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22년 손진길 목사 설교문

베드로의 칼과 예수님의 잔(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5. 10. 11:19

제목; “베드로의 칼과 예수님의 잔”(18:1-11)

설교일; 주후 2022515일 주일

작성자; 손진길 목사(510일 화요일 작성)

 

이 글을 작성하고 있는 오늘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날입니다. 역사의 분기점을 지나 또 하나의 갈림길에 접어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제 주후 202259일에는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이 5년 단임 대통령 임기를 청와대에서 마감하고 야인으로 돌아갔습니다;

그것을 보고서 매스컴에서는 이제 청와대 시대가 끝났다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그 대신에 새로운 용산 시대가 시작되고 있다고 선전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가 5년의 임기를 시작하게 되는데 그 집무실이 청와대가 아니고 용산에 있는 건물이기 때문입니다.

노태우 시대부터 대통령 당선자는 문민정부의 취지에 맞게 민의의 전당인 여의도 국회에서 취임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윤석열 당선자도 국회에서 취임식을 가질 예정입니다. 그 다음 그는 곧바로 용산으로 이동하여 국방부 청사에 급히 마련한 대통령 집무실에 들어가서 직무를 수행할 것이라고 보도가 되고 있습니다;

서울 4대문 바깥에 자리를 잡고 있는 용산은 역사적으로 두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는, 구한말에 제멋대로 한양으로 들어온 일본의 군대가 용산에 주둔하고 있으면서 조선의 주권을 침탈하는 무력행사를 한 것입니다;

 또 하나는, 해방이 되었지만 그 지역에 주한 미군 사령부가 오래 자리를 잡고 있었으며 그 옆에 한국의 국방부가 또한 위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용산의 역사적인 이미지는 한마디로, ‘칼의 문화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제 그곳에서 한국의 대통령이 새로운 통치를 시작하겠다고 하니 그것은 좋게 말하자면, 대내외적으로 미국의 핵에 한국의 칼을 더하여 자유 한국을 확실하게 수호하겠다는 결의를 다지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시기가 국제적으로 참으로 미묘합니다. 왜냐하면, 세계적으로 제2의 군사대국이라고 자부하고 있는 러시아가 자국에 비하여 그 국방력이 10분의 1에 불과하다고 알려지고 있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여 2달하고도 열흘이 넘도록 아직도 전쟁을 끝내지 못하고 있는 그러한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핵 강대국인 러시아가 유엔에서 여전히 거부권을 행사하고 있으므로 완전히 패전하지는 아니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경제적으로는 국가의 존망이 위태로운 처지가 될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중국에 적극적인 도움을 호소하고 있지만 그 반응이 아직은 불분명한 상태입니다. 중국 역시 미국과의 혹독한 경쟁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시대를 맞이하여 요한복음 제18장에 기록되어 있는 본문의 내용을 다시 한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체포하고자 한밤중에 불법으로 쳐들어오고 있는 무리들에게 베드로가 스승을 지키고자 정당방위에 입각하여 자신의 칼을 휘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결코 창조주 하나님의 만민구원의 뜻을 이루는 방법이 아니라고 하는 예수님의 날카로운 지적을 받고 있습니다. 어째서 그런 것일까요? 그 이유는 한마디로, 칼로서는 한동안 굴종의 역사를 만들어낼 수는 있지만 그것이 결코 상생의 역사를 만들어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 정복자의 칼은 피정복민을 베고 굴복시키는데 효과적으로 사용이 되어 처음에는 그 열매가 달콤합니다. 그렇지만 나중에는 그 피의 값이 자신에게 돌아오는 창조주 하나님의 역사섭리를 반드시 맞이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4:10-12).

유대인들의 역사가 그 점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다윗왕조 유다왕국을 정복한 신바벨론제국, 그 뒤를 이어 유대 땅과 유대인들을 지배하고 있는 페르시아제국과 헬라제국, 그리고 로마제국이 모두 역사 가운데 종적을 감추고 말았습니다.

주전 8세기 후반에 북조 이스라엘 왕국을 정복한 앗수르제국을 포함하여 말하자면 주전 722년부터 주후 476년까지 12백년의 역사가 진행되는 과정에 그토록 강력했던 5개의 제국이 전부 사라지고 만 것입니다. 

