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22년 손진길 목사 설교문

인생에 있어서 두번의 엑소더스(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10. 11. 00:48

제목; “인생에 있어서 두번의 엑소더스”(12:29-42, 9:27-36)

설교일; 주후 20221016일 주일

작성자; 손진길 목사(1011일 화요일 작성)

 

인생에 있어서는 한번이 아니고 두번의 엑소더스(Exodus) 곧 출애굽 또는 이세상에서의 해방(解放, liberation)이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한번은 살아 생전에 경험할 수 있는 엑소더스 해방입니다. 또 하나는, 죽은 다음에 경험할 수 있는 엑소더스 해방입니다. 그 차이가 다음과 같습니다;

(1)  첫번째로 살아 생전에 경험할 수 있는 엑소더스 해방은 구약 곧 성도들이 오늘날 읽고 있는 옛 언약인 구약에 벌써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은 두가지 종류로 기록이 되고 있습니다;

1)    하나는 자신의 민족이 집단적으로 타민족의 부당한 지배에서부터 하나님의 역사섭리와 신위적인 도우심으로 단번에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출애굽기 제12장에 기록되어 있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유월절 해방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해방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자손들을 다시 체포하여 노예로 삼고자 바로의 군대가 그 뒤를 추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    또 하나는, 그에 따라 홍해에서 하나님의 신위적인 능력에 의하여 또 한번의 엑소더스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홍해의 바닷물을 갈라서 양쪽에 벽처럼 세우고 큰 바람을 그 사이에 불도록 하여 바다 사이에 난 길을 완전히 마르게 하는 것입니다(14:21). 그 다음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자신들의 발로 그 새로운 길을 걸어가서 반대쪽에 다다르고 있습니다(14:22). 그 다음에는 그 바닷길로 추격하고 있는 바로의 군대를 전부 홍해에 수몰시켜 버리는 것입니다(14:23-28);

그 내용이 출애굽기 제14장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의미가 나중에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 다시 등장하고 있습니다(눅11:20).

(2)  두번째로, 사람이 죽은 다음에 경험하게 되는 엑소더스 해방에 대해서는 신약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과 3일후 무덤 속 부활의 역사를 통하여 그 이치가 무엇인지를 제자들에게 생생하게 눈으로 볼 수 있도록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미래가 자신과 제자들에게 훗날 발생하게 된다는 사실을 미리 알려주기 위하여 변화산상의 경험까지 얻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그 대목에 대한 성경말씀을 본문으로 선택하여 강해를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내용을 알기 쉽게 다른 측면에서 다시 한번 다음과 같이 설명을 드리고자 합니다;

(1)  오늘날 크리스천들이 읽고 있는 바이블은 신약과 구약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옛날 언약인 구약은 히브리경전 가운데 정경으로 인정이 된 것들입니다. 그 가운데 첫머리에 모세가 저술한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등 5경이 있습니다.  

(2)  특히 두번째의 정경인 출애굽기의 내용은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세상의 제국인 애굽에서 같은 셈족인 힉소스의 바로 시대가 끝나고 애굽인의 바로 시대가 시작되자 그때부터 120년 이상 이스라엘 자손들이 중노동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마치 애굽인의 노예와 같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창조주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아론을 선지자로 보내어 그들을 애굽의 압제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름하여 민족해방이며 그 제목이 엑소더스’(Exodus)입니다;

(3)  그런데 사람이 한평생을 살아가다가 보면 민족의 해방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적으로는 두가지 종류의 해방이 더 있습니다. 살아생전에 개인적으로 맛보는 해방이 그 하나이고 또 하나는 이 세상을 떠날 때에 맛보는 마지막 해방입니다. 궁극적인 해방을 말하자면 그것은 향년을 맞이하여 육신을 벗고 시간과 공간에 갇혀 있는 이 세상을 완전히 탈출하는 것입니다.

(4)  개인적인 해방의 선례는 구약의 경우 역시 출애굽기에서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유월절 밤을 지내고 이스라엘 민족이 한꺼번에 해방을 맞이하여 애굽을 떠나온 것으로는 완전한 구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자손들을 다시 노예로 삼기 위하여 바로의 군대가 그 뒤를 추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14:5-8).

(5)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각자 자신의 발로 홍해 가운데 여호와께서 내신 그 새로운 길을 걸어서 밤새 건너고 있습니다. 언제 바닷물이 합쳐져서 자신을 삼킬지 모르는 두렵고 어두운 길입니다. 그렇지만 오로지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여 깊은 바닷속에 난 길을 건너고 있는 것입니다.

