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22년 손진길 목사 설교문

하나님의 공과 의 곧 하나님의 심판과 칭의의 은혜, 그리고 육신을 이기게 하는 성령의 능력에 대하여(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4. 5. 08:49

제목; “하나님의 공과 의 곧 하나님의 심판과 칭의의 은혜, 그리고 육신을 이기게 하는 성령의 능력에 대하여”(119:121, 7:21-8:6) (참고구절; 28:30, 3:19-31)

설교일; 주후 2024410일 주일

작성자; 손진길 목사(45일 화요일 작성)

 

저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한국인 성도들은 유대인 랍비 출신인 사도 바울과 가장 큰 차이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한국인 성도들은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는 신 구약 성경을 읽고 있지만 사도 바울은 구약 곧 히브리어로 기록되어 있는 두루마리 경전을 읽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 말씀의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글자는 한국어가 아니고 히브리어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읽고 있는 히브리경전이 하나님말씀의 의미를 우리가 읽고 있는 한국어로 된 성경번역본보다는 더 정확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한 사실을 확연하게 깨달을 수 있는 대목을 하나 예로 들자면, 오늘의 본문으로 선택한 시편 제119편 제121절입니다. 히브리어로 보면, 하나님의 심판이나 판결을 의미하고 있는 미쉬파트’(מִשְׁפָּ֣ט)라는 용어와 하나님의 뜻에 맞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체다카’(צֶ֑דֶק)라는 용어가 그 구절에서 동시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경전을 읽고 있는 사도 바울의 경우에는 그 의미의 차이를 금방 파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와 같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는 성경을 읽고 있는 성도들은 그 의미의 차이를 성경신학에 정통한 사람이 한국말로 정확하게 설명하여 주지 아니하는 한 개념의 혼란 가운데 엄청 헤매게 됩니다.

따라서 우선 그 구절에 대하여 한국어 번역본을 살펴보게 되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한국어 개역본입니다; “121. 내가 (미쉬파트)(체다카)를 행하였사오니, 나를 압박자에게 붙이지 마옵소서”(119:121). 다음은 한국어 개역개정본입니다; “121. 내가 정의(미쉬파트)공의(체다카)를 행하였사오니, 나를 박해하는 자들에게 나를 넘기지 마옵소서”(119:121);

일반적으로 인간의 정의(justice)와 하나님의 공의(righteousness)는 그 개념이 다릅니다. 인간들은 자신들이 소속되어 있는 집단에서 재판을 열어 자신들이 만든 법률에 의하여 유죄로 정죄가 되지 아니하는 경우에는 모두가 무죄한 의인으로 여김을 받고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정의의 개념입니다.

그 반면에 하나님의 공의는 인간의 법정이 아니라 천국에 계시는 하나님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아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에 합치가 된다고 하는 판결이 나오는 경우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일반적인 개념의 차이를 반영하여 한국어 개역개정판 성경을 읽어보면 큰 혼란에 처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히브리어 미쉬파트를 정의로 번역하고 있고 체다카를 공의로 번역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혼란을 조금이라도 수습하기 위하여 애초의 번역인 개역판을 다시 살펴보게 됩니다. 그 경우에는 다행스럽게도 하나님의 공의를 둘로 갈라서 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조금만 깊이 묵상을 한다면, 다음과 같은 의역이 가능합니다; “은 하나님의 엄격하신 재판을 말하고 있으며 그것이 미쉬파트의 의미이다. 그리고 는 하나님의 을 만족시키고 있는 체다카를 말하고 있다”(119:121의역).

우리가 어렵게 발견하고 있는 그러한 개념의 차이를 사도 바울의 경우에는 금방 파악하여 그 다음의 복음적인 논리의 전개로 넘어갔을 것입니다. 그 흔적을 그가 저술한 교리서인 로마서 제3장과 제7장 그리고 제8장에서 풍성하게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그 점을 먼저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로마서 제3장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의체다카의 개념을 사용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27.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29.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30.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31.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3:19-31);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심판인 미쉬파트와 다른 개념인 하나님의 의를 말하고 있는 체다카의 개념을 동시에 사용함으로써 하나님의 율법에 따른 심판과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성도들에 대한 칭의의 은혜를 참으로 알기 쉽게 본문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역사 가운데 아버지 하나님의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뜻을 만족시키고 있는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희생제사가 있었기에 이제는 그 사실을 믿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는 자는 누구나 그리스도의 공로로 의로운 자로 여김을 받아 하나님의 율법에 따른 심판대를 통과하여 천국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자녀로 영원히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의 핵심입니다;

