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22년 손진길 목사 설교문

십자가 현장에서 발생하고 있는 마지막 3가지 일의 깊은 의미(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5. 17. 11:09

제목; “십자가 현장에서 발생하고 있는 마지막 3가지 일의 깊은 의미”(19:23-28)

설교일; 주후 2022522일 주일

작성자; 손진길 목사(517일 화요일 작성)

 

이 설교문을 작성하고 있는 시점이 상당히 묘합니다. 어제는 516일이고 오늘은 517일이기 때문입니다. 두 날자는 한국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체험한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두 날자 모두 한국에서 군사쿠데타가 발생하였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1961516일에는 육사 제8기 출신 김종필이 동기들과 함께 개인적으로 처삼촌이며 육사 제2기 선배인 소장 박정희를 등에 업고 군사쿠데타를 벌였습니다.  그것이 성공하여 한국의 정권을 손에 넣었습니다;

19791026일에 대통령 박정희가 육사 동기이며 고향 후배인 안기부장 김재규의 배신으로 총에 맞아 숨을 거두자 한국에서는 유신체제가 힘을 잃어버리고 일순간 계엄군이 득세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해 1212일에는 군부내의 사조직인 하나회가 중심이 되어 계엄사령관을 체포하고 권력을 장악하는 이상한 시대가 전개되었습니다.

마침내 이듬해 곧 1980517일에 전두환과 노태우 등 하나회의 리더들이 앞장을 선 또 하나의 군사쿠데타가 성공하여 그들 신군부가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됩니다;

 그러나 신군부의 권력장악에 반대하는 시민의 봉기가 광주지역에서 다음날 발생하고 맙니다.

그렇지만 신군부가 군대를 동원하여 광주지역을 아예 봉쇄하고 시민군을 신속하게 토벌합니다. 그 때문에 1980년부터 1993년초까지  신군부를 이끌었던 전두환과 노태우가 연이어 대통령에 당선이 되어 한국을 통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한국인들은 5.16의 의미와 5.17의 의미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독일의 헌법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다고 하는 명제, “성공한 군사쿠데타는 처벌할 수가 없다는 법이론에 대해서도 일부 수긍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20세기 말엽에 김영삼 대통령의 집권시절에 신군부 출신 전직 대통령 두사람을 법정에 세워 처벌한 바가 있기에 역사적으로 그 명제가 한국에서는 크게 수정이 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와 같은 한국의 현대사 이야기를 여기서 꺼내고 있는 이유는 오늘 십자가 현장에서 발생하고 있는 마지막 3가지 일의 의미를 제대로 살펴보기 위하여 그 대목에 대한 역사적인 이해가 먼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사람의 인위적인 쿠데타가 결국은 하나님의 역사섭리에 의하여 단죄가 되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만다는 진리성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한국의 사례가 나름대로 도움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옛날 예루살렘에서는 주후 324월 중순경 유월절 행사가 시작되는 그 밤에 나사렛 예수가 전임 대제사장 안나스와 현임 대제사장 가야바가 보낸 무장세력에 의하여 체포가 되고 그들에게 연행이 됩니다. 날이 밝아 오기 전에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전격적으로 예수님을 재판하고 유대교리를 어긴 중죄인으로 정죄하고 맙니다.

그들은 사형집행권을 보유하고 있는 로마총독 빌라도에게 나사렛 예수의 신병을 인도하면서 십자가 처형을 요구합니다(18:28-31). 그들의 명분은 나사렛 예수가 유대인들을 선동하여 로마황제에게 반역을 도모한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입니다.

빌라도 총독은 골치가 아픈 유대교 종파 간의 분쟁에 휘말리지 아니하려고 몸부림을 쳐보지만 소용이 없습니다. 반역을 도모한 자를 무죄 석방하게 되면 빌라도 역시 로마황제에게 역심을 품고 있는 인물이라는 유대교지도자들의 주장과 그에 호응하고 있는 유대인들의 목소리가 너무 컸기 때문입니다(19:12, 23:23).

결국 대제사장과 유대교 실세들의 뜻대로 나사렛 예수가 허무하게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처형을 맞이하고 맙니다(19:16-19). 그것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유대교지도자들의 쿠데타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유대교지도자들의 쿠데타가 진실로 성공한 것일까요? 그것이 아닙니다. 그로부터 40년도 지나지 아니하여 주후 70년에 로마황제에게 반란을 도모하다가 유대인들이 로마의 대군에 의하여 무려 인구의 3분의 1이 죽임을 당하고 유대인 사회가 완전히 가나안 땅에서 멸망을 당하고 마는 비극을 경험하게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에 나사렛 예수의 교훈과 생애는 그리스도의 무덤 속 부활과 그 제자들의 회심에 의하여 초대교회의 역사로 되살아나게 됩니다. 그렇다면, 십자가 처형의 현장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예수님이 자신의 대속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장차 복음의 새로운 시대가 전개된다는 사실을 어떠한 방법으로 암시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 대목에 대한 고찰을 해보기 위하여 오늘은 본문말씀으로 요한복음 제19장 제23-28절 말씀을 한번 깊이 있게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강해설교의 제목을 십자가 현장에서 발생하고 있는 마지막 3가지 일의 깊은 의미라고 정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본문에 대한 구절풀이와 더불어 그 깊은 의미를 나름대로 묵상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23. (로마) 군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4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24. (로마) 군인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22:18)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로마) 군인들이 이런 일을 하고”(19:23-24);

