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22년 손진길 목사 설교문

시편 제142편이 말하고 있는 시아흐와 카타르(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4. 12. 10:16

제목; “시편 제142편이 말하고 있는 시아흐와 카타르”(142:1-7)

설교일; 주후 2022417일 주일

작성자; 손진길 목사(412일 화요일 작성)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윗의 영광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조그마한 이스라엘왕국을 찬란한 중근동의 패권국 이스라엘제국으로 만든 인물이 바로 다윗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의 오랜 역사에 있어서 다윗만한 영웅이 없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구세주 메시아가 온다고 하면 그는 다윗의 영광을 재현하는 인물일 수밖에 없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다윗이 건설한 이스라엘제국은 아들 솔로몬의 시대를 지나 손자인 르호보암이 즉위한 이듬해 곧 주전 930년경에 그만 남북으로 쪼개어지고 맙니다. 그것은 솔로몬이 통치 후반기에 자신의 지파인 유다 지파를 제외하고 다른 이스라엘 지파에게 큰 부담을 지우면서 제국을 경영하였기에 발생한 사건입니다(왕상12:4).

솔로몬은 통치 전반기에는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이스라엘제국을 잘 다스린 인물입니다(왕상3:9-14, 10:23-24). 속국에서 들어오는 조공 뿐만 아니라 해상무역을 경영하여 많은 재물을 얻어(왕상9:26-28, 10:22) 그것으로 7년간 예루살렘성전을 건설하고 13년간 자신이 거주하는 황궁을 화려하게 증축하였습니다. 아울러 수도권을 정비하고 국방을 튼튼히 하였습니다(왕상9:15, 10:26).

드디어 국고가 바닥이 나고 있습니다. 이제는 대규모 프로젝트를 멈추어야 합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그러하지를 아니합니다. 아예 이스라엘제국 전체를 요새로 만들고자 지방도시에 이르기까지 군사력을 강화하고 그에 걸맞는 국방사업을 계속 추진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솔로몬은 속국에서 진상한 수많은 공주와 미인을 전부 처첩으로 삼고 황궁에서 세상적인 환락과 쾌락에 빠져들고 맙니다(왕상10:1-3). 더구나 그녀들이 친정에서 가지고 온 우상을 마음대로 섬기도록 허용하고 있습니다(왕상10:4-8). 그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의 이스라엘제국을 버리고자 하십니다(왕상10:9-11);

그 방법이 솔로몬의 아들이 왕이 되자 그 이듬해 북쪽의 이스라엘 10지파가 다윗왕조를 떠나 에브라임 출신의 영웅 여로보암1세를 초대왕으로 삼아 북조 이스라엘왕국을 건설하고 마는 것입니다(왕상12:15-20). 여기서 한가지 반드시 생각해야만 하는 중요한 신앙적인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다윗을 생각하여 그 아들 솔로몬의 통치기간에는 비록 그가 타락하였지만 이스라엘제국을 쪼개지 아니하신 것입니다; “12. 그러나 네 아버지 다윗을 위하여(솔로몬) 세대에는 이 일을(제국을 쪼개는 일을) 행하지 아니하고 네 아들의 손에서 빼앗으려니와, 13. 오직 내가 이 나라를 다 빼앗지 아니하고 내 종 다윗과 내가 택한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를 네(솔로몬의) 아들에게 주리라 하셨더라”(왕상11:12-13).

그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요? 어째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그토록 귀하게 여기시고 계시는 것일까요?(13:22) 그 이유를 찾아보기 위하여 오늘은 다윗이 아둘람 피난시절에 지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시편 제142편의 내용을 알아보고자 합니다.