둘째로, 사도 바울은 율법에 따른 하나님의 심판과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믿고서 살아가고 있는 성도의 믿음생활의 차이를 그의 로마서 제7장과 제8장에서 계속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을 실천하는 이방인 선교사로 계속 살아가고 있지만 자신의 이기적인 속성과 율법에 저촉이 되는 육신적인 삶의 행태를 온전히 청산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에 따라 사도 바울이 주님께 온전한 구원을 달라고 계속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 결과 사도 바울이 부활 승천하신 주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부탁하여 성도들에게 보내어 주신 보혜사 진리의 성령님의 내주 역사하심을 영적으로 깨닫고 있습니다. 드디어 사도 바울이 고백하고 있는 만고의 진리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 자신이 하나님의 구원을 받기에 합당한 의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비로소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있는 의인의 길에 들어선 것이며 영생의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그 길을 끝까지 달려갈 수 있도록 보혜사 성령님께서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붙들어 주고 있다는 귀한 깨달음입니다. 그와 같은 설명이 로마서 제7장 제18절부터 제8장 제17절 사이에 풍성하게 기록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제는 본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한가지 더 살펴볼 대목이 있습니다. 그것이 출애굽기 제28장 제30절에 기록되어 있는 대제사장의 판결 흉패에 관한 다음 구절입니다; “30. 너는 우림둠밈판결 흉패 안에 넣어 아론이 여호와 앞에 들어갈 때에 그의 가슴에 붙이게 하라. 아론은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흉패를 항상 그의 가슴에 붙일지니라”(28:30).

대제사장 아론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존전에 들어서게 되면 그 심판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모세의 출애굽기에 기록이 되고 있는데 그것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우림둠밈입니다;

그 의미는 우림이란 하나님의 빛이며 둠밈이란 완전하다는 것입니다. 그 우림과 둠밈이 있어야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죽임을 면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훗날 예수 그리스도가 실천한 여호와 이레 하나님의 어린양의 영원한 대속의 제사 곧 십자가의 희생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가 우림처럼 성도를 비추고 있는 빛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제자 답게 온세상에 복음을 전하며 그리스도의 제자를 양성하여 세상으로 파송하는 온전한 성도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마치 둠밈처럼 하나님의 심판대를 통과하여 영생의 구원으로 들어가는 방법이 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와 같은 사전 지식을 가지고 이제부터 본문의 내용을 한 구절 씩 다음과 같이 살펴보면서 묵상을 통하여 얻은 교훈을 함께 설명을 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로, “121. 내가 (미쉬파트)(체다카)를 행하였사오니, 나를 압박자에게 붙이지 마옵소서”(119:121);

(1)  여기서 피조물에 불과한 시편의 저자가 감히 하나님의 엄격한 재판을 말하고 있는 미쉬파트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자신의 무죄함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구약시대 익명의 여호와의 종이라고 하더라도 그만한 율법적인 완전함을 주장할 수가 있을까요? 훗날 예수님을 찾아와서 구원의 방도를 알고자 했던 부자청년조차 자신은 율법을 온전히 지켰다고 주장했지만(18:21) 예수님의 시각에서는 죄인에 불과합니다; “1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18:19);

(2)  그러므로 한가지 용어가 더 붙어 있습니다. 그것이 공식적인 하나님의 재판을 말하고 있는 미쉬파트와는 다른 용어 체다카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합치가 되는 의로운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과연 시편의 저자가 하나님의 뜻을 무엇이라고 파악하고 있기에 그것을 감히 다 실천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일까요? 한마디로, 선민 유대인들은 율법을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면서 온전히 지킨 것이 아닙니다. 그저 유대교지도자들과 이웃들의 눈에 율법의 규정을 준수하는 것으로 비치게 되면 그것으로 자신은 의인이라고 주장한 것입니다(18:11-12).

(3)  두려우신 하나님의 눈으로 보자면, 구약시대에 여호와의 종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완전히 실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선지자 요나의 경우를 살펴보면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갈릴리 변방의 선지자 요나에게 동쪽 티크리스 강 상류 니느웨에 살고 있는 앗수르 백성들에게 회개하지 아니하면 40일 후에 창조주 여호와의 진노로 멸망의 심판을 당하게 된다는 말씀을 그곳 성읍에 가서 선포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위하여 이방 땅에 나아간 적이 없기 때문에 요나가 처음에는 그 명령에 불순종하고 있습니다”(1:1-3);

 그 기록을 가지고 훗날 예수님은 선민이라고 자부하고 있는 유대인들이 사실은 전부 선민사상과 하나님말씀 독점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죄인들이라고 갈파하고 있습니다(16:1-4).

(4)  요컨대, 시편의 저자가 자신은 하나님의 공식적인 재판석상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평소의 삶에 있어서도 온전한 인물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어폐가 있습니다. 그 사실에 의지하여 자신을 향하고 있는 압박자의 박해로부터 구원하여 달라고 하는 호소는 여호와 하나님의 긍정적인 반응을 얻기가 힘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법정에서 심판을 통과하고 동시에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실천하며 세상의 박해를 이겨낼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얻을 수가 있을까요? 그 유일한 방법이 훗날 사도 바울의 지적에 따르면 하나님의 의로서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그 교훈의 의미를 깨닫고 보혜사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 그리스도의 제자로 한평생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모두(冒頭, 글의 앞머리)에서 이미 설명을 한 바 있습니다(3:19-31).  