그러한 역사적인 사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 씩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 결과 깨달은 내용을 함께 말씀 드리겠습니다;

첫째로,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으로 나가시니, 그곳에 (겟세마네, 14:32, 26:36) 동산(감람산, 22:39)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니라. 2. 그곳은 가끔 예수께서 제자들과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곳을 알더라. 3. 유다가 군대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18:1-3); 다음과 같이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1)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으로 나가시니, 그곳에 (겟세마네, 14:32, 26:36) 동산(감람산, 22:39)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니라. 2. 그곳은 가끔 예수께서 제자들과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곳을 알더라”(18:1-2);

1)    예루살렘성은 해발 평균 780m의 고지대에 자리를 잡고 있는 일종의 분지입니다. 그런데 북면을 제외하고 동과 서 그리고 남쪽이 전부 벼랑입니다. 그리고 골짜기 반대쪽에는 산지가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러한 지형이므로 도성인 예루살렘은 천혜의 요새인 것입니다;

2)    그 가운데 동쪽 골짜기의 이름이 기드론입니다(18:1a). 동쪽 비탈에 샘물이 있기에 특별히 기드론 시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 건너편에 산이 있는데 그 이름이 감람산입니다(22:39). 그것을 동산이라고 부르고 있는 이유가 둘입니다; 하나는, 예루살렘보다 높지 아니한 산지이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그곳에 감람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기 때문입니다(18:1b). 따라서 의사 누가는 감람원이라고도 부르고 있습니다(21:37);

3)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특별히 그곳을 겟세마네 동산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14:32, 26:36). 그 이유는 감람산에서 올리브를 수확하여 농부들이 그곳에서 올리브유를 제조했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겟세마네는 히브리어 단어 גת (누르다) 셰맨의 복수 שמנים (오일들)을 합성하여 만든 용어입니다. 그 이미지가 묘하게도 그곳에서 피땀을 흘리면서 간절하게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과 닮아 있습니다(22:44);

4)    예수님 일행은 낮에는 예루살렘 성안에서 복음사역을 하시지만 오후 늦게 기드론 골짜기를 건너 감람산 남쪽에 자리잡고 있는 베다니 나사로의 집으로 돌아오십니다. 그 이유는 도성에는 물가가 비싸지만 교외지역 베다니 마을 민박집에서는 숙박비가 저렴하기 때문입니다. 저녁식사를 마치시면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동산에 올라와서 기도시간을 가지고 계십니다(18:2a). 복음사역을 위해서는 말씀공부와 기도시간이 모두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재정을 담당하고 있는 가룟 유다도 그 기도모임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내부고발자가 되고 있는 유다가 예수님의 기도 장소를 잘 알고서 그곳으로 체포조를 이끌고 오는 것입니다(2-3).

(2)  3. 유다가 군대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18:3);

1)    배신자인 가룟 유다를 앞장세워 예수님을 은밀하게 체포하고자 달려오고 있는 무장세력의 정체를 사도 요한이 다음과 같이 적시하고 있습니다; 첫째가, 로마의 군인들입니다. 둘째가, 대제사장인 가야바와 전임 대제사장이며 유대교의 실세인 안나스가 거느리고 있는 사병들입니다. 셋째가, 바리새인이 참여하고 있는 산헤드린 대공회에 소속이 되어 있는 경비원들입니다(3);

2)    그 가운데 공식적인 산헤드린 대공회의 경비원들은 유대교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있다고 여겨지는 나사렛 예수를 체포하고자 출동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정당한 종교재판을 위한 무력의 행사입니다. 그렇지만 외세인 로마의 군대를 동원하는 것과 유대교 실세들이 개인적으로 사병을 동원하고 있는 것은 불법행위라고 하겠습니다. 그 점을 제4복음서를 저술하면서 사도 요한이 은근히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4.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이르시되,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5.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섰더라. 6.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니라 하실 때에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7. 이에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대 그들이 말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가 그니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을 용납하라 하시니”(18:4-8); 역시 다음과 같이 나누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4.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이르시되,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5.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섰더라”(18:4-5);

1)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무덤에서 부활하신 후에 비로소 사전에 3번이나 스승님이 십자가 대속의 죽으심에 대하여 예언하신 사실을 확실하게 기억하게 됩니다(8:31, 9:31, 10:33). 그로 미루어 보아 예수님은 벌써 자신이 언제 불법적으로 체포를 당하여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게 되는지 잘 알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점을 사도 요한이 여기서 다시 한번 기록하고 있습니다; “4.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이르시되,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18:4).

2)    내부고발자인 가룟 유다가 대제사장이 보낸 무리들을 이끌고 밤중에 예수님을 체포하고자 앞장서고 있는데 그의 역할이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그날 밤 감람산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처소로 체포조를 안내하기 위한 것입니다(3-4). 또 하나는, 한밤중에 제자들과 함께 섞여 있는 예수님을 정확하게 찾아내어 체포조에게 알려주기 위한 것입니다;

3)    공관복음에서는 가룟 유다가 스승에게 입을 맞추는 것을 보고서 체포조가 당사자를 식별하고 있습니다(26:48-49, 14:44-45, 22:48). 그러나 사도 요한은 달리 기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가 행동하기 전에 벌써 자신의 신분을 스스로 드러내셨다는 것입니다; “5.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섰더라”(18:5);

(2)  6.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니라 하실 때에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18:6);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들이 창조주인 하나님의 아들을 체포하겠다고 야밤중에 우루루 무장을 하고서 달려오는 것이 볼썽 사나운 모양새입니다. 더구나 피조물이 창조주의 독생자의 영광을 지니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체포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1:14-18). 따라서 예수님께서 자신의 정체성을 한번 드러내시자 무리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뒤로 물러서다가 마침내 하나같이 쓰러지고 있습니다(18:6).  

