그의 아들 여고냐가 즉위하여 여호야긴왕으로 불리게 됩니다. 그러나 적군을 막지 못하고 사로잡혀서 바벨론으로 끌려가고 맙니다. 그 때문에 다윗왕조의 족보에서는 그의 이름이 여호야긴이 아니라 여고냐로 등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대상3:16).

3)    참고로, 그것은 마치 조선시대에 반정을 만나 폐위가 된 왕들의 이름이 그 옛날 왕자 때의 이름으로 되돌아가고 마는 것과 같습니다. 연산군광해군의 경우가 그러한 사례입니다;

 그런데 광해군은 본래 후궁의 아들로서 선조의 서자였으므로 그 칭호가 맞습니다. 그러나 연산군의 경우에는 억울합니다. 왜냐하면, 그 생모인 폐비 윤씨가 후궁에서 승차하여 중전이 된 다음에 그를 낳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태어날 때부터 폐주의 신분은 부왕 성종의 서자가 아니라 적장자인 연산대군이 맞습니다. 그와 같은 역사적인 사실을 무시하고 반정세력이 폐주를 연산대군이 아니라 연산군이라고 악의적으로 역사책에 기록하고 만 것입니다. 더구나 조선의 왕이 된 연산대군은 폐비 윤씨의 일을 알게 되자 생모의 중전 신분을 회복하여 제헌왕후로 추존합니다. 그러나 그마저 다시 역사의 기록에서 사라지고 맙니다. 그 이유는 연산대군이 이복동생 진성대군을 내세운 반정세력에 의하여 왕의 자리에서 쫓겨나고 말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인간의 역사는 승자에 의하여 의도적으로 왜곡되어 기록되고 마는 것임을 증언하고 있는 그러한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본문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두가지 질문이 가능합니다;

(1)  하나는, 성군 요시야가 급서(急逝, 갑자기 서거를 하는 것)를 하게 되자 중신들이 살아 있는 3왕자 가운데(대상3:15), ‘엘리아김’(왕하23:34, 당시 25세임, 왕하23:36)의 동생이며 맛다니아’(왕하24:17, 당시 10세임, 왕하24:18)의 형인 23세의 살룸을 선택하여 왕으로 삼습니다(왕하23:29-31). 그 이유는 살룸이 엘리아김의 아우이지만 똑똑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역사서인 열왕기하에서는 살룸곧 여호아하스 왕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왕하23:37). 그렇다면 신하들이 보고 있는 관점과 여호와께서 보시는 관점이 다르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차이가 도대체 무엇일가요?

(2)  또 하나는, 여호아하스 왕이나 여호야긴 왕은 각각 3개월간 짧게 유다 왕국을 통치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독자적인 정책을 추진할 만한 시간적 여유가 전혀 없습니다;

1)    여호아하스 왕의 경우에는 부왕인 성군 요시야가 북상하는 애굽의 바로의 군대를 막고자 므깃도의 전선에 나갔다가 그만 불의의 부상을 입고 후송 도중에 급서하게 됨에 따라 왕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재빨리 군사를 재정비하여 예상이 되는 바로의 침공을 막는데 급급합니다. 그 어떠한 종교적인 개혁을 실시할 여유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한 왕이라고 기록이 되고 있습니다.

2)    여호야긴 왕의 경우에도 비슷합니다. 부왕인 여호야김 왕이 신바벨론에 조공을 중지함으로써 적의 침입이 예상되고 있는 시기에 갑자기 죽고 맙니다. 그의 아들인 18세의 여호야긴이 즉위하여 적의 침입에 대항할 준비를 갖추기에 여념이 없습니다(왕하24:8). 그러나 불행하게도 3개월만에 느부갓네살 황제가 갈대아 군대를 이끌고 침입하여 그만 폐위가 되고 적국으로 끌려가고 마는 것입니다(왕하24:10-15);

그는 그 어떠한 종교적인 정책을 수행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서에서는 9. 여호야긴이 그의 아버지의 모든 행위를 따라서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라”(왕하24:9)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러한 기록의 기준이 무엇일까요? 선지서와 역사서의 기록을 모두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두가지의 기준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1)  첫째로, 므낫세 왕의 전철을 밟느냐? 아니면 성군 요시야의 정책을 계승하느냐?가 하나의 기준이 되고 있습니다. 므낫세 왕처럼 정책을 펴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한 왕입니다. 반면에 요시야 왕처럼 정책을 펴면 여호와 보시기에 의로운 왕입니다. 역사적인 배경사를 조금 살펴봅니다;

