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요한복음 강해 제97강(요11:11-16)(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4. 9. 14:02

요한복음 강해 제97(11:11-16)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624()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11:11)

 

예수님은 자신을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한 마디로 다음과 같이 요약을 하고 있습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6:39). 예수님의 사명은 아버지께서 보내어주시는 양을 한 마리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그것입니다. 이 땅에 성육신하시고 고생스러운 공생애의 삶을 사시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사로를 살리기 위하여 예루살렘 가까운 동네 베다니까지 찾아가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신변을 무척 염려하고 있습니다(11:8). 잘못하면 그곳에서 체포를 당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가까이만 오면 잡아서 죽이려고 벼르고 있는 자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8:59, 10:31, 39). 그들은 유대교의 실권자들입니다. 산헤드린 공회를 좌지우지하고 있는 자들입니다(7:32, 45, 8:3). 그들은 나사렛 예수를 신성모독죄로 처단하려고 기회만 노리고 있습니다(5:18, 10:33).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예루살렘 근방으로 다시 찾아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나사로를 다시 살리기 위한 것입니다.

중병으로 죽어가고 있는 나사로는 예수님을 영접했던 집안의 사람이며 예수님의 친구입니다(11:1-5, 11). 그들 가족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있습니다(11:21). 이제 나사로가 중병이 들어서 혼자서 죽음의 골짜기를 헤매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잃어버린 양과 같습니다. 목자를 떠나서 혼자서 죽음의 골짜기에서 헤매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베다니에서 나사로를 만나게 하시고 친구가 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해봅니다. 그 뜻은 나사로를 예수님의 양으로 삼아서 예수님에게 보내어 주었다는 것입니다(6:39). 그러므로 메시아이며 부활의 주님으로 이 세상에 오신 선한 목자 예수님은 그를 다시 찾고 반드시 그 목숨을 살려내어야만 합니다(10:14-15). 그것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입니다. 그리고 종국적으로는 유한한 목숨 대신에 영원한 생명을 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 표현이 바로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입니다(11:11). 차제에 그를 무덤에서 살려냄으로 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부활이 무엇이며 부활을 가져다 주는 구세주가 누구인가를 똑똑하게 인식시키고자 하고 있습니다. 그 사명은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예수님의 지상명령입니다. 그 사명의 무게는 이 땅에서의 자신의 목숨과도 바꾸어야만 하는 중차대한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미리 외치고 있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10:11),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10:14-15).

베다니 나사로 집안의 사람들은 나사렛 예수가 메시아임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어떠한 불치의 병이라도 고칠 수 있는 신성한 능력의 소유자임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11:21). 그래서 중병이 든 나사로가 죽기 전에 와서 낫게 해주기를 바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정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보다 훨씬 더 큰 일을 수행하시는 임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임무는 병 치료 정도가 아니라 아예 죽은 자를 다시 살려내는 부활의 사명입니다. 유한한 목숨을 지켜주는 것 정도가 아니라 마침내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11:23-26). 지금 그 일을 감당하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버릴 각오로 예루살렘 가까이 다시 진입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죽기살기로 실천하게 되면 다음과 같은 상급이 주어진다고 벌써 설명한 바가 있습니다;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10:17). 하나님께서 인생들에게 가장 기뻐하시는 일은 잃어버린 양을 찾아서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행하는 자에게 항상 함께 하십니다. 임마누엘의 은혜가 그 일을 행하는 자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내주하시는 하나님께서 목자에게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담력과 말씀의 능력을 주십니다. 설혹 목숨을 잃어버리게 된다고 하더라도 다시 무덤 속에서 부활을 시키는 무한한 생명의 능력으로 역사를 하시는 것입니다(7:16). 그와 같은 사실이 빈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보여주고자 하십니다. 이제 베다니에서 비록 유한한 목숨에 관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인류역사상 최초로 무덤 속 부활의 사건이 바야흐로 발생할 것입니다.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11:15)

 

베다니의 나사로와 그의 두 누이동생인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천국 메시지를 전하며 치유와 축사(逐邪, 사악한 영인 귀신을 쫓아내는 것) 등 하나님의 능력을 행할 수 있는 선지자로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로마제국을 몰아내고 다윗의 제국을 다시 일으키실 메시아로 믿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람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직 그 사람 예수가 사실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부활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창조주라는 사실을 믿고 있는 믿음은 아닙니다(1:1-5). 당시 창조주 하나님 한 분만을 전심으로 믿고 있는 유대인들의 사회에서는 역시 창조주의 영광을 지니고 있는 독생자에 대한 믿음 또는 하나님 아들의 존재에 대한 믿음은 바랄 수가 없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불멸의 영생과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창조주 하나님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부활과 영생을 줄 것이라는 사실을 아직 알고 있는 자가 없습니다. 그와 같은 유대교의 세상에서 이제 예수님은 자신의 정체가 무엇인지 사람들에게 똑똑하게 보여주려고 하십니다. 그 첫 번째 생생한 교육의 현장이 바로 베다니가 되고 있습니다.

만약 중병에 든 나사로를 고쳐준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지금까지 많이 행해온 일 중의 하나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죽어서 무덤 속에 들어가 있는 나사로를 다시 살려낸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 어떠한 선지자도 행한 적이 없는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이 이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와 같은 입장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시니”(11:14-15).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중병이 든 나사로는 죽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무덤에 들어가 있다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그를 깨우러 오는 것을 보아야만 합니다. 부활과 영생이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신에게 주어진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알고서 남은 인생을 다시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 남은 세월 동안 비록 불편한 육신이지만 그래도 이 세상에서 부활과 영생의 그리스도가 오셨음을 증거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중생한 나사로의 새로운 사명이며 새로운 삶을 주신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한 마디로, 거듭난 성도들이 남은 자신의 인생 동안 행해야만 하는 임무가 부활과 영생의 주님을 세상사람들에게 증거하는 일입니다(24:48, 6:13). 잃어버린 양들에게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자가 되어 그들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양육해내는 것입니다(21:15-19). 그 일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며 천국에서 논공행상을 하실 것입니다.

그와 같은 장래의 일을 아직 열두 제자들이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대표하여 도마가 씩씩하게 한 마디를 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시면 스승 예수님이 체포를 당하고 죽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스승님이 가시고자 하는 그 길을 자신도 용감하게 함께 가고자 하는 것입니다”(11:16). 하지만 인간적인 결심만 가지고서는 그 길을 끝까지 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체포를 당하자 열두 제자들이 모두 도망을 칩니다(14:27-31). 자신의 목숨보다 스승 예수가 더 소중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이 있고 나자 그들의 생각이 달라집니다. 보혜사 성령님이 강림하시고 내주 역사하시게 되자 그들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 잃은 양들을 찾고 돌보는 선한 목자로 거듭나고 있습니다(24:49, 1:8). 결론적으로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고 능력을 주셔야만 하나님의 일을 온전하게 수행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하나님의 임재와 동행이 없으면 인간의 결단과 능력만으로써는 진실로 선한 목자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21:1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