(6)  그 결과 여호와께서는 추적하고 있는 애굽의 군대를 홍해에 수장시켜 버리십니다. 그것으로 다시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남은 평생동안 애굽의 군대를 보지 아니하는 구원의 은혜를 확실하게 얻게 되는 것입니다(14:23-31).

(7)  그와 같은 사실을 사도 바울은 그의 로마서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8:1-2).

(8)  그 점을 의사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말씀으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20.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11:20). 요컨대, 신약에 있어서는 개인적인 해방으로 볼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악한 영을 쫓아내고 하나님나라가 그 심령속에 임하여 그때부터 빛의 자녀로 살아가는 성도들의 거듭난 삶으로 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11:20);

(9)  그리고 이 세상을 탈출하여 영생의 몸을 입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 완전한 해방으로 볼 수가 있는데 그것이 이름하여 별세 또는 승천입니다(9:31, 24:51, 고전15:22-24, 46). 그와 같은 완전한 해방의 첫 열매가 영생의 부활을 얻으시고 그대로 승천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10)    그 사실을 깨닫게 된 사도 바울이 자신도 예수님이 얻으신 그 영생의 부활을 얻기 위하여 한평생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 온세상에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그리스도의 사도로 한결같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내용을 빌립보서에서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23.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24.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25.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26.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1:23-26).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3:10-14);

(11)   향년을 마친 후에 죽음에서 부활하여 영생의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제자로 남은 인생을 살아가는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하더라도 아직 육신을 입고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는 한결같이 복음을 온세상에 전파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간 제자들만이 하나님이 준비하시는 천국에서의 상급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눅22:28-30). 그와 같이 생각하면 성도들이 인생 가운데 두가지의 해방을 얻어야 합니다;

1)    하나는, 이 세상의 종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는 그리스도와 성령님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해방과 구원을 주시는 주님의 말씀과 성령님의 도우심을 의지하여 한평생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2)    또 하나는, 그러한 믿음의 길을 다 달려가게 되면 무덤에서 영생의 몸으로 부활하여 주님과 함께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적으로는 친지와의 이별을 의미하는 별세이지만(9:31) 영적으로는 이 세상의 속박을 완전히 벗어나는 영광의 순간이 됩니다(고전15:42-58).

(12)   요컨대, 사람의 자녀로 태어나서 인생 가운데 구원주 그리스도를 만나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로 영생을 누릴 수 있는 자리에 이르게 되었으니 그 은혜가 참으로 만민의 찬양을 받기에 합당합니다. 그와 같은 궁극적인 구원의 은혜를 성도들이 값없이 얻었으므로 이제부터는 그리스도의 그 사랑의 빚을 갚기 위하여 남은 인생을 바쳐서 그리스도의 복음이며 지상명령인 만민을 구원하고 해방하는 일에 주님의 제자로서 전념할 따름입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 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아울러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얻은 소중한 교훈과 메시지를 함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로, “29. 밤중에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든 처음 난 것 곧 왕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옥에 갇힌 사람의 장자까지와 가축의 처음 난 것을 다 치시매, 30. 그 밤에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모든 애굽 사람이 일어나고 애굽에 큰 부르짖음이 있었으니, 이는 그 나라에 죽임을 당하지 아니한 집이 하나도 없었음이었더라. 31. 밤에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서 이르되, 너희와 이스라엘 자손은 일어나 내 백성 가운데에서 떠나 너희의 말대로 가서 여호와를 섬기며, 32. 너희가 말한 대로 너희 양과 너희 소도 몰아가고 나를 위하여 축복하라 하며, 33. 애굽 사람들은 말하기를, 우리가 다 죽은 자가 되도다 하고 그 백성을 재촉하여 그 땅에서 속히 내보내려 하므로, 34. 그 백성이 발교되지 못한 반죽 담은 그릇을 옷에 싸서 어깨에 메니라. 35.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하여 애굽 사람에게 은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매, 36.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하사 그들이 구하는 대로 주게 하시므로 그들이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였더라”(12:29-36);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은 사람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심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역사섭리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 점을 모세가 기록하고 있는 유월절 밤의 사건으로 다음과 같이 본문에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1)  그날 밤에 여호와께서는 직접 애굽의 땅을 방문하십니다. 그 목적은 창조주의 명령을 감히 겁도 없이 외면한 애굽의 통치자 바로와 그의 신하 그리고 모든 애굽인들 가운데 여호와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백성들을 모조리 처벌하기 위한 것입니다(9:20 참조). 그 방법이 어린양의 피를 대문에 바르지 아니하고 있는 자들의 집에 죽음의 천사를 보내어 전부 장자의 죽음과 가축의 초대생의 죽음을 한꺼번에 경험하게 만드는 것입니다(29). 그러므로 여호와를 두려워하지 아니한 애굽인들은 바로와 그의 신하 그리고 미천한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전부 그 재앙을 당한 것입니다(30).

