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22년 손진길 목사 설교문

사도 요한의 성령론과 사도 바울의 성령론(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9. 20. 17:02

제목; “사도 요한의 성령론과 사도 바울의 성령론”(14:16-20, 8:1-18)

설교일; 주후 2022925일 주일

작성자; 손진길 목사(920일 화요일 작성)

 

성령론과 관련하여 생각해볼 수 밖에 없는 것으로서 흔히 목회현장에서 경험하게 되는 네가지 현상 또는 혼란이 있습니다. 아주 간략하게 그 특징만 글로 적어보면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첫째, 성령께서 자신에게 직접 말씀하셨다고 주장하면서 성경말씀의 취지와는 동떨어진 말을 하고 있는 경우입니다.

둘째, 성령께서 자신에게 준 예언과 환상은 성경말씀과 같은 권위 또는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경우입니다.

셋째, 구약의 시대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말씀하셨고, 신약의 초기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하셨고, 초대교회시대 이후 오늘날은 성령님이 말씀하시는 시대라고 3분법적으로 말하고 있는 경우입니다.

넷째, 신학교에서 영성이론을 공부하였다고 말하면서 마음의 수련과 구별하기 힘든 영성생활을 주장하거나 그렇게 설명하고 있는 경우입니다.

그와 같은 혼란은 오늘날 뿐만 아니라 예수님 당시는 물론 초대교회시대에도 존재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말씀 가운데 벌써 그에 대한 처방이 기록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은 교회의 성령론의 쌍벽을 이루고 있는 사도 요한의 성령론사도 바울의 성령론이 어떠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는지를 말씀드림으로써 그와 같은 혼란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본문의 말씀을 분절하여 설명 드리기 전에 먼저 위에서 제시한 네가지 현상에 대하여 그 문제점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바로잡아야 하는지를 다음과 같이 한번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성령께서 자신에게 직접 말씀하셨다고 주장하면서 성경말씀의 취지와는 동떨어진 말을 하고 있는 경우입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수가성의 여인과 대화를 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자신의 인생 가운데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는 그때).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진리로 예배할지니라”(4:22-24). 그 뜻의 핵심을 풀이하여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난다고 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히브리경전을 기록하였으며 그것을 유대인들이 보전하고 있다고 하는 의미입니다(22). 그러므로 히브리경전에 기록되어 있는 여호와의 말씀의 뜻을 살펴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옳다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2)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경전에 기록할 수 있게 된 이유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그 경전을 기록할 수 있도록 역사하셨기 때문입니다(24).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수가성의 여인에게 그러한 사실에 유의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할 때에는 반드시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 히브리경전의 말씀을 해석하고 그 뜻에 비추어 예배를 드리는 것이 옳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3)  그와 같은 이치가 중요한 이유는 아버지 하나님이 영이시기 때문입니다(24a). 피조물인 사람들은 영이신 하나님을 육신적인 눈으로 볼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영적인 말씀 곧 경전을 지니고 있습니다(22). 그 경전은 영이신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고 만나기 위해서는 성경말씀의 도움은 물론 말씀의 의미를 밝혀 주시는 성령님의 도우심이 모두 필요합니다(24b).

(4)  그렇다고 하여 자신이 만난 성령님의 역사만 가지고 성경말씀을 함부로 해석하여 예배를 드린다고 하면 그것은 중구난방이 되기가 쉽습니다. 따라서 성령님의 역사가 이미 주어진 히브리경전의 말씀에 기초하여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교회의 역사와 전통 가운데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의 전통에 관한 공부와 성경말씀에 대한 묵상의 결과 한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가장 확실하게 예수 그리스도가 그와 같은 예배를 드리고 예배인생을 정확하게 살아가셨다는 것입니다(24:44-49, 1:17-18);

(5)  따라서 이제는 예수님의 일생과 교훈을 생각하면서 그 뒤를 따라 가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성도들의 삶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아버지 하나님을 올바로 예배하고 자신의 예배인생을 정직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 모범이 되고 있는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아야 하는 것입니다(4:23, 11:27-30, 16:24, 28:18-20, 22:28-30, 12:1-3, 고전11:1). 그와 같이 말씀풀이를 하고 보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그리스도 예수의 교훈과 생애에 비추어보지 아니하고 성령님의 역사라고 함부로 주장하는 것은 예배의 본질에서 벗어난 일종의 종교적인 방종행위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벧후3:14-18).  

