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22년 손진길 목사 설교문

믿음의 문제와 종의 자세(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9. 5. 14:01

제목; “믿음의 문제와 종의 자세”(17:3-10)

설교일; 주후 2022911일 주일

작성자; 손진길 목사(95일 월요일 작성)

 

의사 누가는 예루살렘에서 초대교회가 시작된 이후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가 된 인물로 보입니다. 그런데 누가의 경력이 특이합니다. 그는 젊은 시절 시리아 안디옥에 있는 로마총독부에서 모종의 특수교육을 받고 조상들의 땅 가나안으로 파견이 된 사람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누가가 젊은 시절 시리아의 정보기관으로부터 받은 교육은 크게 보아 세가지로 추정이 됩니다;

첫째, 히브리어 뿐만 아니라 헬라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또한 기록할 수 있는 언어 교육입니다. 따라서 의사 누가는 훗날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과 교훈을 헬라어로 기록하여 제3복음서를 남기고 있습니다(1:1-4);

둘째, 직접 발로 뛰면서 유대인사회에서 정보를 수집하여 그것을 분석한 후에 시리아의 로마총독부에 있는 직속상관에게 정기적으로 보고서를 제출하는 능력자가 누가입니다. 그러한 정보가 필요한 이유는 시리아의 로마총독부가 당시 유대 땅을 다스리고 있는 로마총독을 감독하는 상급기관이기 때문입니다(1:3).

셋째, 유대인사회에서 자유스럽게 활동할 수 있도록 의사라는 전문직 교육을 사전에 받은 것입니다. 누가는 의사이기 때문에 훗날 서방선교에 나서고 있는 사도 바울과 동행하면서 그의 주치의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한 그의 선교경험이 초대교회의 역사서인 사도행전을 탄생시키고 있는 것입니다(1:1-5);

초대교회의 역사에 있어서 그와 같은 놀라운 공헌을 한 바가 있는 의사 누가입니다. 그러나 그는 대속의 십자가를 홀로 지셨으며 무덤에서 3일만에 영생의 몸으로 부활하여 천국에 들어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인으로 모시면서 주님과 비교할 때 자신은 참으로 비루하고도 무익한 종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본문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17:10).

의사 누가가 그와 같이 고백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요? 그 내용이 오늘의 본문말씀(17:3-10) 가운데 다음과 같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첫째, 계속 반복적으로 잘못을 범하고 있는 형제를 그가 회개하는 경우에는 끝까지 포용하고 용서해줄 수 있는 능력이 주님에게 있는 것이지 인간인 자신에게는 없기 때문입니다(17:3-4).

둘째, 그와 같은 용서의 능력은 주님께서 제자인 자신에게 믿음을 더해주시면 가능할 것으로 판단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17:5-6).

셋째, 그렇다면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일까요? 그 점에 관하여 의사 누가가 예수님께서 생전에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한가지 비유의 말씀을 수집하여 그 내용을 분석하면서 다음과 같이 답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명령대로 실천하였다고 하여 자신을 위대한 종이라고 자랑하고 있는 자들은 주님의 올바른 제자가 아니다. 진정으로 주님의 칭찬을 받을 수 있는 믿음의 종은 자신이 창조주 앞에 서게 되면 매우 하찮은 존재이며 무익한 존재라는 사실을 가장 먼저 인정하면서 그 앞에서 겸손하게 종의 자리에 서서 끝까지 주님을 섬길 수 있는 자이다”(17:7-10의역).

그와 같은 의사 누가의 기록은 훗날 사도 요한이 그의 복음서에서 기록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세례 요한의 초기의 신앙고백과 같은 맥락의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참고로, 세례 요한의 언급을 찾아서 적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26. (세례)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27.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예수 그리스도)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하더라”(1:26-27). 창조주의 위격을 지니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피조물인 세례 요한의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은 창조주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할 수가 없는 하찮은 종에 불과한 것입니다.

