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22년 손진길 목사 설교문

거듭난 성도와 알바트로스(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4. 18. 08:58

제목; “거듭난 성도와 알바트로스”(3:1-12)

설교일; 주후 2022424일 주일

작성자; 손진길 목사(418Easter Monday 작성)

 

주후 90년대에 사도 요한이 80대의 노인이 되어 소아시아 서남부 대도시 에베소 지역에 살고 있습니다. 일찍이 사도 요한은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이 로마군의 진격으로 멸망을 당하게 되자 스승 예수님의 부탁을 명심하여  큰 이모 마리아를 모시고 소아시아로 들어와서 피난생활을 시작한 것입니다(19:25-27);

당시 마리아가 90세에 가까운 노인이었으므로 에베소에서 오래 살지를 못하고 별세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주후 70년대 중반에서 90년대에 이르기까지 에베소에서 홀로 살아가면서 60대의 노인이 80대의 노인이 될 때까지 주변의 초대교회들을 돌보면서 헬라의 철학과 학문을 스스로 공부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도 요한이 노년에 뒤늦게 헬라의 철학과 학문을 공부한 이유는 주변의 헬라인과 로마인들에게 알기 쉽게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과 생애를 체계적으로 설명해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가 저술한 요한복음 제1장에서부터 헬라의 관념 로고스를 도입하여 그리스도에 관한 설명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자세하게 살펴보면 그리스도는 헬라의 로고스라는 열등한 신이 아니라 창조주의 영광을 공유하고 있는 위대한 여호와의 독생자이며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스스로 성육신한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입니다(1:1-14). 따라서 그리스도 예수의 가르침은 창조주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와 진리로 충만합니다(1:14-18).

물론 요한복음의 내용은 주후 60년대에 이 세상에 먼저 나온 마가복음, 마태복음, 누가복음 등 3권의 공관복음과 13권의 바울서신을 참조하여 저술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사도 요한이 오래 기억하면서 더욱 깊이 이해하고 있는 예수님의 교훈과 생애에 대한 기록이며 동시에 그의 체험적인 복음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 기록 가운데 오늘은 요한복음 제3장 초반부인 제1-12절의 말씀을 한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 이유는 성도의 거듭난 삶에 대하여 그 깊은 내용이 예수님과 니고데모와의 대화 가운데 비유적으로 잘 드러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니고데모는 백성들에게 히브리경전을 가르치고 있는 존경 받는 바리새인 랍비로서 유대교의 최고기관인 예루살렘 산헤드린 대공회의 일원입니다. 종교적으로 그와 같은 높은 지위에 있는 니고데모가 신기하게도 복음사역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아니한 청년 예수를 예루살렘에서 은밀하게 방문하여 깊은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그가 방문한 이유가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요한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 그대로 나사렛 예수가 공생애를 시작하여 처음 맞이하는 유월절에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대담하게 성전청결운동을 벌이면서 이상한 표적을 이야기했기 때문입니다(2:13-19). 또 하나는,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선지자로 여겼기 때문입니다(3:2).

성전청결운동을 벌이면서 예수님이 백성들에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지금의 예루살렘성전을 헐어버린다고 하면 나는 새로운 성전을 단 3일만에 지어서 당신들에게 보여줄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기적입니다. 새로운 성전은 장사하는 집이 아니라 만민을 구원하기 위하여 만민이 기도하는 집입니다”(2:16-19, 19:45-46);

그것은 선민중심의 유대교를 개혁하여 만민을 구원하는 새로운 종교로 만들고자 하는 나사렛 예수의 열망을 말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학문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당시 유대교의 개방과 개혁을 추구하고 있는 소수 힐렐학파들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는 속시원한 발언입니다. 니고데모가 힐렐학파에 속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더구나 유월절 기간 동안에 나사렛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여러가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니고데모가 은밀하게 예수를 따라다니면서 그가 선포하는 말씀을 듣고 보니 그것은 성경선생인 랍비의 경지를 뛰어넘고 있는 선지자의 경지가 분명합니다.

랍비는 히브리경전을 오래 공부하여 자신이 터득한 경전의 뜻과 히브리사상을 백성들에게 율법을 풀이하면서 자세하게 가르치고 있지만 선지자는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의 말씀을 듣고서 그대로 백성들에게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차이가 현격한데 그것은 마치 복음과 율법과의 차이와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차제에 니고데모는 은밀하게 선지자 예수를 방문하여 한가지 궁금한 사실을 묻고자 합니다; “그것은 어떻게 하면 사람이 천국을 볼 수가 있으며 그곳으로 들어가서 영생을 얻을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3:3-5반대해석).