큰 환난 가운데 청년장군 다윗이 도망자로 살아가고 있던 시기가 베들레헴 서편 광야에 있는 아둘람 굴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삼상22:1). 아둘람의 위치는 헤브론의 북쪽입니다. 그곳에서 남하하면서 다윗은 계속 목숨유지에 급급합니다;

 

돌이켜보면, 다윗의 일생은 험난한 고난과 역경의 연속입니다. 젊은 시절에는 청소년 다윗이 겁도 없이 블레셋의 거인용사 골리앗 앞에 단신으로 나서서 일대일 대결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가 물매로 골리앗을 이기자 그때부터 수많은 전투에 동원되고 있습니다. 목숨이 위험한 전쟁판에 계속 서게 되는 청년장군 다윗의 운명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연전 연승하자 다윗을 시기한 사울 왕의 질투로 그만 10년간 도망자 신세가 되고 맙니다. 다윗의 피난처가 노출되기만 하면 사울 왕은 즉각 3천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그를 잡아죽이려고 달려오고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억울하며 험난한 인생살이인지 모릅니다.

그 억울함을 다윗이 어떻게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을까요? 그 방법을 오늘의 본문 제2절에서 기록하고 있는데 그 히브리어의 원형이 시아흐( י ח)입니다. 그 뜻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 앞에서만 호소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 광야 아둘람 굴에서 겨우 피신생활을 영위하고 있던 청년장군 다윗은 자신을 지지하는 무리가 400명으로 늘어나게 되자 그 무리를 먹여 살리기 위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보급작전에 나서고 있습니다(삼상22:1-2, 23:5, 25:7-8). 그 때문에 엔게디와 십 광야에서 그의 거처가 탄로나서 사울 왕의 기병대에게 계속 쫓기게 됩니다(삼상23:8, 24:1-2, 26:1-2).  

그와 같은 피곤한 도망자 시절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사울 왕의 목을 칠 수 있는 암살의 기회를 두번이나 다윗에게 제공하고 있습니다(삼상24:3-4, 26:5-8). 그것은 다윗이 참으로 억울한 자신의 피신생활을 마감하고 유다의 왕이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그와 같은 호기를 주고 있는 여호와의 뜻은 다윗의 신앙을 시험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다윗이 세상적인 욕심에 이끌리어 무방비상태인 숙적 사울 왕의 목을 치고 쉽게 이스라엘왕국을 차지하고자 할 것인가? 아니면 신앙적으로 그 처분을 주인이신 여호와의 손에 맡겨드릴 것인가? 그 선택을 보고서 다윗의 앞날을 결정하고자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 유혹을 다윗이 두번이나 물리치고 여호와의 시험에서 합격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시고 여호와께서는 다윗에게 찬란한 승리의 영광을 주고 계십니다. 그것을 본문 제7절에서 다윗은 카타르’(יַכְתִּ֣רוּ)라는 히브리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의미는 하나님의 군대가 다윗을 언제나 지켜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다윗이 무방비 상태로 자신 앞에 노출되고 있는 숙적 사울 왕을 암살한다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시험에서 신앙적으로 불합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즉시 다윗 자신을 보호하고 있는 하나님의 군대가 철수하고 말 것임을 그가 깨닫고 있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의 목숨보다 자신의 목숨을 지키고 있는 그 하나님의 군대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따라서 그는 사울 왕의 목숨을 취하자고 주장하고 있는 수하의 행동을 적극 제지하고 있습니다(삼상24:7, 26:9).

참고로, 두번째의 경우 다윗의 명령이 다음과 같습니다; “9. 다윗이 아비새에게 이르되,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하고, 10. 다윗이 또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은 죽을 날이 이르거나, 또는 전장에 나가서 망하리라. 11.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치는 것을 여호와께서 금하시나니, 너는 그의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가자 하고, 12. 다윗이 사울의 머리 곁에서 창과 물병만 가지고 떠나가되, 아무도 보거나 눈치채지 못하고 깨어 있는 사람도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깊이 잠들게 하셨으므로 그들이 다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더라”(삼상26:9-12);

  

 

여호와의 시험을 통과하고 있는 다윗의 신앙의 경지가 어느 사이에 선지자의 반열에 올라서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가 예언하고 있는 그대로 훗날 사울 왕은 80세에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그만 중과부적으로 전사하고 마는 것입니다(삼상31:1-6).