(2)  그렇지만 애굽인이라고 하더라도 여호와의 명령이 무엇인지를 미리 알고서 어린양의 피를 그 대문에 바른 자들은 그와 같은 여호와의 진노와 처벌을 면할 수가 있습니다. 그 점은 9:20에서 벌써 애굽인 가운데 여호와의 심판의 두려움을 미리 아는 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세는 출애굽기 제11장에서 자신이 여호와의 명령으로 유월절이 되기 전에 미리 바로와 그의 신하들 앞에서 마지막 재앙의 내용에 대하여 상세하게 전달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11:4-10). 그에 따라, 바로의 신민 가운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이 위와 같은 자구책을 마련하였을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평소 이스라엘 자손들을 노예로 대하지 아니하고 친구처럼 지낸 자들은 이스라엘 지인들의 호의로 그날 밤 그 집에 피신하여 전부 여호와의 재앙을 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경험을 한 애굽인과 애굽제국의 백성들이 이스라엘 자손과 함께 출애굽의 행진에 참여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38. 수많은 잡족과 양과 소와 심히 많은 가축이 그들과 함께 하였으며”(12:38);

(3)  그 밤에 여호와의 진노와 재앙을 우습게 여겼던 바로와 그의 신민들이 모조리 줄초상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다음 재앙은 장남의 죽음이 아니라 바로와 신하들 자신의 죽음이 될 것입니다(33). 그 점을 깨닫게 된 바로와 신하들은 정신이 아찔합니다. 따라서 급히 모세와 아론을 불러서 부디 동족을 데리고 애굽 바깥으로 떠나 달라고 통사정을 하고 있습니다(31). 그 이유는 재앙덩어리를 빨리 애굽 바깥으로 멀리 떠나 보내고 싶은 것입니다(33). 그리고 여호와의 진노가 바로 및 신하들 자신의 죽음으로 임하는 그것만은 면하고 싶습니다. 따라서 죽은 목숨과 같은 자신들을 여호와께서 부디 불쌍히 여기시고 살려주도록 모세와 아론에게 가축을 전부 주면서 축복의 기도를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32).

(4)  그와 같은 사건의 전개를 경험하고 있는 모세와 아론은 여호와께서 진작에 주신 예언의 말씀을 새삼 기억하게 됩니다(3:21-22). 그것은 차제에 애굽인들에게 이스라엘 자손들이 광야생활 가운데 필요한 물품들을 전부 청구하라는 것입니다(11:1-2). 그러므로 모세가 아론과 장로들에게 지시하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애굽인에게서 필요한 금은 패물과 물품들을 청구하라고 조치합니다(35). 그 결과 여호와의 역사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마치 피해의 배상금을 얻듯이 그렇게 많은 패물과 물품을 얻어서 출애굽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36). 당시에는 그 패물과 물품의 일부가 훗날 시내산 앞에서 성막을 만들 때에 사용이 되는 것인 줄 미처 모르고 있습니다(25:1-9). 그렇지만 나중에는 그냥 뜻밖에 얻게 된 불의(不意)의 재물에 대해서는 여호와의 특별한 뜻이 마치 현찰에 붙은 꼬리표처럼 담기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16:8-9);

(5)  그러므로 출애굽의 해방이라고 하는 것은 마치 기적과 같이 이 세상에 임하게 되는 하나님의 역사이며 은혜입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자손들은 미처 제대로 빵을 구울 시간도 없습니다. 떡 반죽을 발효시킬 시간조차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발효가 되지 아니한 떡 반죽을 그대로 그릇에 담아 옷에 싸서 운반하고 있습니다(34). 그것을 다음날에 그냥 구워서 먹게 되므로 결국 유교병이 아니라 무교병을 먹게 되는 것입니다(13:3). 그것이 무교절의 기원이 되고 있습니다. 그 뜻은 예기치 아니한 시간에 마치 도적과 같이 여호와께서 역사하시는 날이 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24:36-39, 1:7-8, 살전5:2). 그것이 크로노스가 아니라 카이로스의 시간 곧 여호와께서 홀로 정하신 뜻밖의 신위적인 창조의 역사가 발생하는 시간입니다(24:5-11).

