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22년 손진길 목사 설교문

엘로힘과 보레에카(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3. 29. 11:15

제목; “엘로힘과 보레에카”(1:1-2, 12:1-3)

설교일; 주후 202243일 주일

작성자; 손진길 목사(329일 화요일 작성)

 

엘로힘’(אֱלֹהִ֑ים)은 창세기 제1장 제1절에 나타나고 있는 베레쉬트 바라 엘로힘 에트 하솨마임 베트 하아레쯔”( בְּרֵאשִׁ֖ית בָּרָ֣א אֱלֹהִ֑ים אֵ֥ת הַשָּׁמַ֖יִם וְאֵ֥ת הָאָֽרֶץ׃)라는 히브리어 7단어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것은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복수로 말하고 있는 단어입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창조하다라고 하는 히브리어 바라’(בָּרָ֣א)는 단수입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제1장 제1절 말씀,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복수의 개념을 가지고 계시는 유일한 삼위일체 하나님(엘로힘)께서 하나의 통일된 의사결정에 의거하여 하늘과 땅으로 구성이 되는 하나의 우주를 창조하셨다(바라)는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전도서 제12장 제1절의 전반부를 살펴보면, ‘창조하다라고 하는 바라의 복수형 보레에카’(בֹּ֣ורְאֶ֔יךָ)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지혜의 대왕 솔로몬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1.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וּזְכֹר֙ אֶת־בֹּ֣ורְאֶ֔יךָ בִּימֵ֖י בְּחוּרֹתֶ֑יךָ );

그것은 특이한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창조하다의 복수형 보레에카를 가지고 솔로몬이 감히 엘로힘창조주 하나님을 대신하고 있는 문장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솔로몬이 여기서 진정 말하고 싶은 내용은 천지간에 창조가 되어 있는 하나님의 작품을 하나하나 뜯어보게 되면 그 가운데 여호와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발견할 수가 있다는 것으로 파악이 됩니다.

그와 같은 의미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 장소가 다음과 같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1) 첫째, 자연계를 구성하고 있는 천지만물 가운데서 하나님의 창조의 솜씨를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2) 둘째, 사람의 인생 가운데서 창조주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3) 셋째, 인류의 역사 가운데서 창조주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조금 설명을 더해보자면, 피조세계의 자연계 곧 천지만물 가운데서 창조주 여호와를 발견한다는 것인데 그것을 사도 바울이 그의 로마서 제1장에서 너무나 잘 지적하고 있습니다;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1:20). 요컨대, 그것이 소위 자연신학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제1장 제2절을 보면 모세가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태초부터 하나님께서는 흑암의 세력이 하나님의 나라를 침범할 수 없도록 자신의 전능한 능력으로 수면의 방어막을 치셨으며 그 위를 운행하시면서 일일이 감찰하고 계신다고 하는 의미를 전달하고 있는 문장입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우리 각자가 살아가고 있는 인생 뿐만 아니라 집단적인 인류의 역사까지 어느 것 하나 창조주 하나님의 감독과 섭리 가운데서 벗어날 수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다시 풀이를 하자면, 창세기 제1장 제1절에서 창조주 하나님의 피조세계의 창조를 선언하고 있다고 한다면 제2절에서는 창조주의 관심이 그의 영의 운행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그것은 세상의 질서를 창조 이전과 창조 이후 언제나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바로잡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께서는 우주만물을 만들어서 그냥 제멋대로 살아가도록 버려 두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의도에 맞게 운행이 될 수 있도록 일일이 피조물과 피조세계를 감찰하면서 동시에 고치고 계신다고 하는 의미를 함축적으로 전달하고 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참고로, 그러한 사실을 명쾌하게 선포하고 있는 선지자 이사야의 글이 다음과 같습니다; “22. 여호와께서 애굽을 치실지라도 치시고는 고치실 것이므로 그들이 여호와께로 돌아올 것이라. 여호와께서 그들의 간구함을 들으시고 그들을 고쳐주시리라”(19:22);

따라서 자연계도 창조의 질서를 벗어나서 운행이 되고 있으면 창조주 하나님의 질책을 받으며 시정조치가 되고 있습니다(8:23-27). 그리고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인간도 결코 예외가 아닙니다;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7:21).