드디어 청년장군 다윗은 오랜 도망자 신세를 면하고 자신의 지파인 유다의 땅으로 돌아와서 헤브론에서 유다의 왕으로 즉위하게 됩니다(삼하2:1-4). 그리고 7년반의 세월이 지나자 기타 이스라엘 11지파의 장로들이 합의하여 그를 전체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고 있습니다(삼하5:1-5).

이스라엘왕국을 차지한 다윗에게는 여호와께서 카타르의 축복으로 함께하십니다. 그 결과 다윗 왕은 주변국과의 전쟁에서 연전 연승하여 조그마한 이스라엘왕국을 중근동의 패권국 이스라엘제국으로 만들고 있습니다(삼하8:1-14).

역사서는 그 사실을 한마디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14. 다윗이 에돔에 수비대를 두되, 온 에돔에 수비대를 두니 에돔 사람이 다 다윗의 종이 되니라.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더라”(삼하8:14).

그와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 시편 제142편의 내용을 한 구절 씩 다음과 같이 살펴보고자 합니다. 아울러 묵상을 통하여 얻은 교훈을 함께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1. 내가 소리 내어 (사람들이 아니라 오로지)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소리 내어 (오로지) 여호와께 간구하였도다. 2. 내가 내 원통함을 그(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의 앞에 토로하며 내 우환을 그의 앞에 진술하는도다”(142:1-2);

(1)  여호와신앙인으로 살아가고자 하면 이 세상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기 마련입니다. 그 이유는 세상적인 방법으로 자신들의 욕심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는 세상사람들과 성도들의 삶의 방법이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세상사람들은 고상한 척하는 것으로 보이는 성도들 곧 여호와신앙인을 그냥 두지 아니하고 핍박하며 박해합니다. 그와 같은 경우를 너무나 억울하게 당하고 있는 인물이 여기서는 시편 제142편의 저자인 청년장군 다윗입니다.

(2)  그는 동족 이스라엘의 안전보장을 위하여 외적과 싸워서 수년간 연전연승을 했지만 그 결과는 백성들의 환호를 받고 있는 청년장군 다윗을 시기하여 사울 왕이 두번이나 단창을 던져서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삼상18:11, 19:10). 다윗은 살해의 위협을 피하고자 부득이 광야로 탈출하여 척박한 아둘람 굴에서 피난생활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울 왕이 그를 잡아서 죽이려고 계속 정탐꾼을 풀고 있습니다.

(3)  그와 같은 억울한 속사정을 청년장군 다윗이 결코 수하나 이웃백성에게 토로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1). 어째서 다윗이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의로움을 내세우거나 억울함을 호소하지 아니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그의 여호와신앙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그 모습을 훗날 다윗대왕의 진술에서 다음과 같이 엿볼 수가 있습니다; “22. 이르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거니와, 23. 지금은 죽었으니, 내가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하니라”(삼하12:22-23).

(4)  요컨대, 생명의 주인이시며 구원을 베풀어 주시는 분은 사람이 아니라 오직 생명과 인생을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 뿐이시라는 다윗의 신앙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억울한 속사정을 사람들에게 호소해보아야 그것은 별로 효과가 없습니다. 오로지 사람의 억울한 속사정을 깊이 살피시고 그 호소를 들어서 새로운 인생을 선물하시는 분은 창조주이십니다. 사람의 인생과 사람들의 역사를 모두 섭리하고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이 옳다는 다윗의 판단이 바로 본문의 진술인 것입니다(142:1-2). 다윗의 경우는 그 옛날 믿음의 선조인 요셉의 사례를 닮아 있습니다. 억울하게 이복형들에 의하여 상단에게 노예로 팔린 요셉이 애굽으로 끌려가서 종살이를 하게 됩니다. 그때 그는 오로지 여호와 하나님께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합니다. 그 결과 그는 애굽에서 놀라운 형통의 복을 얻고 있는 것입니다(39:1-5);