니고데모의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두가지로 대답하고 계십니다; 하나는,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3:5). 또 하나는, 바람이 임의로 불고 있지만 성령으로 난 사람은 그 이치를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3:8);

그와 같은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 물위를 오래 날 수 있는 소위 신천옹(信天翁)과에 속하고 있는 큰 새인 알바트로스입니다. 남태평양에 서식하면서 북태평양까지 이동하고 있는 알바트로스는 몸길이가 1m정도인데 날개의 길이는 그 3배로서 3m나 되고 있습니다.

물론 알바트로스는 잠시 물위에 내리 앉아 생선을 잡아 먹을 수 있도록 물갈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알바트로스는 평평하게 날개를 넓게 펴고서 오래 하늘을 날 수가 있는 큰 새입니다. 그 비행의 원리는 기이하게도 수면위에 2겹으로 생성되고 있는 바람의 압력차이를 이용하여 활강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물리학에서 공기의 흐름과 압력과의 관계를 규명하고 있는 것이 소위 베르누이의 법칙입니다. 그것은 작은 관과 큰 관으로 구성이 되어 있는 물체를 통과하는 바람의 양을 측정하면 시간당 바람의 양이 같은데 그 이유는 작은 관에서는 바람이 빨리 통과하기에 그 압력이 줄어들고 큰 관에서는 천천히 통과하기에 압력이 상승한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수면 바로 위의 공기와 그 위의 공기는 이동의 속도가 다릅니다. 대단히 평평한 것이 수면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그것이 파동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에 공기의 흐름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수면 바로 위의 바람은 속도가 느려지면서 위로 엄청난 압력을 행사하게 됩니다. 그것이 수면위에 형성되고 있는 소위 양력’(揚力, pushing up power)입니다.

수면위의 공기층과 그 위에 있는 공기층은 그 바람의 속도와 압력에 있어서 차이가 나고 있습니다. 수면 바로 위의 공기층이 바람의 속도가 느리고 그 때문에 압력이 커져서 알바트로스 큰 새의 날개를 위로 밀어 올리는 양력을 행사하고 있는데 비해서 그 위의 공기층은 정상적으로 빠르게 흐르고 있는 바람이므로 그 압력이 적습니다.

따라서 양력을 받아 위로 올라가고 있는 큰 새가 계속 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습니다. 그렇게 교묘하게도 알바트로스는 두 공기층 사이를 날고 있습니다. 그것은 본능적으로 바람의 세기의 차이를 파악하고 그것을 멋지게 이용하여 하늘을 별로 힘을 들이지 아니하고 그 큰 날개로 계속 날고 있는 알바트로스의 비책입니다.

더구나 알바트로스는 바람의 방향을 이용하여 상승도 하고 하강도 합니다. 굳이 날개를 퍼득이지 아니하고 그것을 멋지게 실행하고 있습니다. 그 원리를 살펴보면, 참으로 신기합니다;

바람을 마주하게 되면 그 큰 날개를 돛처럼 사용하여 맞바람을 타고서 상승합니다. 하강할 때에는 그 반대입니다. 날개의 모양만 조금 바꾸어 바람을 타고서 그대로 아래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알바트로스가 물위의 압력과 바람의 세기 및 방향을 적절하게 이용하여 그 평평한 날개로 공중을 날고 있기에 하루에 800km이상 날 수가 있으며 20일간 쉬지 아니하고 비행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순전히 자신의 체력을 최대한 아끼고 바람의 힘을 극도로 이용하고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알바트로스의 비행원리를 이용하여 개발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위그선(Wing In Ground Effect Craft)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비행기에 비하여 약 3분의 1의 에너지로 바다위를 날 수가 있는 선박입니다. 그러므로 장차 알바트로스의 비행원리를 더욱 정밀하게 파악하게 되면 더 나은 위그선을 만들어 낼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들은 어떻게 남은 인생을 복음사역자로 살아가야 할까요? 그 원리는 일종의 알바트로스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체력으로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바람을 타고서 큰 믿음의 날개를 펴고 날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알바트로스처럼 비행할 때에 두 달이면 4km라는 지구의 둘레를 한바퀴 돌 수 있는 놀라운 속도로 복음사역이 가능할 것입니다. 이제는 그와 같은 사실을 염두에 두고서 본문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한 구절 씩 풀이하여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1.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 2. 그가 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4.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3:1-4); 다음과 같이 둘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1.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 2. 그가 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3:1-2);

1)    사도 요한은 니고데모의 신분에 대하여 여기서는 바리새인 출신으로서 유대인의 지도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1). 그런데 요한은 제7장 제45-52절에서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모여 있는 예루살렘 산헤드린 대공회의 이야기를 하면서 재판관의 신분을 지니고 있는 니고데모의 주장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50. 그 중이 한사람 곧 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가 그들에게 말하되, 51.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심판하느냐?”(7:50-51). 율법에 따라 종교재판을 하는 최고의 기관이 바로 예루살렘성전에 자리잡고 있는 산헤드린 대공회인 것입니다;