 둘째로,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7:21-25);

(1)  익명의 시편 제119편의 저자인 선민 유대인과는 달리 사도 바울은 자신의 속에는 하나님의 공식적인 재판에서 의인으로 분류될 수 있는 의로움도 없으며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실천할 수 있는 능력도 없음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자신은 속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면서 그 뜻을 실천하고자 결심하고 있지만 자신을 구성하고 있는 육신이 이기적인 욕심과 자기보호의 본능이 워낙 강하여 자신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한 인생을 살아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21-23).

(2)  따라서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감사하고 있습니다(25).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알고서 하나님의 긍휼의 은혜를 호소하는 자신에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주셔서 이제는 칭의를 받은 새로운 인생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하여 주셨으니 그것이 감사할 따름이라는 사도 바울의 신앙 고백입니다(24-25). 그런데 사도 바울의 진술인 제25절 말씀을 자세하게 음미해보면 다음 두가지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진심으로 감사한다는 것입니다;

(3)  또 하나는, 그러나 여전히 자신의 육신이 마음의 소원과는 달리 복음을 실천하는 성도의 삶을 방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소욕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달라고 은연중에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그 제자로 그리고 하나님의 종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성도들에게 크게 임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아버지 하나님께 부탁하여 성도들에게 보내주시는 보혜사 성령님의 내주 역사하심에 대한 설명이 그 뒤를 잇고 있는 것입니다(8:1-4).

셋째로, “1. 그러므로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5.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8:1-6); 사도 바울은 보혜사 성령님의 내주 역사하심에 대하여 참으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흔히 사도 바울의 그리스도론을 영적인 기독론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사도 요한이 주장하고 있는 로고스 기독론과 더불어 그리스도론의 쌍벽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경험적으로 진술하고 있는 보혜사 성령님의 내주 역사하심의 특징이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신 성도가 스승이신 예수님의 교훈과 생애를 깊이 묵상하면서 그 삶의 방법을 그대로 사용하여  의사결정을 하고 행동하게 되면 그것이 의롭다고 하는 사실을 성도에게 내주하여 역사하고 계시는 보혜사 성령님께서 거듭 확인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믿음의 확신을 얻은 성도는 율법을 동원하여 자신을 정죄하고 있는 악한 영들의 탄핵에서 벗어나 영적인 평안을 회복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1).

(2)  둘째, 예수 그리스도는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무덤에 들어가셔서 3일만에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으로 영생의 몸으로 부활하여 40일 후에 승천하십니다. 그 다음에는 창조주 아버지 하나님의 보좌 옆에 좌정하십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보혜사 성령님께서 성도에게 내주하여 끊임없이 자신의 미래상으로 확인해주고 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속한 죄와 사망의 권세가 성도들을 완전히 구속할 수가 없습니다. 이미 영적으로 자신의 승리와 미래의 영광을 확신하고 있기에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복음을 실천하는 일에 있어서도 궁극적으로는 승리를 쟁취하게 되는 것입니다(2, 8:31-39).

(3)  셋째, 예수님과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보혜사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 영적인 전투에서 육신의 탐욕을 이기고 승리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 일을 위하여 내밀하게는 성도들의 속사람에 건설이 되어 있는 그 성령의 전에 부활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하나님의 부활의 영과 함께 영적으로 임재하고 계십니다(14:16-20, 8:9-17). 따라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영적으로 동행하고 있는 인생이 바로 성도의 남은 삶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육신적인 세상의 욕심을 이기는 놀라운 승리와 영적인 평안의 회복이 다시 찾아오게 됩니다(5-6).

(4)  그와 같은 선례가 바로 아버지 하나님의 복음선포를 위한 예수님의 공생애이며 이웃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으심과 부활입니다(3). 그 선례를 따라가는 그리스도의 제자인 성도들에게는 오늘날에도 그 믿음의 소원을 이룰 수 있도록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임재하여 언제나 동행하고 계시는 것입니다(4);

결론적으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피조물을 마치 자식과 같이 돌보시고 그 생명을 하나같이 살리고자 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생명 사랑이며 공의의 정신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인 시편 제119편 제121절에서는 익명의 시편저자가 하나님의 공의를 공과 의로 분리하고 있습니다. 그 의미는 (1) 첫째, ‘이라고 하는 히브리어 미쉬파트가 율법을 엄격하게 적용하는 공식적인 하나님의 재판을 말하고 있습니다. (2) 둘째, ‘라고 하는 히브리어 체다카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실천한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입어서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가게 되는 성도의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이 공과 의를 분리함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입어 아버지 하나님의 종말심판에서 구원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쉽게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도 바울의 지적과 같이 남아 있는 성도의 삶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마음속으로는 복음을 실천하는 온전한 삶을 살아가고 싶지만 육신적인 세상의 욕심이 그것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따라서 부활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부탁하여 성도들에게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어 주신 것입니다(14:16-17, 8:9-17).

그와 같은 맥락에서 로마서 제8장에 기록되어 있는 사도 바울의 영적인 기독론의 설명을 자주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아무쪼록 자신의 속사람속에 이미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내주하시고 성도의 삶을 승리와 평안으로 인도하고 계신다고 하는 귀한 복음을 깊이 깨닫고 감사하는 성도의 삶들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