(5)  특히 다윗이 제2절에서 2. 내가 내 원통함을 그(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의 앞에 토로하며 내 우환을 그의 앞에 진술하는도다”(142:2)고 노래하고 있는데 그것은 믿음의 사람이 세상살이에서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에 그 컴플레인’(complain, 불만에 대한 호소, 히브리어로는 시아흐’, י ח)을 어떻게 하여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불평하고 원통함을 호소하게 되면 그 문제가 당장은 풀리는 것 같지만 나중에는 더 험악한 방법으로 재발이 되고 맙니다(12:43-45);

 그러므로 근본적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인생과 역사를 섭리하시는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 앞에 구체적으로 호소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신의 인생을 바꾸고 주변의 환경을 변화시키는 방법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믿는 것이 여호와 신앙이며 역사서에서 다윗이 그 본을 보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둘째로, “3. 내 영이 내 속에서 상할 때에도 주께서 내 길을 아셨나이다. 내가 가는 길에 그들이 나를 잡으려고 올무를 숨겼나이다. 4. 오른쪽을 살펴보소서. 나를 아는 이도 없고, 나의 피난처도 없고, 내 영혼을 돌보는 이도 없나이다. 5.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나이다”(142:3-5); 도망자 다윗처럼 자신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억울한 속사정을 역사를 섭리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만 호소하는 것이 옳다는 이유를 여기서는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1)  첫째, 적의 올무에 걸리지 아니하고 무사히 피신할 수 있는 길을 유일하게 알고 계시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3). 적들이 파 놓은 함정과 그물망은 은밀한 것이므로 사람의 눈으로는 전부 파악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의 지혜로는 그 모든 함정과 올무를 도저히 피할 수가 없기에 적에게 사로잡히고 말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사람이 은밀하게 파 놓은 함정이나 그물망이라고 하더라도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영적인 눈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 앞에 낱낱이 그 실체가 드러나고 마는 것입니다; “13.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4:13). 그러므로 다윗처럼 여호와 하나님께 피할 길을 달라고 간구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2)  둘째, 일단 적에게 쫓기는 도망자 신세가 되고 나면 이 세상에서 진심으로 자신을 숨겨주거나 피난처를 제공하여 줄 자가 전혀 없습니다(4). 이스라엘의 역사서를 보면 억울하게 아합 왕과 이세벨 왕비에게 쫓기고 있는 선지자 엘리야의 경우가 그러합니다; “3. (엘리야)가 이 형편(북조 이스라엘왕국내에 자신을 숨겨주고자 하는 자가 한사람도 없음)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곳에 머물게 하고”(왕상19:3). 선지자 엘리야가 조국 북조 이스라엘왕국내에서는 도저히 피신처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가 멀리 남하하여 다윗왕조 유다왕국의 땅 그것도 남쪽국경지대인 브엘세바까지 도망치고 있는 것입니다;

(3)  셋째, 그 모습을 보고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타나십니다(왕상19:4-18). 유일한 피난처와 도피처가 바로 여호와 하나님 안에 있다는 사실을 훗날의 선지자 엘리야처럼 여기서는 청년장군 다윗이 정확하게 알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5.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나이다”(142:5). 여호와 하나님만이 나의 피난처가 되신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인식하고서 자신의 억울한 속사정을 호소하면서 부디 살길을 열어 달라고 간구하는 성도가 마침내 이 세상을 이기는 신앙인이 될 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8:37-39, 22:28-30).  