하나님의 뜻에 어그러지게 인생을 살아가게 되면 야단을 맞으며 처벌의 대상이 되고 맙니다. 따라서 대속의 십자가를 바라보고서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칭의의 은혜를 받았으면 그때부터는 하나님의 뜻에 맞는 올바른 성도의 삶을 영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인류의 역사도 그러합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제멋대로 권력과 재력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노예로 부리고 그렇게 계속 살아가도록 결코 버려 두지 아니하십니다. 따라서 은밀하게 인류의 역사에 개입하셔서 심판과 회복의 역사를 이루어 나가고 계시는 것입니다(4:34-37).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 섭리입니다;

그와 같은 사전지식을 가지고 이제는 창세기 제1장 제1-2절과 전도서 제12장 제1-3절을 자세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1. 태초하나님천지창조하시니라. 2.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수면 위운행하시니라”(1:1-2); 다음과 같이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1. 태초하나님천지창조하시니라”(1:1); 두가지 사실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1)    하나는, 이 세상은 무주물이 아니라 창조의 주인이 계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신론자들의 주장이 거짓이라는 사실을 한마디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유신론을 말하고 있으며 이 세상의 주인이신 창조주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정체는 엘로힘이라는 히브리어로 기록이 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영인 이신데 그것이 단수가 아니고 복수라는 것입니다(4:24);

2)    그 의미가 무엇인지 제26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1:26). 간략하게 풀이를 해보자면, 첫째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벌써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의 존재를 암시하고 있습니다(4:6). 둘째, 사람을 만들 때에 하나님께서는 내부에서 합의과정을 거쳐서 하나의 걸작품을 완성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을 다스릴 수 있는 하나님의 청지기인 사람이 만물의 영장으로 탄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3)    또 하나는, 이 세상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창조 이전에도 스스로 존재하고 계신 분이시며 결코 피조물이 아니십니다(3:14, 1:30). 따라서 창세기의 저자인 모세는 자신의 마지막 깨달음을 하나의 노래로 시편 제90편에 기록하면서 다음과 같이 영적인 진리를 갈파하고 있습니다; “1. 주여 주는 대대로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2.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90:1-2). 인간은 피조물이지만 그 생명만은 영원성을 지니고 있는데 그 이유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주의 창조 이전에 벌써 우리의 생명을 그 품에 지니고 계셨기 때문입니다(1:4-6). 그 품이 바로 인간 생명의 거처가 되고 있습니다(14:1-3). 따라서 인간은 이 세상에서 한평생을 살아가지만 그 결국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심판을 받아 영생의 하나님 품이냐 아니면 버림을 받아 영벌의 고통이냐의 갈림길에 서게 되는 운명을 지니고 있습니다(25:46, 16:22-23, 5:29);

 

4)    여기서 창조라고 하는 히브리어는 단수인 바라입니다. 따라서 복수의 성격을 지니고 계시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의논의 과정을 두루 거쳐서 하나의 의사로 통일하신 후에 우주를 만드신 것입니다. 따라서 창조에 따른 책임도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께서 동일하게 담당하십니다(1:1-3). 그와 같은 의미에서 이 세상의 창조와 운영에 관하여 말씀하고 계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과 그 뜻을 실천하신 독생자 그리스도의 행동이 일치가 되고 있습니다. 그에 따라 그 둘이 하나이며 진리라는 사실을 오늘날에도 보혜사 성령님께서 성도들에게 내주하여 항상 증거하고 계신다고 하겠습니다(14:16-17, 26, 16:13-15);

(2)  2.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수면 위운행하시니라”(1:2);

1)    땅은 창조에 있어서 하나의 소재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의 이 창조 이전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데 그 이유는 피조세계 우주의 특징인 소위 자연계의 질서가 그곳에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창조를 하시기 이전에는 이라고 하는 것이 세가지의 무질서를 보이고 있습니다(1:2a); 첫째가 혼돈이고, 둘째가 공허이며, 셋째가 흑암이 깊어서 전혀 빛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창조 이전의 세계가 무질서한 혼돈 자체임을 잘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땅의 입자들이 아무리 팽창하고 달려보아도 허허로운 공백이며 서로 만나는 기회가 전혀 없습니다.