1)    이사야가 유다 왕국에서 선지자활동을 하고 있을 때에 다윗왕조의 왕은 히스기야입니다 그는 부왕 아하스에 이어 25세의 나이로 즉위하여 29년간 유다 왕국을 통치합니다. 그의 전반기 통치가 끝나는 즈음 곧 즉위 14년에 앗수르의 황제 산헤립의 침략을 받아 그의 왕국이 누란의 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러나 히스기야 왕은 선지자 이사야의 기도와 자신의 회개로 여호와의 구원을 두차례나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는, 여호와께서 감히 창조주 하나님의 권능을 몰라보고 제멋대로 멸시하고 있는 앗수르 군대를 천사를 보내어 진멸하신 것입니다(왕하19:34-35). 그 결과 예루살렘성과 유다 왕국이 전쟁에서 승리를 얻게 됩니다. 또 하나는, 갑자기 중병에 걸려 죽음의 문턱을 헤매고 있던 히스기야 왕이 여호와께 다시 기도로 매어 달린 것입니다. 통치 전반기에 여호와를 위하여 우상을 없애고 율법을 지키고자 노력한 자신을 부디 살려 달라고 간구합니다(왕하18:3-8, 20:1-3). 그 결과 15년의 목숨연장을 받게 되는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2)   그런데 문제는 여호와의 은혜로 나라도 구하고 자신의 목숨도 15년이나 연장이 되어 통치 후반기를 맞이하고 있는 히스기야 왕의 교만입니다. 그는 자신이 다스리고 있는 다윗왕조의 유다 왕국이 메소포타미아의 패권국인 앗수르의 원정군까지 패퇴시킬 수 있는 막강한 군사력과 경제적인 부강함을 지니고 있다고 대외적으로 자랑한 것입니다(왕하20:12-13). 그 어느 구석에도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이라는 사실이 드러나지를 않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선지자 이사야는 장차 다윗왕조의 유다 왕국이 교만한 히스기야 왕의 전철을 밟다가 바벨론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고 말 것이라고 하는 여호와의 예언을 그에게 전하게 됩니다(왕하20:16-18). 그러나 히스기야 왕은 자신의 통치기간에는 계속 유다 왕국이 번영을 누릴 것이므로 죽은 다음의 일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극히 현세적인 이기주의로 일관하고 맙니다(왕하20:19).

3)    요컨대, 히스기야의 전반기 통치와 후반기의 통치 가운데 그의 후계왕들이 주로 후반기의 악한 정치를 따르고 있다는 것이 망국의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어린 왕자 므낫세가 아버지 히스기야 왕에게서 배운 것은 세상적인 자랑과 교만입니다. 여호와의 은혜를 무시하는 생각과 행동입니다. 따라서 그는 다윗왕조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교만하고 악한 왕이 되고 맙니다(왕하21:1-2, 11-16). 무려 55년 동안 유다 왕국을 오래 통치하면서 므낫세가 한 일은 세가지입니다; 첫째, 포악한 통치로 그의 왕국에 무죄한 자의 피가 흘러 넘치게 됩니다(왕하21:16). 둘째, 백성들에게 이방신상과 우상을 적극적으로 섬기도록 그가 모범을 보이고 있습니다(왕하21:3-6). 셋째, 선민 유대인들이 여호와신앙을 완전히 잊어버리도록 아예 모든 절기와 율법서를 없애 버린 것입니다(왕하21:7-11, 22:8, 23:21-23);

  

4)    므낫세 다음의 다윗왕조의 왕들이 줄줄이 므낫세의 악한 통치를 재현하고 맙니다(왕하23:25-27). 오직 한 사람 므낫세의 손자인 성군 요시야만이 우상문화를 척결하고 여호와신앙을 되살리고자 몸부림을 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 이유는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즉위한지 18년이 되어서야 예루살렘성전에서 우연히 율법서 한권을 찾아내게 됩니다(왕하22:8). 모세의 신명기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읽고서 다윗왕조 유다 왕국이 므낫세의 악행으로 얼마나 여호와의 진노를 사고 있는지 확인하게 됩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알 수 없도록 경전을 모두 없애 버리고 율법상의 절기마저 사라지고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요시야는 신하들을 모아 놓고서 이제부터 유월절을 지키고 전국에서 우상문화를 척결하라고 강력하게 지시합니다(왕하23:21-23);