(3)  7. 이에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대 그들이 말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가 그니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을 용납하라 하시니”(18:7-8);

1)    그렇게 나약한 인간들이 어떻게 창조주의 영광을 보여주고 계시는 예수님을 체포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아버지 하나님의 시나리오는 그리스도가 그날 밤 체포를 당하고 다음날 대속의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독생자의 영광을 거두어들이십니다. 그 다음에 다시 그들과 대화를 시도하십니다; “7. 이에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대 그들이 말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18:7).

2)    이제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그들 체포조에게 자신의 몸을 맡겨야 하는 시간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안전을 염려하여 한가지 타협안을 제시하고 계십니다; “내가 너희들에게 순순히 체포를 당할 것이니 그 대신에 내 제자들에게는 피신할 수 있도록 시간을 달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체포를 당하지 아니할 것이다”(18:8의역). 예수님의 신적인 위력을 체험한 바 있는 그들 체포조가 순순히 타협안에 응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9.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만민구원과 영생구원, 6:39)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10. 이에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졌는데, 그것을 빼어 (전임) 대제사장(안나스, 18:13)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11.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18:9-11);

(1)  9절 말씀에 대한 해석이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맡기신 사명은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이라는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을 실현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스스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는 그의 제자라고 하더라도 도저히 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날 밤 체포를 당하지 아니하고 처형장에 끌려가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들 제자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살려주는 대신에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는 것입니다(6:39).

(2)  또 하나는, 만민 구원이란 예수님의 제자들 만을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체포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 곧 복음적인 진리를 전혀 모르고 그날 밤 우루루 몰려오고 있는 그 불쌍한 무리들에게도 구원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 밤 칼을 지니고 있는 제자인 베드로가 자신의 칼을 빼어 용감하게 체포조의 한 사람 말고의 귀를 베어버리고 있습니다(10);

 참고로, 사도 요한의 집안이 전임 대제사장 안나스의 집안과 친한 사이이므로 요한이 말고의 이름까지 그의 복음서에 기록하고 있습니다(18:15). 그것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말고의 귀를 치유하여 주십니다(22:51). 그 대목은 안나스의 종인 말고 역시 구원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3)  사도 요한이 생략하고 있는 그 대목에 대하여 그 직업이 의사인 누가가 자신의 관심을 반영하여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50. 그 중의 한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오른 쪽 귀를 떨어뜨린지라. 51. 예수께서 일러 이르시되,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22:50-51). 스승이신 예수님을 끝까지 호위하고 있는 제자가 사도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베드로입니다(17:1, 26:36-38). 그 가운데 2사람 야고보와 베드로가 칼을 호신용으로 지니고 있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누가복음 제22장 제50절에서는 그 중의 한사람이라는 표현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4)  10-11절 말씀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   첫째,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시자마자 그 순간 체포조가 우루루 쓰러지는 광경을 목격하고 있습니다(6). 따라서 자신이 검을 빼어 그들을 용감하게 상대하면 예수님께서는 그의 뒤를 보아주실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10). 하지만 그의 예상이 빗나가고 맙니다. 스승 예수님의 꾸지람이 뒤따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52.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26:52).

2)   둘째,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 곧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위해서는 칼이 아니라 대속의 잔을 마시는 것이 옳다고 말씀하십니다(11). 그 점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 사도 마태의 글입니다; “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12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54.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니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26:53-54). 만민구원을 위하여 속죄양이 되어야 하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주전 7세기 초에 이사야 선지자가 벌써 예언하고 있습니다;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53:5-6);

3)   셋째, 그 점을 예수님보다 반년 먼저 복음사역을 시작한 세례 요한이 제자들에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29. 이튿날 (세례)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 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30.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선재성 곧 창조주라는 의미임)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1:29-30);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길을 열기 위하여 하나님의 독생자가 성육신하여 대속의 십자가라는 쓴 잔을 마시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야 하는 성도들도 칼이 아니라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삶”(16:24)을 살아가야 합니다. 베드로의 칼이 아니라 예수님의 쓴 잔을 마시는 것 그것이 한마디로 제자도인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오늘날까지 이기주의와 집단이기주의에 물들어 있는 세상사람들과 그들의 나라는 칼로써 쉽게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죄악의 악순환만을 초래할 따름입니다. 그에 따라 창조주 하나님의 역사심판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그 점을 선지자 예레미야가 웅변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25:29).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제자인 성도들은 예수님이 마신 대속의 잔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내려놓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서 신실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길입니다. 아무쪼록 그와 같은 진실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