둘째로, “37. 이스라엘 자손이 라암셋을 떠나서 숙곳에 이르니, 유아 외에 보행하는 장정이 60 가량이요, 38. 수많은 잡족과 양과 소와 심히 많은 가축이 그들과 함께 하였으며, 39. 그들이 애굽으로부터 가지고 나온 발교되지 못한 반죽으로 무교병을 구웠으니, 이는 그들이 애굽에서 쫓겨나므로 지체할 수 없었음이며, 아무 양식도 준비하지 못하였음이었더라. 40.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지 430년이라. 41. 430년이 끝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은즉, 42. 이 밤은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심으로 말미암아 여호와 앞에 지킬 것이니, 이는 여호와의 밤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대대로 지킬 것이니라”(12:37-42);

(1)  이스라엘 자손들이 출애굽을 한 해와 그 옛날 야곱 곧 가나안의 대 족장 이스라엘이 자손들을 이끌고 애굽으로 들어간 해는 어떻게 계산할 수가 있을까요? 그 계산의 출발점이 사실은 솔로몬대왕이 예루살렘성전을 짓기 시작하는 그 시점에 대한 다음의 기록 왕상6:1입니다; “1.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지 480이요, 솔로몬이 왕이 된 지 4 시브월 곧 둘째달에 솔로몬이 여호와를 위하여 성전 건축하기를 시작하였더라”(왕상6:1). 왕자인 솔로몬이 부친 다윗대왕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제국의 대왕으로 즉위한 시점이 대략 주전 970년경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성전을 건축하기 시작한 해는 주전 966년경이고 그때가 바로 출애굽한지 480년입니다. 그에 따라 출애굽의 해는 주전 1,446년이 됩니다.

(2)  그리고 본문 제40절과 41절에서 두차례나 야곱일행이 애굽으로 이주한지 430년이 지나서 그 자손들이 출애굽을 하게 되었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조상들이 애굽으로 이주한 해는 주전 1,876년이 되는 것입니다. 그때는 야곱의 11번째 아들인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어 있던 시절이며 애굽과 그 주변국에 발생한 7년 풍년이 끝나고 흉년이 2해나 발생하고 있던 시점입니다. 따라서 애굽의 역사로 보면 중왕국의 시대 12왕조의 노련한 바로 세누스레트2(주전 1,897-1,878)가 죽고 그의 어린 아들이 세누스레트3세로 즉위한지 2년이 된 때입니다. 당시는 전임 바로의 유언에 따라 총리 요셉이 적극적으로 어린 바로를 보필하던 시대이므로 요셉 총리의 권력이 실로 막강했습니다(45:8-9).

(3)  이스라엘 자손들이 애굽에서 430년을 지내는 동안에 그 민족의 수가 어느 정도로 번성한 것일까요? 번성의 축복은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그 옛날에 주었으며 그 다음에는 애굽으로 이주하고 있는 야곱에게도 주고 있습니다(12:2, 46:3). 그 축복에 따라 출애굽 당시에는 장정만 60만명입니다(37). 장정만큼 유아와 노인이 있으므로 남자의 경우 도합 120만명입니다. 남녀의 구성비가 비슷합니다. 그러므로 남녀노소를 모두 합하게 되면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자손의 수는 무려 240만명이나 됩니다;

 그들의 수가 많고 또한 건강하므로 군대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41). 출애굽한 자들은 이스라엘 자손들만이 아닙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러 민족이 함께 바로의 압제에서 해방을 맞이하여 애굽의 바깥으로 행진하고 있는 것입니다(38).

(4)  그 밖에 본문에서는 출애굽의 기적이란 사람의 능력이 아니라 창조주 여호와의 신위적인 역사에 의하여 불시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39. 그들이 애굽으로부터 가지고 나온 발교되지 못한 반죽으로 무교병을 구웠으니, 이는 그들이 애굽에서 쫓겨나므로 지체할 수 없었음이며, 아무 양식도 준비하지 못하였음이었더라. 42. 이 밤은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심으로 말미암아 여호와 앞에 지킬 것이니, 이는 여호와의 밤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대대로 지킬 것이니라”(12:39 & 42).

셋째로, “27.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 28. 이 말씀을 하신 후 8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29.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30.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 31.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 32.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깊이 졸다가(33:20-23 참조) 온전히 깨어나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33.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34. 이 말할 즈음에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는지라. (모세와 엘리야가)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에 그들이 무서워하더니, 35.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고, 36.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 제자들이 잠잠하여 그 본 것을 무엇이든지 그때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아니하니라”(9:27-36);

(1)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 2군데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부활의 기적을 믿는 자는 살아 생전에 그 맛을 볼 수가 있다는 다음의 말씀입니다;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11:25-26). 또 하나는,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다음 말씀입니다; “27.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9:27).