그러나 13년 후에 불의의 사고로 그가 전장에서 중상을 입고 후송 도중에 급서하게 되자(왕하23:29-30), 그의 후계자들이 모두 성군 요시야가 아니라 악한 왕 므낫세의 뒤를 따라가고 맙니다(왕하23:25-27). 또 하나는, 왕이 아무리 강력하게 명령을 내린다고 하더라도 백성들의 풍습 가운데 이미 깊숙하게 자리를 잡고 있는 우상문화가 쉽게 청산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2)  둘째로, 히스기야 왕의 통치는 그 전반기와 후반기가 대조적입니다;

1)    첫째, 유다 왕 히스기야는 그의 통치 전반기에는 우상을 제거하고 여호와의 율법을 지키고자 열심입니다(왕하18:3-6). 그 결과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을 때에는 여호와께 자신의 의로운 정책시행을 기억하시고 부디 살려 달라고 매어 달립니다(왕하20:1-3). 또한 예루살렘성을 장기간 포위공격하고 있는 앗수르 군대를 물리칠 힘이 사라져갈 때에 성전으로 들어가서 여호와 앞에 눈물을 흘리며 다윗왕조 유다 왕국을 구원해 달라고 간구합니다(왕하19:1-2, 14-19).

2)    둘째, 그러나 히스기야는 그의 통치 후반기에는 여호와의 도우심이 아니라 자신의 군사력과 강성함이 이방 강대국 앗수르를 물리쳤다고 하는 자랑에 빠져서 그만 교만하게 제멋대로 행동하고 맙니다(왕하20:12-13);

그 때문에 선지자 이사야로부터 히스기야의 교만과 세상자랑 때문에 훗날 유다 왕국이 바벨론에 의하여 망하고 말 것이라는 여호와의 책망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왕하20:16-18).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제 회개할 줄을 모릅니다. 그저 살아 있는 동안에 이 세상에서 풍요를 누리고 나라가 태평하게 되면 그것으로 자신은 만족한다는 것입니다(왕하20:19, 39:8). 그것은 여호와를 섬기는 신정국가 다윗왕조의 왕으로서는 불합격입니다. 영생과 구원의 하나님 여호와를 그저 현세적인 기복신앙의 대상으로만 인식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3)  셋째로, 결국 두가지의 기준입니다;

1)    하나는, 성군 요시야의 종교개혁이 미완에 그치게 되는 이유가 여호와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교육시키고 그 진리를 깨달아 실천하도록 하는 과정이 미흡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을 넓게 전파하고 깊이 있게 교육시키는 것이 여호와신앙을 견고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 일을 실행하는 왕이 여호와 보시기에 의로운 왕이며 그러한 노력이 없는 왕은 악한 왕입니다.

2)    또 하나는,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 위기를 당하게 되면 무엇보다도 회개하는 심정으로 여호와 앞에 나아가서 구원을 호소해야만 합니다. 그러하지 아니하고 군비를 강화하고 우방과의 동맹에만 매어 달리고 있는 것은 여호와 보시기에 악한 왕인 것입니다. 그와 같은 사례가 바로 그 통치기간이 짧은 여호아하스 왕이나 여호야긴 왕의 시대라고 하겠습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10. 너희는 죽은 자를 위하여 울지 말며, 그를 위하여 애통하지 말고, 잡혀간 자를 위하여 슬피 울라. 그는 다시 돌아와 그 고국을 보지 못할 것임이라”(22:10); 다음과 같이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10. 너희는 죽은 자를 위하여 울지 말며, 그를 위하여 애통하지 말고”(22:10a);

1)    신명기에서 모세는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이 동족들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19.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20.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30:19-20). 여호와께서는 사람들의 생사를 주장하시고 또한 축복과 저주를 주관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살아 있는 동안에 생명과 축복을 얻기 위하여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실천하여야 합니다.

2)    죽은 다음에는 선택의 기회가 사라지고 말씀의 실천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에 반드시 살아 있는 동안에 올바른 선택과 실천이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그와 같은 의미에서 여호와께서는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다윗왕조의 왕들에게 10. 너희는 죽은 자를 위하여 울지 말며, 그를 위하여 애통하지 말고”(22:10a)라고 말씀하십니다. 전란으로 죽게 되는 자들이 문제가 아니라 살아남은 자들의 미래가 더욱 문제이며 걱정거리라는 것입니다. 일단 죽고 나면 육신적인 고통이 사라지지만 죽지 못하고 적에게 포로가 되어 이방 땅에서 평생 노예로 살아가게 되면 그것이 더욱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3)    그와 같은 맥락에서 다윗의 말과 예수님의 말씀이 다음과 같습니다; “22.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거니와, 23. 지금은 죽었으니, 내가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하니라”(삼하12:22-23), “27.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 오는지라. 28.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23:27-28).  