2)    따라서 마찰에 의한 빛이나 열이 생성되지 못하기에 생명이 창조가 될 수 없으며 캄캄함 자체입니다. 여기서부터 하나님께서 창조하시는 우주의 아름다움을 그 반대어로서 다음과 같이 쉽게 서술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우주에는 질서가 있으며 서로 만나서 생명을 잉태하고 있습니다. 그 생명들이 잘 자라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입자들의 마찰에 의하여 열과 빛이 생성되어 생물이 살기 좋은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3)    무질서의 세계는 팽창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누룩이 빠른 속도로 퍼지듯이 어두움의 세력은 엄청난 팽창의 욕구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을 영이신 하나님께서 전능한 능력으로 억제하고 있습니다. 과연 어떠한 방법으로 팽창하는 무질서의 세계를 가두고 계시는 것일까요? 모세가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수면 위운행하시니라”(1:2b). 간략하게 설명을 해보자면, 하나님의 능력을 수면에 불어 넣어서 그것으로 어두움의 세력을 가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혹시 그 수면을 뚫고서 나오는 흑암의 세력이 있는지를 철저하게 감시하고 있습니다.

4)    그 방법이 하나님의 영이 수면위를 운행하시면서 감시 감독을 확실하게 수행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개념을 확대하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가 있습니다; “태초 이전에 어두움의 세력을 철저하게 가두시고 감시하시듯이 창조된 피조세계에 대해서도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확실하게 감찰하시고 삐뚤어진 것을 바로잡고 계십니다. 창조된 세상을 그냥 내버려두지 아니하시고 그와 같이 잘못된 것을 치시고 고치시는 것이 소위 하나님의 자연 섭리이며 역사 섭리인 것입니다”;

 

둘째로, “1. 너는 청년의 때에 너희 창조주를 기억하라.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2. 해와 빛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 3. 그런 날에는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떨 것이며, 힘있는 자들이 구부러질 것이며, 맷돌질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칠 것이며, 창들로 내다보는 자가 어두워질 것이며”(12:1-3); 다음과 같이 3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1. 너는 청년의 때에 너희 창조주를 기억하라.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12:1);

1)    구약을 히브리어에서 한국어로 처음 번역할 때에 선교사들이 정말 고심을 많이 했습니다. 히브리어의 개념을 그대로 담을 수 있는 한국어가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경우의 하나가 본문에서 창조주를 기억하라는 대목입니다(12:1b). 만약 히브리어를 그대로 직역한다고 하면 그것은 창조한 행위들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창조주라고 한국어로 번역하고 있는 바로 그 자리에, ‘창조하다는 히브리어 바라의 복수형인 보레에카가 사용이 되고 있는 문장이기 때문입니다.

2)    따라서 히브리어 문장의 본래 의미는 하나님께서 창조한 것들을 하나하나 깊이 살피게 되면 그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창조의 솜씨와 자연섭리 그리고 역사섭리를 발견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의미를 함축적으로 담을 수 있는 한국어 용어를 하나 선교사들이 찾아내어 번역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창조주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부터는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묵상할 때에 반드시 우주창조의 정치함은 물론 우리의 인생과 역사까지 섭리하시는 그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하는 경지에 이르러야 할 것입니다.

3)    그와 같이 자연질서 속에서 그리고 자신의 인생과 인류역사의 진행과정 가운데 창조주 하나님의 놀라운 솜씨와 인도하심이 들어 있음을 발견하는 자는 여호와를 찬양하며 창조주 하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삼게 됩니다. 그것이 여호와신앙인의 탄생입니다. 이 글의 저자인 솔로몬 대왕은 젊은 시절부터 그렇게 여호와신앙인으로 살아가게 되면 너무나 큰 유익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12:1a).