(2)  29. 이튿날 (세례)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30.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그가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예수 그리스도)을 가리킴이라”(1:29-30). 하나님의 아들이며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만민의 속죄를 위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실 수가 있습니다. 그와 같은 구원사역을 이루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주로서의 선재성(先在性, pre-existence)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 분에 비하면 세례 요한은 하나의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3)  “29. 신부(교회와 성도, 21:2)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30. (나사렛 예수)는 흥하여야 하겠고, (세례 요한)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3:29-30). 만민을 구원하고 천국으로 인도하여 영생의 구원을 줄 수 있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나사렛 예수의 구원사역은 승리의 역사이며 그 종의 헌신은 주님의 승리를 얻는데 보탬이 되면 그것으로 흡족하다는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 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묵상하여 얻은 소중한 교훈과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로,3.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4. 만일 하루에 7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7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니라”(17:3-4);

(1)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형제는 두가지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3b); 하나는, 친형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성도들은 모두가 같은 주님을 모시고 있기에 믿음의 공동체에서 서로 형제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형제가 죄를 범하는 것을 보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냥 지켜보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주님의 말씀에 비추어 경고를 해야 합니다(3c). 그 경고를 받아 들이고 회개를 하는 경우에는 즉시 용서를 해야 합니다(3d). 그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요?

(2)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모든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를 믿고 자신의 죄를 회개함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칭의의 은혜를 얻은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을 항상 잊어버리지 말고 명심하라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우선적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3.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3a). 요컨대, 죄인 출신이 죄인을 용서하지 아니하게 되면 여호와 하나님의 탕감의 은혜는 헛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18:32-35, 일만 달란트 탕감을 받은 자의 잘못된 행위).

(3)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제가 잘못된 행위를 다시 범하고 있습니다. 그때마다 뒤늦게 자신의 과오와 잘못을 깨닫고 회개를 하면서 용서를 구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일이 만약 하루에 7차례나 반복이 되고 있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상습범의 행위이므로 가중처벌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러한 형제조차 너희는 만약 회개를 한다면 거듭 용서를 해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4).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4) 한마디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얻은 십자가 대속의 은혜가 도저히 갚은 길이 없는 엄청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벌에 처해질 수 밖에 없는 굉장한 죄인인 우리가 주님의 대속의 십자가 희생을 믿고 회개하였더니 칭의의 은혜를 얻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이 일만 달란트의 탕감을 받은 우리가 어찌 형제의 백 데나리온의 잘못을 계속하여 용서하지 아니할 수가 있겠습니까?(18:27-35);

둘째로, “5.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6.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 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17:5-6);

(1) 예수님은 많은 제자들에게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다음에 나중에는 12사도를 모아 놓고 더 깊숙한 의미를 설명하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예수님이 사도들과 나누시는 대화를 의사 누가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내용이 그날 많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관련이 되고 있습니다. 비록 형제의 잘못을 그가 회개하는 경우에는 무한 반복적으로 용서하여 주라고 스승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지만 사도들은 인간적으로 그렇게 행동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사도들 중의 일부가 스승에게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이 계속적으로 형제의 잘못을 용서할 수 있는 큰 믿음을 저희에게 주십시오”(5절 말씀에 대한 의역).

(2) 사도들의 요청에 대하여 예수님은 그것은 믿음의 분량의 문제가 아니라(6) 본질적으로 성도들의 종의 자세에 대한 문제라고 설명하십니다(7-10);

구원의 은혜를 주시는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과 대속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 똑바로 서서 자신이 엄청난 죄인이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고백하고 용서함을 받고서 남은 인생을 오로지 주님의 종으로 끝까지 살아가고 있는 성도라고 한다면 그러한 신실한 종에게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놀라운 믿음의 능력을 더하여 주지 아니하실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9:1-6). 그 대목은 예수님의 달란트의 비유’(25:14-46) 또는 므나의 비유’(19:11-17)에서도 동일하게 찾아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7.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8.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 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9.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 할지니라”(17:7-10);

(1) 그 대목이 중요하기 때문에 예수님은 알기 쉽게 비유의 말씀으로 사도들에게 설명하고 계십니다. 그 내용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종에게는 크게 보아 두가지의 일이 있습니다. 하나는, 바깥에서 생산활동에 종사하는 것입니다(7). 또 하나는, 집안에서 주인의 수발을 드는 일입니다(8). 그 두가지의 일은 종이 당연히 해야만 하는 책무이기에 그 수행에 대하여 주인이 칭찬하거나 감사할 필요가 없습니다(9).