(2)  첫번째의 말씀과 관련하여,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믿고 있는 성도라고 하면 자신이 죽은 다음에 예수님처럼 영생의 몸으로 부활하여 천국에 들어가서 영생의 즐거움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사도 바울의 가르침 그대로 믿음의 소망으로 확신하고 있습니다(6:4, 8:11, 고전15:51-52). 그런데 문제는 살아 생전에 그와 같은 영생의 즐거움을 맛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의 의미가 도대체 무엇일까요? 자세하게 알 수는 없지만 단 한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는 있습니다.

(3)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생전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있고 너희도 살아있겠음이라. 20.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14:17-20).

(4)  간략하게 풀이를 해봅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보혜사 성령님께서 강림하여 성도들의 심령속에 임재하시게 되면 두가지 현상이 발생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성령님과 함께 주님과 아버지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임재하여 성도들에게 내주 역사하게 된다는 사실을 제자들이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31체 하나님의 신비가 바로 영생하시는 창조주의 비밀입니다. 그 분이 성도들과 함께 남은 인생을 살아가고 있기에 성도들은 거듭난 인생이며 영적으로 벌써 영생의 구원을 받은 자입니다. 그와 같은 확신과 즐거움 가운데 성도들은 이 세상을 이기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8:31-39);

  

(5)  두번째의 말씀27.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9:27)에 대해서는 그 다음에 풀이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을 하시고 8일 후에 예수님께서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면서 수행제자인 사도 베드로와 요한 형제를 함께 데리고 가시기 때문입니다(28). 그들 앞에서 예수님의 형체가 변하고 갑자기 산중에 하나님나라가 임하며 그리스도의 영광이 임재하고 있는 것입니다(29). 그리고 하늘로 옮기어 간 모세와 엘리야가 그 자리에 나타나고 있습니다(30). 그 모습을 보고서 3명의 제자들은 깊이 잠이 들었다가 깨어나 천국의 황홀함을 맛보고 있습니다(32).

(6)  따라서 자기도 모르게 사도 베드로가 소원하고 있습니다; “33.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9:33). 사도들은 아직 향년이 남아 있기에 죽을 때까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복음사역에 충실하게 자신들의 공생애를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사명이 남아 있기에 그곳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있는 변화산상에 마냥 머물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신실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한 취지의 말씀이 뒤를 잇고 있습니다(34-36).

(7)  그런데 오늘의 주제와 관련하여 구약의 선지자인 모세와 엘리야가 전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 다음과 같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30.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 31.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9:30-31);

그 대목은 선지자인 모세의 글과 엘리야의 기록 가운데 이 세상에 구원주로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대속의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희생의 제물로 드릴 것이며 그 다음에 창조주의 능력에 의하여 영생의 몸으로 무덤에서 부활하게 된다고 하는 사실이 벌써 예언되어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24:44-48, 32:31-34, 11:29, 18:15, 왕하2:8-18). 사실은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을 보면 그 점이 더욱 분명합니다(53).

결론적으로, 사람이 향년을 맞이하여 죽어서 이 세상을 완전히 떠난다고 하는 뜻을 지니고 있는 별세(別世)라고 하는 말은 분명히 슬프고 두려운 것입니다. 남아 있는 사람들의 심정으로 말하자면 다시는 고인을 이 세상에서 육신적으로 만날 수가 없는 것이기에 슬프고 애통한 일입니다. 그리고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기에 죽음을 맞이하는 당사자에게 있어서도 그것은 두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남은 인생을 살아가게 되면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며 다시 만날 수가 있는 소망이 그 앞에 기다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시는 마지막 당부는 그와 같은 영생의 기쁨을 믿음과 소망 가운데 누리면서 영적인 거듭난 삶을 끝까지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쁨과 소망으로 이 세상의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며 살아가라는 것입니다(16:33, 8:1-2).    

더구나 주님은 아버지 하나님께 부탁하여 보혜사 성령님을 진리의 영으로 제자들에게 보내어 주십니다(24:49). 그때부터 성도들은 성령님이 만드시는 자신의 심령 속 성전에 영적으로 주님과 아버지 하나님을 모두 모시고 함께 동행하는 거듭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14:16-20, 1:8).  

창조주이신 31체 하나님과 함께 남은 인생을 살아가고 있기에 성도들은 복음사역을 하면서 창조주의 놀라운 능력을 맛볼 수가 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나라에 대하여 이해가 깊어지고 그 깨달음을 이웃에게 전하며 동시에 하나님의 능력을 얻어서 병든 자를 고치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그와 같은 복된 성도의 삶이 저와 여러분에게 항상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