2)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은 세 집단으로 구분이 되고 있습니다; 첫째가 수천명에 이르는 젊은 생도들입니다. 그들은 10대와 20대를 유명한 랍비 아래에서 문하생이 되어 히브리경전과 히브리사상을 주석과 함께 배우게 됩니다. 둘째가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고 있는 랍비들입니다. 바리새인 생도들이 30세가 되면 시험에 통과하여 한사람의 랍비가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수백명에 불과합니다. 셋째가 유명한 랍비 가운데 백성들의 존경을 크게 받고 있는 자를 산헤드린 대공회에서 교법사로 초빙하게 됩니다. 그들이 종교재판에 있어서 율법을 유권해석하고 있는 존귀한 자들입니다. 가말리엘, 아리마대 요셉, 니고데모 등이 여기에 속하고 있습니다(7:50, 19:38-39, 23:50-51, 5:34).

3)    그와 같이 유대인들의 종교지도자로서 백성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인물이 율법선생 니고데모입니다. 그러므로 그 신분이 높아서 남이 보고 있는 낮 동안에는 예루살렘에 이제 막 등장하고 있는 변방 갈릴리 출신 젊은이 예수를 방문하기가 꺼려집니다. 따라서 밤중에 은밀하게 예수를 방문하고 있습니다(3:2a). 그리고 자신이 나사렛 예수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먼저 말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이 예수는 바리새인처럼 히브리경전을 배우고 연구하여 그것을 풀이하여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받아서 백성들에게 선포하고 있는 선지자라는 것입니다(3:2b). 그러므로 이제 니고데모는 천국에 들어가서 영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에 관하여 선지자 예수에게 묻고자 합니다. 과연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나사렛 예수에게 그에 관하여 어떠한 말씀을 주시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이 선지자 예수를 방문한 목적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그와 같은 니고데모의 예수님 방문목적이 생략된 채 곧바로 다음절에서 예수님의 답변이 수록되고 있습니다.

(2)  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4.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3:3-4);

1)    니고데모의 질문이 워낙 중요한 것이므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진리를 그대로 전하고자 하십니다. 그와 같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표현이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3:3a)입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의 내용은 하나님의 나라를 보기 위해서는 사람이 거듭나서 육적인 눈이 아니라 영적인 눈을 가져야만 한다는 것입니다(3:3b).

2)    그런데 예수님 말씀의 뜻을 율법선생인 니고데모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 질문이 육신적인 생각 그대로입니다; “4.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3:3-4). 그는 사람이 모태에서 태어나는 것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영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새로이 태어남으로써 영적인 안목을 가지고 살아가는 믿음생활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는 것입니다;

둘째로, “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6. 으로 난 것은 육이요, 으로 난 것은 영이니, 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8. 바람이 임으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3:5-8); 나이와 신분을 뛰어넘어 예수님을 하나님의 선지자로 인정하고 있는 겸손하고 정직한 신앙인이 바로 니고데모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그를 존중하여 그에게 참으로 알기 쉽게 장차 성령님의 임재로 말미암아 거듭난 삶을 살아가게 되는 성도들의 영적인 삶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하고 계십니다. 그 내용이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입니다(5절과7);

 창세기 제1장 제2절 말씀을 참조하면, 물은 하나님의 능력이 전이되어 있는 물질입니다. 물은 마치 하나님의 능력의 전도체와 같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진심으로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인정하고 그 입으로 그 사실을 고백하면서 물세례를 받게 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로 말미암아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죄사함과 칭의(justification)의 은혜를 얻게 됩니다. 그리고 남은 인생을 그리스도의 교훈과 생애를 묵상하면서 그 제자로 살아가겠다고 결심하고 간구하게 되면 보혜사 성령님께서 임재하여 영적으로 내주 역사하시는 거듭난 성도의 삶이 이루어지게 됩니다(14:16-20, 1:8, 2:1-4). 그 결과 훗날 영생의 몸으로 부활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자세한 사항에 대해서는 사도 바울이 기록한 로마서 제7-8장의 내용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2)  둘째, 육신적인 인간의 방법으로는 아무리 노력하여도 거듭나거나 인력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6). 그것이 자력적인 구원론의 한계라고 하겠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사람이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거듭나게 될 때에 비로소 천국입성이 가능해집니다(3:7-8, 8:10-17, 21:27). 그 점에 관하여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것이 사도 바울이 주후 60년대에 기록한 로마서 제7-8장이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주후 90년대에 사도 요한이 자신의 복음서 곧 제4복음서를 기록하면서 여기서는 그 자세한 내용을 생략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3)  셋째, 성령님은 마치 바람과 같아서 사람의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바람은 볼 수 없지만 사람은 바람소리를 들으면 그것이 어디서 불어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8). 그러므로 성령세례를 받아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그때부터 내주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진리의 말씀을 깨닫고 복음의 일꾼으로 살아가며 그 결과 훗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는 사실을 영적으로 확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참고로, 그와 같이 자신의 힘과 노력이 아니라 성령님의 바람에 날개를 활짝 펴고서 비행하는 성도의 거듭난 삶이 마치 알바트로스의 비행모습과 흡사하다는 사실을 이미 모두(冒頭, 글의 앞머리)에서 충분하게 설명한 바가 있습니다.