둘째로, 성령께서 자신에게 준 예언과 환상은 성경말씀과 같은 권위 또는 그 이상의 비중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경우입니다. 과연 그러한 것일까요? 그것이 아님을 성경말씀이 벌써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4:11-12).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5. (세례)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1:14-16).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충만한 은혜, 그것에 만족하지 아니하고 자의적으로 성령님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직통계시를 마구잡이로 퍼트리는 행위는 구원을 받을 만한 이름을 넘어서는 위험천만한 행위라고 하겠습니다.

셋째로, 구약의 시대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말씀하셨고, 신약의 초기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하셨고, 초대교회시대 이후 오늘날은 성령님이 말씀하시는 시대라고 3분법적으로 말하고 있는 경우입니다. 근본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가 유일하신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의 정체성입니다;

 그 점을 창세기 제1장에서부터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1:26). 창세기 제3장에서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22.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3:22). 그러므로 언제나 함께 계시는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의 존재를 시대별로 똑 떼어서 그와 같이 자의적으로 말하는 것은 두가지의 잘못을 범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첫째,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거나 그것을 부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구약인 히브리경전과 신약인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벗어나서 성령님의 이름으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와 같은 거짓선지자의 목소리가 성경말씀보다 더 달콤하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한마디로, 일찍이 하나냐의 함정에 빠진 시드기야 왕과 유다 백성들의 비참한 경우와 같다고 하겠습니다(28:1-9, 39:1-10);

넷째로, 신학교에서 영성이론을 공부하였다고 말하면서 마음의 수련과 구별하기 힘든 영성생활을 주장하거나 그렇게 설명하고 있는 경우입니다. 기독교에서 말하고 있는 경건생활은 어디까지나 성경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그 뜻을 올바로 깨닫고 그것을 실천하기 위하여 능력을 달라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는 성도로서의 거룩한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일련의 과정이 없이 그저 눈만 감고서 마음의 소리를 듣고자 명상을 하는 행위는 성도의 삶과는 거리가 멀다고 하겠습니다. 참고로, 그 옛날 고대의 엣세네인들이나 중세의 수도사들도 성경말씀을 묵상하면서 경건한 생활에 매어 달린 사람들이지 결코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제 마음대로 영성수련을 한 자들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차제에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 씩 풀이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얻은 소중한 교훈과 메시지를 아울러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로,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1:14-16)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14:1-3). 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무덤에 안장이 됨으로, 19:41-42),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있고 너희도 살아있겠음이라(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제자들이 주님을 심령에 모신 영적인 삶을 살아갈 것이다, 20:17, 20, 21:18). 20.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31체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우리에게 임재하고 계심을) 너희가 알리라”(14:16-20);

(1)  사도 요한이 제4복음서를 저술한 시기는 주후 90년대초입니다. 80대의 노인인 요한은 주후 70년에 예루살렘과 유대 땅의 유대인들이 로마군대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자 소아시아 에베소로 피난을 와서 20년 이상의 세월을 지내고 있습니다. 그는 현지에 있는 초대교회를 돌보면서 그 옛날 예수님이 사도와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성령님의 오심과 그 의미에 대하여 가장 핵심적인 내용을 이 대목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가 본문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는 이유는 초대교회에 있어서 성령님이 누구신지를 잘 몰라서 혼란이 발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도 요한은 본문을 통하여 성령님의 정체와 역할이 무엇인지 그리고 성령님의 오심으로 성도들에게 어떠한 영적인 삶이 가능하게 되는지 그 본질을 설명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간략하게 풀이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2)  첫째, 성령님의 정체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주님의 요청으로 성도들에게 보내어 주시는 또다른 보혜사입니다(14:16a). 예수 그리스도가 첫번째로 오신 보혜사라고 한다면 성령님은 두번째로 오시는 보혜사입니다;

 여기서 보혜사라고 하는 말의 의미는 사도 요한이 그의 복음서 제1장에서 기록하고 있는 대목에서 벌써 알 수가 있습니다;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5. (세례)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1:14-16).