(1)  예수님께서 골고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때는 태양력으로 4월 중순이며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시작된 바로 그날 금요일입니다. 그 무렵의 예루살렘은 계절적으로 꽃이 피는 봄철이지만 아직 날씨가 쌀쌀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나서 로마의 군인들이 죄수의 형편을 돌보지 아니하고 그 옷을 벗겨서 서로 차지하고자 야단입니다(23). 그것은 두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십자가 처형을 당하는 죄수는 보통 1주일 정도 매달려 있게 되는데 흔히 3-4일이면 극심한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죽게 됩니다. 그렇게 어차피 죽을 운명에 처하고 있는 죄인에게 옷을 입힐 필요가 없다고 로마 군인들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겨우 수치를 가려줄 수 있는 헝겊을 제외하고 나머지 옷은 속옷까지 벗기어 자신들이 차지하고 마는 것입니다;

(2)  둘째, 고대사회에서는 옷이 비싼 물건이므로 처형장의 간수들이 그것을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반()사막성 기후인 가나안 땅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 특징이 낮에는 덥고 밤에는 매우 추운 날씨입니다. 따라서 두꺼운 겉옷을 이불처럼 사용하는데 그 값이 만만하지가 아니합니다. 값이 나가는 물건이므로 로마의 군인들이 서로 차지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4명의 군인들이 각각 4분의 1씩 겉옷을 나누어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은 속옷입니다. 그것은 아래 위로 통으로 짠 것이므로 나누는 것보다 하나로 차지하는 것이 더 이익입니다. 따라서 제비뽑기를 하여 한사람이 차지하는 것으로 결론이 나고 있습니다(24).

(3)  지금까지 설명한 내용은 피상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이제부터 그 깊은 의미를 한번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만민구원을 위하여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지만 그 공로로 3일 후에는 무덤에서 영생의 몸으로 부활하실 것입니다(8:31, 9:31, 10:33-34). 그 다음에는 40일간 제자들을 다시 불러모아 재교육을 하신 후 승천하여 천국으로 들어가시도록 되어 있습니다(14:1-3). 그 일을 통하여 이 세상의 죄악과 사망을 이기신 부활의 주님께서는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실 것입니다. 그 세상은 하나님의 복음을 선민 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전파하여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새 시대를 여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8:11-12). 그러므로 자신이 이 세상에 남기게 되는 마지막 옷을 의인인 선민으로 자처하면서 도리어 예수 그리스도를 정죄한 후 제멋대로 처형하고 있는 유대인들이 아니라 이방인의 대표자인 로마의 군인들에게 주고자 하십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만민구원의 복음의 핵심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대목이라고 하겠습니다. 요컨대,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미 말씀하신 포도원 농부의 비유와 같은 것입니다(21:33-43).

(4)  참고로, 청년 장군 다윗이 사울왕에게 쫓기고 있을 때에 지은 시가로 보이는 시편 제22편 제18, “(그들이)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라는 내용이 여기서 인용이 되고 있습니다. 그 본래의 의미는 다윗 일행이 숙적 사울왕의 군대에게 체포를 당하게 되면 그와 같은 끔찍한 처형을 당하게 될 것이므로 그것을 하나님께서 사전에 예방하여 달라고 하는 간절한 구원의 기도입니다. 그로 미루어 보아 주전 11세기 사울왕의 시대에 발생하고 있는 그 일이 천년의 세월이 지나 예수님의 시대에도 변함없이 발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천년의 세월이 지나도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아니하고 적을 없애 버리고자 하는 인간의 속성은 전혀 변함이 없다고 하겠습니다.  

둘째로, “25.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이모글로바의 아내 마리아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26.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19:25-26a);

(1)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예수님의 십자가처형의 현장에서 발생하고 있는  첫번째의 교훈이 그 유품을 선민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 로마군인에게 주는 것이며 그것이 만민구원의 뜻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두번째의 교훈은 본문에서 볼 수 있는 그대로 예수님의 남자제자의 대표격인 11사도 보다는 여인들이 더욱 용감하게 끝까지 주님을 따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2)  고대 가부장사회에서 남성인 예수님이 여자제자들과 함께 동행할 수가 없어서 자신을 수행하는 12사도를 남자제자 가운데서 선발하고 있습니다(10:2-4). 그렇지만 그들은 예수님이 체포를 당하시자 대부분 뿔뿔이 흩어지고 맙니다(26:56). 그 대신에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라온 여자분들이 십자가처형의 현장까지 따라오고 있습니다(23:27). 그들의 신원이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 이모 살로메, 숙모로 보이는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 그리고 친척은 아니지만 가장 열성적인 여제자 막달라 마리아입니다(25);