(2)  잡혀간 자를 위하여 슬피 울라. 그는 다시 돌아와 그 고국을 보지 못할 것임이라”(22:10b);

1)    바벨론 포로기간이 얼마나 길까요? 선지자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유다 왕국의 백성들이 장차 바벨론에서 70년 동안 망국의 백성으로 포로생활을 하게 된다고 예언하고 있습니다(25:11-12). 그러므로 유다 왕국이 신바벨론의 갈대아 군대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고 그때 살아 남은 자들이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가게 되면 살아 생전에는 다시 예루살렘과 유다의 땅으로 돌아올 수가 없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22:10).

2)    결국 노예생활을 면하지 못하고 그들을 천대하고 적대시하는 이방 땅에서 평생 고생만 하다가 고통 가운데 죽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살아 있다고는 하나 죽은 것보다 훨씬 못한 운명입니다. 그와 같은 미래를 미리 알고서 여호와 앞에 빨리 두 손을 들고 죄인임을 고백하면서 나아오라는 것입니다. 부디 살려 달라고 다윗왕조의 왕과 신하들 그리고 모든 백성들이 한마음으로 부르짖을 때에 사망과 저주가 아니라 생명과 여호와의 축복이 구원으로 임하게 될 것입니다.

3)    그것은 일찍이 요나 선지자에 의하여 니느웨 성읍에서 발생한 선례가 있기에 다윗왕조의 유다 왕국에 있어서도 분명 그러한 역사가 발생할 것입니다(3:1-10). 그러나 다윗왕조의 왕들은 선지자 예레미야가 대언하고 있는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7:13, 24-26). 그들은 거짓선지자들의 달콤한 거짓 예언에 속아서 신바벨론의 갈대아 군대와 전쟁을 하더라도 자신들이 승리를 한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28:1-4, 38:1-6);

요컨대, 여호와의 말씀을 올바로 분별할 수 있는 지식과 안목이 없다는 것이 다윗왕조 유다 왕국의 비극입니다.

둘째로,11. 여호와께서 유다 왕 요시야의 아들 곧 그의 아버지 요시야를 이어 왕이 되었다가 이곳에서 나간 살룸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그가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12. 잡혀 간 곳에서 그가 거기서 죽으리니, 이 땅을 다시 보지 못하리라”(22:11-12);

(1)  유다 왕국 말기 다윗왕조의 슬픔을 대변하고 있는 왕이 성군 요시야의 뒤를 잇고 있는 여호아하스왕인데(왕하23:29-30) 그의 본명이 살룸입니다(대상3:15). 주전 609년 그는 애굽의 침략군에 의하여 폐위가 되고 애굽으로 끌려가서 그곳에서 죽게 됩니다(왕하23:34). 한때 다윗왕조의 왕이었던 살룸의 고난과 고통이 훗날 망국의 한을 품고 바벨론에서 살아가게 되는 선민 유대인들의 슬픈 운명을 미리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22:11b-12). 따라서 여호와께서는 선지자 예레미야를 다윗왕조의 왕들에게 보내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아하스 왕이 전쟁에 패하여 폐위가 되고 본명인 살룸으로 불리며 전쟁포로가 되어 애굽으로 끌려가서 고생만 하다가 그곳에서 죽게 되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 만다. 그러한 역사가 이제 전체적으로 유다 왕국의 백성들에게 임하게 될 것이다. 그 사실을 미리 알고서 빨리 회개의 마당으로 나아 오기를 바란다”(22:11-12 의역). 