(3)  위의 1:14-16’말씀부터 간략하게 풀이를 해봅니다; 예수님의 정체는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을 주관하시던 성자 하나님 곧 독생자가 이 세상에 성육신한 것입니다(14-15). 그가 사람으로 태어나서 자랐지만 그는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의 진리가 충만한 보혜사입니다. 그의 제자들이 그 은혜를 맛보고 있습니다. 지금은 주님께서 부활하여 승천하신 이후 초대교회 시대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얻어 땅끝까지 십자가 대속의 은혜와 부활의 복음을 전파하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고 성도들에게 오시는 분이 하나님께서 보내어 주시는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 역시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를 성도들에게 전달해주시는 보혜사이십니다(16).

(4)  둘째, 사람으로 태어나신 예수님과 하나님의 영으로 성도들에게 임재하여 역사하시게 되는 성령님은 같은 보혜사이지만 큰 차이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몸을 가지신 예수님은 시공간에 갇히게 되지만 성령님은 영이시기에 시공간을 초월하여 동시에 모든 성도들에게 임재하실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2:1-4). 그리고 그 임재와 역사하심은 속성이 영원성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세례로 성도에게 임재하시면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시고 성도의 삶을 은혜와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14:16b).

(5)  셋째, 성도들에게 성령님이 임재하여 그 속사람 속에 곧 심령 속에 성전을 마련하고 계시면(고전6:19) 그 다음에 더 놀라운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14:17). 십자가에 자신을 대속의 희생제물로 바치신 예수님께서 3일후에 무덤에서 부활하시게 되면 제자들을 만나 40일 동안 하나님의 복음으로 재교육을 시키시고 감람산에서 승천하십니다. 그 다음에 성령님이 마련한 성도들의 심령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임재하십니다. 그 대목이 중요하기에 다음 두가지를 첨언하고자 합니다; 하나는, 이미 앞부분 제1-3절에서 말씀하신 내용을 여기서 반복하고 있습니다. 재차 반복하는 이유는 그것이 참으로 중요한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6)  또 하나는, 주님께서 영적으로 혼자서만 임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는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주님께서 영적으로 임재하십니다. 그 이유는 새로운 인생을 창조하고자 31체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성도들에게 임재하여 역사를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에 따라 거듭난 성도는 그리스도의 제자로 끝까지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와 같은 말씀이 본문 14:18-20의 내용입니다. 요컨대, 성령님의 임재로 말미암아 성도들은 31체 하나님과 영적으로 동행하는 거듭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거듭되는 은혜위에 은혜입니다;

  

둘째로,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11:20).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성육신, 1:14)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대속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믿고 회개함으로 칭의의 은혜를 얻고 그때부터 성도의 삶을 살아가게 되면 성화와 영화가 이루어짐)하려 하심이니라. 5.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6:3, 1:28),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8:1-8);

(1)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에 있어서 사도 바울은 사도 요한과 매우 다릅니다. 그 이유는 사도 요한은 생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스승으로 모시고 복음사역을 함께한 제자입니다. 그와 달리 사도 바울은 생전에 예수님을 만나 그 제자로 살아간 경험이 전무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어떻게 예수님을 만나서 그의 제자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이 바로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다메섹 도상에서 환상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과 형상으로 만나기 이전에는 랍비 사울입니다. 그렇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창조주의 권능과 영광 가운데 영적으로 만나게 되자 그의 신앙관이 완전히 바뀌고 맙니다;

(2)  그는 무엇보다도 유대교에서 주장하고 있는 산술적인 하나의 하나님이 아니라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 곧 31체의 신비를 지니고 계시는 유일하신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바울이 그의 성령론의 핵심인 31체 하나님의 임재와 역사하심을 증거하고 있는 것은 그후 그의 선교과정의 체험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일례를 들면, 사도 바울의 주치의 누가가 다음과 같이 사도행전에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6.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7.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8.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9. (하나님의 역사로)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16:6-9).