(2) 둘째, 하루 종일 바깥에서 생산활동을 하고 집에 돌아온 종이 주인처럼 편하게 밥상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아직 집안에서 주인을 섬기는 일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식사를 하고 있는 주인의 시중을 끝까지 들어야만 합니다(8a). 셋째, 주인이 식사가 끝난 다음에야 종들에게 식사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집니다(8b). 그때 종들이 자신의 노예 신세를 한탄할 수가 있을까요?

(3) 혹은 자신의 헌신과 봉사를 칭찬하거나 감사하지 아니하고 있는 주인을 원망할 수가 있을까요? 예수님의 말씀은 그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요? 의사 누가는 자신이 수집한 자료에 의거하여 두가지 이유를 기록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하나는 당연히 하여야 할 일을 행한 것이기에 그것은 사람들이 스스로 자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10b). 또 하나는, “성도들 모두가 주님 앞에서 무익한 종이기 때문입니다”(10a);

(4) 여기서 무익한 종은 헬라어로 보면, ‘둘로스 아크레이오이’(δολος χρεοί)입니다. 그런데 그 헬라어의 정확한 의미는 히브리어에서 찾아보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히브리어를 살펴보면 삼상2:12절에서 벨리야알’(בְלִיָּ֑עַל)이라는 용어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의미가 세가지나 됩니다; 첫째, 무가치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별로 쓸모가 없습니다. 둘째, 비루하다는 것입니다. 비천한 행동을 하며 천대를 받을 만하다는 의미입니다. 셋째, 죄인 출신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벨리야알이 때로는 사탄과 통하는 의미로도 사용이 되고 있습니다.

(5) 점을 참조하면 누가복음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무익한 본래의 의미가 히브리어 비루한 말하고 있는 벨리야알 에베드’(בְלִיָּ֑עַל עַבְדֶּֽךָ)에서 비롯되고 있다고 있습니다. 그렇게 의미를 파악하게 되면 어렵지 아니하게 다음 세가지 점을 말할 수가 있습니다;

1)      첫째, 주님의 종은 창조주이신 그리스도와 비교할 때 그 신분이 피조물이며 가장 하찮은 존재에 불과합니다(18:27, 41:14).

2)      둘째, 비루한 존재일 뿐만 아니라 인간은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올바로 행하지 못한 죄인입니다(7:18-19). 그러므로 감히 그 앞에 설 수도 없는 존재입니다.

3)      셋째,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의 은혜로 의인삼아 주셨으므로 남은 인생을 오로지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끝까지 신실하게 헌신할 따름입니다(16:24). 그것이 올바른 주님의 종인 둘로스’(δολος)의 의무이자 책무인 것입니다.

(6)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는 사도 바울이(1:1) 그와 같은 자신의 진면목을 로마서와 디모데전서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7:22-24). “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도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5);

(7) 사도 바울의 깨달음은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지적과 동일한 것입니다; “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45.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8:44-45).

결론적으로, 성도들이 주님의 제자로 한평생 살아가면서 불평과 불만에 사로잡힐 때가 많습니다. 자신의 공로와 헌신이 크게 보이며 상대방의 허물이 또한 크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교회안에서 또는 성도들 사이에서 갈등과 분란이 많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무익한 종이라고 스스로 고백해야 한다고 강조하십니다. 그 이유는 도저히 씻을 수가 없는 죄악을 범한 우리가 하나님의 독생자의 대속의 십자가 은혜로 말미암아 겨우 사면을 받고 의인으로 칭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이 히브리어로 보면 비루한 종이라고 하는 벨리야알 에베드에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헬라어로 보면, ‘무익한 종이라고 하는 둘로스 아크레이오이에는 그 일부만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제부터는 죄인에서 겨우 의인으로 간주가 되고 있는 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서 히브리어 벨리야알 에베드를 암송하면서 지성으로 주님을 모시고 그 명령을 수행하기에 보다 헌신해야 하며 회개하는 형제들에게 언제나 포용력과 용서함을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아무쪼록 깊은 깨달음과 실천이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