(2)  신바벨론제국의 갈대아 군대의 침략으로 다윗왕조의 유다 왕국이 망하고 맙니다(왕하25:1-7). 전란에서 살아 남은 유대인들이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가게 됩니다(왕하25:7, 11). 그들이 살아서 고토로 돌아올 수가 있을까요? 본문에서 여호와께서는 그렇지가 못하다고 말씀하십니다(22:12). 그 이유는 그들이 그곳에서 바벨론 왕을 70년 동안 섬기게 되기 때문입니다(25:11). 평균연령이 40세이므로 70년의 세월이란 모두가 바벨론에서 포로로 고생을 하다가 그곳에서 뼈를 묻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뜻을 그가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12. 잡혀 간 곳에서 그가 거기서 죽으리니 이 땅을 다시 보지 못하리라”(22:11b-12)는 구절이 의미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3)  선지자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여호와께서 언급하시는 여호아하스 왕의 일대기에 대하여(22:11a) 역사적으로 좀더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성군 요시야가 전정터에 나갔다가 불의의 화살을 맞고 후송 도중에 갑자기 죽고 맙니다(왕하23:29). 중신들이 가장 똑똑한 왕자 살룸을 옹립하여 왕으로 삼습니다(대상3:15). 그가 요시야의 뒤를 잇고 있는 23세의 여호아하스 왕입니다(왕하23:30). 그는 신하들과 힘을 합하여 곧 남하할 것으로 예상이 되고 있는 애굽의 바로의 원정군을 막기 위하여 군비를 강화하고 있습니다(왕하23:31).

2)    그 소식이 애굽과 협력하고 있는 유다 왕국 내부의 세력들에 의하여 갈그미스에서 전투를 치르고 있는 애굽의 바로 느고의 귀에 신속하게 전해진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바로는 앗수르의 요새지 곧 유프라테스 강 상류에 있는 군사요충지 갈그미스를 손에 넣게 되자 쉽게 북부 시리아 지역을 차지합니다. 그는 곧바로 군사를 이끌고 유다 왕국으로 쳐들어 옵니다. 용맹한 장수들을 선봉장으로 먼저 예루살렘으로 보내어 여호아하스 왕을 압박하도록 하고 그는 유다 왕국의 동북쪽인 하맛의 립나에서 승전보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3)    그런데 성군 요시야가 갑자기 죽고 난 다음 유다 왕국의 국내사정이 복잡합니다; 다수의 중신들은 똑똑한 왕자 살룸을 여호아하스 왕으로 옹립하고 반 애굽 정책을 추진하고자 합니다(왕하23:29-30). 그러나 보수적인 친 애굽 인사들은 반발하고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유다 왕국은 애굽의 바로와 동맹관계를 확고하게 하는 것이 메소포타미아 강대국의 침략을 저지하는 최선의 방책이라는 것입니다.

4)    친 애굽주의자들은 여호아하스의 형인 엘리아김을 신왕으로 옹립하고자 합니다. 따라서 남하하는 바로의 군대에게 성문을 열어주고 여호아하스 왕을 사로잡아 립나에서 기다리고 있는 바로 느고에게 끌고 가도록 협조를 하고 맙니다(왕하23:31-33). 그 보답으로 바로 느고는 엘리아김의 이름을 여호야김으로 바꾸고 친 애굽 정권의 유다 왕으로 삼습니다(왕하23:34a). 여호야김 왕과 친 애굽 신하들은 애굽의 바로인 느고에게 많은 은금으로 감사를 표시합니다(왕하23:33, 35). 그에 따라 느고는 여호아하스 왕을 포로로 삼아 애굽으로 끌고 갑니다. 여호아하스는 살룸이란 본명으로 애굽에서 비참하게 살다가 결국 유배지에서 죽고 맙니다(왕하23:34b).

결론적으로, 다윗왕조 유다 왕국에 두가지가 결여되어 있다고 하는 것이 비극의 원인입니다;

(1)  하나는, 성군 요시야가 왕명으로 모든 우상을 파괴하고 유월절 행사를 되살리고 있지만 여호와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는 율법서를 백성들에게 공급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공부하지를 못하여 정확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알지를 못합니다. 그 결과 요시야가 갑자기 죽고 나자 악한 왕들이 줄줄이 나타나고 백성들이 그 옛날 므낫세 시대로 돌아가버리고 마는 것입니다(왕하23:25-27);

(2)  또 하나는, 여호와의 말씀을 가르치고 또한 백성들이 배우고 있지를 아니하기에 어떤 선지자의 말이 진짜 여호와의 예언이고 어느 것이 거짓 예언인지 전혀 분별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윗왕조의 왕들과 귀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결과 달콤한 거짓선지자들의 말을 좇아 신()바벨론제국과 전쟁을 하다가 나라가 망하고 선민 유대인들이 적국으로 끌려가서 죽도록 고생만 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배우고 가르치며 연구함으로써 진리와 비()진리를 구별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말씀에 기초하여 진리의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것이 올바른 복음의 전파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의 성령님의 능력으로 생명과 구원의 복을 전파하고 또한 누리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