(3)  따라서 사도 바울은 그의 독특한 성령론을 주후 60년을 전후하여 작성한 그의 서신서에 담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집중적인 설명이 본문 로마서 제8장에서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1)    첫째,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이미 부활하여 승천하신 주님을 하나님의 영광과 형상으로 만난 영적인 체험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후 그가 부활하신 주님의 종이며 사도로 헌신하고 있는 동안에 주님께서 이 세상에서 승리하신 그 역사적인 진리가 성령님의 임재로 자신에게 의제가 되고 있음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이 본문에서 자신 있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8:1-2);

2)    간략하게 풀이를 해봅니다; 악한 영들은 성도들을 죄와 사망의 길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그와 달리 바울에게 임재하고 계시는 성령님은 영적으로 바울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미 무덤에서 부활하셨기에 영적으로 주님을 모시고 그 제자로 살아가고 있는 사도 바울은 생명의 나라 곧 하나님의 나라에 살고 있다고 하는 영적인 체험이 풍성한 것입니다. 그 점은 의사 누가가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것과 맥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20.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11:20).

3)    둘째, 사도 바울은 영적으로 정직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저술인 로마서 제7장에서 고백하기를 자신의 속사람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며 주님의 제자로 신실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열망이 있지만 자신의 겉사람은 여전히 육신적인 탐욕과 죄성에 젖어 있어 기어코 바울 자신을 죄가운데로 끌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부르짖고 있습니다. 부디 주님께서 성령님과 함께 바울 자신을 영적으로 승리할 수 있도록 만들어 달라는 것입니다. 그 기도가 응답이 되고 있습니다. 그 결과 바울은 다음과 같이 하나님께 찬송을 드리며 성도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성육신, 1:14)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대속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믿고 회개함으로 칭의의 은혜를 얻고 그때부터 성도의 삶을 살아가게 되면 성화와 영화가 이루어짐)하려 하심이니라”(8:3-4). 주님의 대속의 은혜와 부활의 은혜를 힘입어 사도 바울에게 칭의의 은혜가 주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4)    바울의 기록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5.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8:5-6). 사도 바울이 이 세상을 이기는 성도의 비결을 하나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처럼 언제나 자신에게 맡기신 아버지 하나님의 뜻과 사명만을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인생은 그것을 성취하기 위하여 주어진 것입니다. 세상적인 쾌락과 영광을 누리기 위하여 주어진 인생이 결단코 아닙니다. 그 결과 바울은 영적인 생명과 평안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5)    바울이 나름대로 소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6:3, 1:28),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8:1-8). 사도 바울도 때로는 육신적인 생각에 빠져서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소홀히 감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한 경우에는 자신에게 주어진 영적인 평안이 사라지고 생명력이 쇠퇴하고 맙니다. 따라서 바울은 즉시 자신의 고집과 세상적인 안일함을 버리고 주님께 다시 간구합니다. 부디 아버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인생으로 다시 만들어 달라는 것입니다. 그 기도가 있기에 바울이 사도의 길을 끝까지 달려갈 수가 있습니다;

   

셋째로,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성도, 크리스천, 11:26)이 아니라. 10.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주님의 영으로 임재, 16:6-7)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성부 하나님)의 영(창조주 하나님 아버지의 영, 1:1-2)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예수님처럼 영생의 몸으로, 고전15:23, 44, 3:10-11) 살리시리라(6:4-5). 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16.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1:12-13), 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22:28-30),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18. 생각하건대, 현재의 (이 몸의)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생의 몸의)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8:9-18); 사도 바울의 성령론의 핵심을 잘 설명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그 내용이 다음과 같습니다;