셋째로, “9.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10.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11.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12.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3:9-12);

(1)  예수님은 하나님 말씀의 완전계시자로서 그리고 대속의 어린양으로서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1:1-18, 29, 11:27-30). 그러므로 구약시대 모든 선지자들이 전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도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과 생애에 비추어볼 때 비로소 진정한 창조주 여호와의 세상구원의 뜻이 분명하게 드러나게 됩니다(3:16, 6:39). 니고데모가 공생애 초창기의 예수님을 만나고 있는 그 시점에 있어서는 아직 예수님의 대속의 십자가와 무덤 속 부활이 이루어지기 이전 시대입니다. 따라서 물세례와 성령세례와의 관계는 물론 훗날 보혜사 성령님의 임재로 성도들에게 이루어지는 거듭난 영적인 삶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여 주신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전혀 경험이 될 수 없는 성격의 것입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니고데모의 말, “9.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3:9) 라는 대목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2)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점을 질책하고 계십니다; “10.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11.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3:10-11). 그 말씀의 뜻은 바리새인은 모세오경 뿐만 아니라 히브리정경에 들어 있는 모든 경전의 말씀을 믿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에(23:8) 선지서와 시편 그리고 묵시록의 내용을 깊이 묵상하게 되면 대속자 그리스도의 오심과 보혜사 성령님의 강림으로 이루어지는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새 예루살렘의 입성을 충분히 알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11:1-19, 65:17-25, 2:28-32);

 그런데 구약선생인 니고데모가 그러한 사실을 전혀 믿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것이 딱하다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3)  그와 같은 취지의 말씀이 훗날 예수님께서 주신 거지 나사로와 부자와의 비유가운데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31.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16:31). 더구나 무덤에서 3일만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40일 동안 제자들을 재교육시키실 때에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계십니다; “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45.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24:44-45).

(4)  이 세상에 구세주 그리스도의 오심과 성도들의 거듭난 삶을 돕기 위하여 보혜사 성령님께서 오신다고 하는 복음적인 사실은 니고데모가 히브리정경의 내용을 깊이 묵상하였더라면 벌써 짐작할 수 있는 내용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민의 영광만을 구현하는 다윗대왕의 후계자가 메시아로 이 세상에 오기만을 소원하고 있는 유대인들의 집단적 이기주의와 자신들만 구원의 대상이라고 하는 선민우월사상이 그들의 눈과 귀를 멀게 하고 있습니다(6:9-10). 그것은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이라고 하는 창조주 하나님의 복음을 완전히 외면하고 오로지 유대인 자신들의 땅의 이익만을 추구하고 있는 잘못된 신앙 자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안타깝게 니고데모에게 그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12.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3:9-12). 그것은 이 땅에서 육신적인 생각에 젖어서 살고 있는 자신들의 잘못을 고치게 될 때 비로소 하늘에 계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도우심을 영적으로 크게 얻을 수가 있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 가운데 물과 바람의 비유가 들어 있습니다. 물위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마치 바람과 같이 크게 불고 있습니다. 이제는 물위에서 발생하고 있는 그 양력의 도움을 받아 마치 알바트로스라는 큰 새처럼 믿음의 날개를 활짝 펴고서 멀리 날아가야 하겠습니다.

거듭난 성도들은 성령님의 바람이 어디서 불어와서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유심하게 살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그 바람의 흐름에 자신의 몸을 맡겨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온세상에 전파하여야 합니다(28:18-20, 1:8).

그러므로 세상적인 작은 이익을 얻고자 자신의 힘으로 날개를 자꾸만 퍼득이면 안됩니다. 그러한 신앙자세로는 멀리 날 수가 없습니다. 아무쪼록 믿음의 큰 날개를 펴고서 복음 안에서 한반도를 통일하고 온세상에 그리스도의 부활의 복음을 전파하는 그러한 한민족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