4)    그 유익이 크게 보아 두가지입니다(12:1c); 하나는, 인생의 어려운 고비를 극복할 수 있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얻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늙어가는 인생살이 가운데 세상의 낙이 없어지고 육신의 힘이 빠져나간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여호와신앙인은 구원의 은혜와 영생의 소망을 더 가까이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2)  2. 해와 빛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12:2);

1)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자연의 질서를 언제나 감찰하고 계십니다. 자연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제멋대로 횡포를 부리게 되면 반드시 바로잡고 마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자연의 횡포를 바로잡지 아니하고 버려 두고 계시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한 경우 곧 다음과 같은 경우에는 속히 회개를 하고 여호와 하나님께 구원을 부르짖어야 합니다; “해와 같은 천체가 더 이상 빛을 생산하지 않습니다. 그에 따라 달과 같은 반사체가 캄캄하게 됩니다. 노아 홍수 때처럼 비가 멈추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자연의 횡포를 당하기 전에 여호와 하나님께 회개하고서 구원을 부르짖으라는 것입니다”(12:2의역);

2)    그런데 여호와신앙을 잊어버린 캄캄한 시대가 다윗왕조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가장 캄캄한 시대가 유다왕국의 악한 왕 므낫세의 시대입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들이 여호와신앙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며 세상의 권력에 취해서 약자를 착취하고 살해하는 이른바 포악한 세상을 만들고 만 것입니다(왕하21:1-16, 6:1-13). 초대교회 시대에 사도 바울 역시 그의 로마서 제1장에서 그러한 무신론적인 세태가 창조주 하나님의 구원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1:18-32).

(3)  3. 그런 날에는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떨 것이며, 힘있는 자들이 구부러질 것이며, 맷돌질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칠 것이며, 창들로 내다보는 자가 어두워질 것이며”(12:3); 그런데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구하지 아니하고 그와 같은 자연의 재앙이 인간의 과학의 발달로 극복이 될 수 있을까요? 절대로 그럴 수가 없다는 사실을 본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예언하고 있습니다;

1)    첫째, 자연재해를 막지 못하여 가장이 그 피해가 자신의 집을 덮치는 것을 보고서 어쩔 도리가 없어 그저 벌벌 떨게 됩니다(12:3a).

2)    둘째, 권력으로 횡포를 일삼던 자들이 자신의 권력으로도 그 재앙을 막지 못하여 그저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쓰러질 따름입니다(12:3b).

3)    셋째, 흉년이 계속되고 있으므로 방앗간이 조업단축에 들어가고 나중에는 그만 휴업상태에 들어가고 맙니다(12:3c). 한마디로, 기아로 죽는 자들이 속출하고 있는 것입니다;

4)    넷째, 세상이 캄캄하게 변하고 맙니다. 아름다운 자연환경이 사라지고 하늘에는 장대비가 땅에서는 화산폭발과 홍수가 온 지면을 휩쓸고 있습니다. 따라서 창밖을 내다보아도 온통 세상에는 하나님의 진노와 죽음의 심판 밖에 없습니다(12:3d). 한마디로, 역사의 심판이 이 땅에 임하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결론적으로, 이스라엘제국의 제2대 황제인 솔로몬이 그만 세상의 영광과 권력에 취하여 그의 통치 후반기에 여호와신앙을 떠나 우상을 섬기며 또한 자신의 세상적인 지혜를 자랑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결과 그가 말년에 얼마나 후회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와 같은 그의 탄식과 회한이 잠언과 전도서라는 히브리정경을 남기게 됩니다. 그 가운데 오늘 살펴본 바와 같이 솔로몬 왕은 청년의 때에 하나님이 만든 세상의 오묘함과 인생과 역사의 섭리를 바라보고서 빨리 여호와신앙을 확실하게 가지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수많은 시행착오와 하나님의 진노를 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솔로몬 왕의 지적이 그의 전도서 제12장 제1절에서 사용하고 있는 히브리어 보레에카에 오롯이 담기어 있습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자세히 알았는지 몰랐는지 몰라도 히브리어 보레에카를 한국어로 번역할 때에 선교사들이 그 자리에 창조주를 대입한 것은 참으로 신의 한수입니다. 왜냐하면, 그 하나의 용어로 말미암아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가 자연계는 물론 인생사와 인류의 역사에 두루 미치고 있으며 오늘날에도 그와 같이 치밀하게 심판과 구원의 역사를 베풀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기 쉽게 가르쳐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자신의 인생 가운데 그리고 사랑하는 동족들의 역사 가운데 구원을 베풀고 계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나아가서 현재진행형인 코비드19 전염병도 우리 모두 하나님을 올바로 섬김으로써 속히 극복될 수 있기를 간구하는 바입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