셋째로, “6.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소서. 나는 심히 비천하니이다. 나를 핍박하는 자들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그들은 나보다 강하니이다. 7. 영혼을 (세상적인 방법과 탐욕의 정당화라는) 옥에서 이끌어 내사 주의 이름을 감사하게 하소서. 주께서 나에게 갚아주시리니, 의인들이 나를 두르리이다”(142:6-7);

(1)  다윗의 노래 그대로 창조주 앞에 서게 되면 비로소 피조물인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비천한 존재인지를 정확하게 알게 됩니다(142:6a). 그 점을 일찍이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27. 아브라함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18:27). 그러므로 여호와신앙인은 자신을 환난 가운데 몰아넣고 있는 적들의 존재가 얼마나 하찮은지를 또한 알게 됩니다. 비록 적들의 힘이 자신보다는 월등히 크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군대 앞에서는 지푸라기와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젊은 장군 다윗이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6.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소서. 나는 심히 비천하니이다. 나를 핍박하는 자들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그들은 나보다 강하니이다”(142:6).

(2)  그러므로 다윗이 제7절에서 두가지 내용의 기도를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다; 하나는, 군사력을 강화하여 무력의 우위에 서서 약한 적들을 섬멸하고자 하는 세상적인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구원하여 달라는 것입니다; “7. 영혼을 (세상적인 방법과 탐욕의 정당화라는) 옥에서 이끌어 내사 주의 이름을 감사하게 하소서”(142:7a). 실제로 그와 같은 세상적인 의도로 다윗왕이 나중에 군사로 징집할 수 있는 장정의 수를 파악하기 위하여 인구조사를 시행하고 있습니다(삼하24:1). 그 때문에 여호와의 진노로 7만명이나 되는 백성이 전염병으로 희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삼하24:15).

(3)  또 하나는, 전적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자신이 처한 억울한 사정과 절박한 위기에 대하여 호소하게 되면 반드시 창조주께서 그 전능하신 능력으로 자신을 구원해주시고 놀라운 상급까지 주신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본문에서 그 도우심의 하나가 여호와의 군사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나에게 갚아주시리니, 의인들이 나를 두르리이다”(142:7b). 여기서 의인들이 나를 두르리이다라고 하는 동사 히브리어 카타르는 그 옛날 숙적 에서를 만나기 전에 야곱이 발견하고 있는 여호와의 군사의 보호하심 곧 마하나임과 같은 것입니다(32:1-2);

 비록 에서가 400명의 사병을 이끌고 북진하고 있지만(32:6) 야곱을 보호하고 있는 여호와께서 천군천사로 그를 지켜주고 있는 이상 승리는 야곱의 것입니다(32:28-30). 그 결과 놀랍게도 에서가 야곱과 화해하고 물러가는 것입니다(33:4, 16).

(4)  다윗의 경우에는 여호와의 군대가 자신을 둘러싸고 지켜 주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습니다. 따라서 훗날 다윗왕은 여호와 앞에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서 부디 끝까지 보호하여 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왕자무치(王者無恥, 왕은 세상의 도덕과 윤리에 구애를 받지 아니한다는 사상)의 절대권력에 취하여 간음죄와 살인죄를 저지른 다윗이 나단 선지자의 지적으로 자신의 죄악을 깨닫게 되자 정직하게 잘못을 인정하고서 남은 인생 가운데 여호와의 처벌을 달게 받고 있습니다(삼하12:9-15). 그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다윗왕을 지켜주고 이스라엘제국을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무사히 넘겨주도록 역사를 섭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왕상1:32-48, 2:1-4).    

결론적으로, 다윗이 사울 왕의 군대를 피하여 임시로 아둘람 굴에서 지내고 있을 때에 그는 억울한 속사정을 사람들에게 호소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 대신에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으면서 살길을 열어 달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의 간구가 긍정적인 결과를 가지고 옵니다. 여호와의 마음에 드는 시아흐의 간구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평생을 통하여 전쟁에서의 승리는 여호와의 군대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카타르의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시편 제142편 제7절에서 정확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카타르의 도우심을 다윗이 잃어버리지 아니하고자 얼마나 큰 노력을 경주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예를 들면, 자신의 잘못을 즉시 인정하면서 끝까지 여호와의 처벌을 달게 받는 다윗입니다. 그것이 고난과 역경을 이기고 승리하는 영적인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아무쪼록 그와 같은 시아흐와 카타르의 고백이 저와 여러분들의 신앙적인 특징이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