(1)  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성도, 크리스천, 11:26)이 아니라”(8:9-10). 교회의 성도는 그리스도의 사람이므로 영어로 크리스천’(Christian)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 의미가 영적으로 그 심령속에 성령님께서 성전을 마련하시고 그 안에 하나님의 영과 그리스도의 영이 임재하여 계시기 때문에 거룩한 성도라고 불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참고로, 사도 바울이 안디옥 교회에서 성경선생으로 사역하고 있는 동안에 그 교회의 성도들을 지역주민들이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의사 누가가 사도행전 제1126절에서 기록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2)   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성부 하나님)의 영(창조주 하나님 아버지의 영, 1:1-2)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예수님처럼 영생의 몸으로, 고전15:23, 44, 3:10-11) 살리시리라(6:4-5)”(8:11). 성도가 성령의 세례를 받게 되면 두가지의 경험을 하게 된다고 사도 바울이 그의 로마서 제64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합하여 성도가 영적으로 함께 죽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예수님의 부활하심과 더불어 성도가 영적으로 함께 부활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부활이 확실하다는 사실을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을 무덤에서 살리신 아버지 하나님의 영이 성도들에게 이미 임재하여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활의 영을 모시고 살아가는 성도에게 부활의 역사가 없을 수가 없습니다.

(3)  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8:12-15). 예수님께서는 생전에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35. 종은 영원히 (주인의)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아버지의 집에) 거하나니”(8:35). 그러므로 부활하신 주님께서 아버지를 모시고 영적으로 성도들에게 임재하여 계신다고 하는 의미는 성도들이 벌써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14). 그 점을 강조하기 위하여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양자의 영이 성령님 안에서 성도들에게 임재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8:15a). 따라서 성도들이 아바 아버지라고 아버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개인적으로 기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8:15b). 성도들이 아버지 하나님께 가장 먼저 기도하여야 하는 요청의 내용이 무엇일까요? 사도 바울은 부디 남은 인생을 하나님의 아들 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달라고 하는 기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기도가 있기에 8:12-15의 역사가 언제나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4)  16.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1:12-13), 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22:28-30),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18. 생각하건대, 현재의 (이 몸의)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생의 몸의)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8:16-18). 성도에게 31체 하나님이 영적으로 임재하여 빛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 자녀의 특권이라고 보면 그 이면에서는 하나의 의무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 것이 예수님이 부활의 영광을 얻기 전에 대속의 십자가를 지신 것과 같이 성도들이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복음을 땅끝까지 전파하기 위하여 사도 바울처럼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로서 고난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남은 인생 가운데는 고난의 길을 걸어가지만 그 마지막은 영생의 부활이라는 놀라운 영광이 천국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 점을 예수님께서는 진작에 사도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28.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한 자들인즉, 29.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30.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12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22:28-30).

결론적으로, 예수님이 공생애를 살아가시면서 제자들과 함께 복음사역을 하실 때에 12사도의 하나가 사도 요한입니다. 그가 주후 90년대초에 제4복음서를 기록하면서 자신이 깨닫고 있는 성령론을 요한복음 제14장 제16-20절에서 중점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그 주내용은 성도들에게 성령님이 내주하시게 되면 부활 승천하신 주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영적으로 임재하여 성도의 삶을 승리의 삶으로 살아가게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과는 달리 사도 바울은 본래 랍비 사울이며 생전의 예수님을 따라다닌 제자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배척하는데 앞장을 선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환상 가운데 부활 승천하신 주님을 하나님의 영광과 형상으로 만나게 됨으로써 그의 신관과 성령론이 완전히 변하고 맙니다.

그 점을 사도 바울은 로마서 제8장에서 집중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주내용은 주님께서 부활하셨기에 성도들에게 성령님이 내주하여 생명과 부활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령님과 더불어 그리스도의 영과 하나님의 부활의 영이 함께 임재하여 역사하고 있기에 성도들은 영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에 따라 성도들은 한가지 의무를 지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고난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결론적으로 남은 인생 가운데 그 고난의 길은 짧지만 미래에 성도들이 맞이하게 되는 영생의 영광은 영원한 것이며 놀라운 상급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점을 명심하면서 끝까지 하나님의 자녀 답게 그리고 그리스도의 제자 답게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모두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