(3) 초대교회의 역사에 있어서 그들 여제자들의 활약이 대단합니다(16:1-4, 6, 13, 15). 그리고 구교에서는 여성도들의 봉사와 헌신을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신교의 역사도 그러합니다. 따라서 만약 고대사회에서 남녀차별이 없었다고 한다면 그들 여제자들이 능히 사도의 위치를 점하였을 것입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이 대목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훗날 이 세상에 남녀평등의 복음시대가 찾아올 것임을 시사해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4)  참고로, 4복음서의 저자인 사도 요한은 자신의 모친이 예수님의 이모라는 사실을 은근히 기록으로 남기고 있습니다(19:25). 공관복음을 참조하면, 세배대의 아내의 이름은 살로메로 보입니다(15:40). 그리고 사도 요한은 자신이 12사도 가운데 유일하게 예수님의 십자가처형의 현장에 있었던 자임을 스스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대목에 대한 흥미로운 기술이 바로, “26.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19:26a)라는 것입니다;

셋째로,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27.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28.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 마르다’(69:21) 하시니”(19:26b-28);

(1)  예수님께서 자신의 것을 마지막까지 이방인들에게 아낌없이 주신다는 교훈(23-24), 여성제자들이 사도인 남자제자들 보다 더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고 있다는 교훈(25), 그리고 영적인 관계가 혈연관계보다 더 중요하다는 교훈(26-27) 등 이상 세가지가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19:28a)에 포함이 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2)  예수님은 남자인 친동생이 4명이나 있습니다. 그들의 이름이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입니다(6:3).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어째서 친동생에게 모친의 노후를 부탁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막내제자인 사도 요한에게 부탁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추정할 수가 있습니다; 첫째, 십자가처형의 현장까지 따라온 남자제자는 사도 요한이 유일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에게 모친의 노후를 돌보아 달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3)  둘째, 그렇다고 하더라도 사도 요한을 통하여 남동생들에게 모친의 노후를 돌보아 달라고 전언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그렇게 하지 아니한 것일까요? 그 이유는 세상적인 안목으로 보면, 예수님의 집안은 가난하지만 사도 요한의 집안은 부유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식객으로 지낸다고 하더라도 부잣집 그것도 이모의 집이 편한 것입니다.

(4)  셋째, 예수님의 12사도 가운데 가장 오래 생존하는 자가 사도 요한입니다. 그는 주후 70년에 로마군대의 침입으로 유대사회가 가나안 땅에서 절단이 나자 이모 마리아를 모시고 소아시아 에베소 지역으로 피난을 가게 됩니다. 그와 같은 먼 훗날을 벌써 아시고 예수님께서는 모친을 사도 요한에게 부탁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5)  넷째, 그 이상의 의미를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혈연적인 관계보다 더 중요한 영적인 복음의 시대가 곧 도래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신 다음 무덤에서 3일만에 부활하시게 되면 영생구원의 복음의 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그때에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온세상에 전파하는 성도들의 공동체는 새로운 영적인 인간관계로 형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예수님은 복음사역을 하는 공생애 가운데 벌써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바가 있습니다; “49.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50.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12:49-50);

(6)  이 땅에서 의미를 지니는데 불과한 혈연관계보다는 영생구원의 천국에서 영원한 의미를 지니게 되는 성도 간의 영적인 관계가 더욱 중요합니다. 영생구원의 천국에 들어가게 되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어서는 더 이상 장가를 가고 시집을 가거나 자녀를 생산하는 과정이 일체 사라지고 맙니다(22:30). 그러므로 혈연관계가 아니라 영적인 성도들의 사랑의 관계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반영하여 예수님께서 자신의 모친의 노후를 사랑하는 막내 제자이며 이종동생인 사도 요한에게 부탁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골고다언덕에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때 그곳에서 3가지의 기이한 일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1)  첫째로, 예수님의 옷을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인 로마의 군인들이 나누어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소유했던 마지막의 것을 이방인에게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과 무덤 속 부활로 말미암아 선민 뿐만 아니라 이방인까지 온세상을 구원하는 만민구원의 복음시대가 열리고 있다는 사실을 미리 보여주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2)  둘째로, 예수님의 12제자 가운데 유일하게 사도 요한만이 예수님의 십자가처형의 현장에 따라오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갈릴리에서 온 여성제자들이 그 자리에 대거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시대가 도래하게 되면 남성보다 여성들이 더욱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파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3)  셋째로, 예수님은 자신의 친동생이 아니라 막내제자인 사도 요한에게 모친의 노후를 돌보아 달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혈연관계보다는 영적인 성도들의 관계가 더욱 중요하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성도 간의 사랑과 돌봄이 훗날 영생의 천국에서의 하나님 자녀의 관계를 미리 보여주는 예표라고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예수님의 십자가처형의 현장에서 보여주고 있는 이상 3가지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땅끝까지 전파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