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요한복음 강해 제99강(요11:24-27)(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4. 10. 03:54

요한복음 강해 제99(11:24-27)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625()

 

부활과 생명의 차이(11:24-26)

 

무덤 속에 들어갔던 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 부활입니다. 그런데 부활에도 두 가지의 경우가 있습니다; 첫째는, 요한복음 제11장에서 소개하고 있는 나사로의 부활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부활이 아니라 일시적인 부활입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가 무덤 속에서 되살아나오고 있습니다(11:43-44). 그렇지만 몇 십 년이 지나서 수명이 다하게 되면 다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영생을 누릴 수 있는 부활의 몸을 입은 것이 아니라 나사로가 일정기간만 사용할 수 있는 불완전한 육체를 다시 입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요한복음 제20장에서 말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부활입니다. 다시는 죽음을 경험하지 아니하는 부활입니다. 영생을 누릴 수 있는 부활의 몸을 입고 있으며 그 상태 그대로 승천까지 하고 있습니다(20:17, 고후5:1-4, 24:51). 그렇다면 두 가지의 부활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차이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유한한 목숨과 영원한 생명의 차이입니다. 유한한 목숨이 담기어 있는 육체는 한시적인 삶을 살다가 그 목숨이 수명을 다하게 되면 함께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반면에 영원한 생명이 담기어 있는 부활의 몸은 영생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영생을 누릴 수 있는 부활의 몸을 가지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남은 생애를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지 아니한 경우에는 죽음보다도 못한 부활을 경험하게 됩니다(7:21). 예수님이 그와 같은 경우를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5:29). 여기서 생명의 부활은 영생을 의미합니다. 반면에 심판의 부활은 영벌을 말하고 있습니다. 영원한 형벌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차라리 유한한 삶을 누리다가 모든 것이 소멸되는 목숨보다 못한 것입니다. 영생이냐, 영벌이냐의 구분이 명확하지 아니한 상태에서 바리새인들은 종말론적인 부활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23:8). 그들의 가르침을 따라서 마르다가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11:24). 예수님의 가르침은 마르다의 진술과 다릅니다. 그 이유는 부활과 영생의 주인이 되고 있는 예수님 자신이 믿는 자에게 함께 하면 언제나 영원한 생명의 기쁨을 누리게 된다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11:25-26).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과 성령님의 오심을 염두에 두고서 위와 같이 언급하시는 것으로 보입니다. 성도들에게 성령님과 함께 주님과 하나님 아버지께서 내주하여 역사하시게 되면 이미 성도들이 생명의 기쁨을 이 세상에서 누리기에 충분한 조건이 구비가 되는 것입니다.  

 

미래형 신앙과 현재형 신앙(11:27)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재림하는 것을 앙망하는 사도 요한의 기도로 신약성경이 끝나고 있습니다;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22:20-21). 그렇지만 사도행전 제9장과 제22장에 수록이 되어 있는 사도 바울의 간증을 살펴보면, 그와 같은 미래형 신앙이 현재형 신앙으로 바뀌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열정적인 바리새인 젊은 랍비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환상 가운데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는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을 보고서 누구이신지 그 정체를 확인하고자 합니다. 그가 바라고 있었던 대답은 그 옛날 선지자들이 환상 가운데 야훼 하나님을 만났을 때 들었던 그 대답이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또는 만군의 여호와이시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등의 답변을 기대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전혀 뜻밖의 대답이 나타났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9:3-5, 22:6-8).

인간의 시간개념으로 보면, 세상의 끝 날에 심판이 있을 것이며 그 일을 행하기 위하여 주님의 재림이 있게 될 것입니다(살전4:16-18). 성도들의 부활과 휴거도 그 때 일시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렇지만 회심한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는 주님의 임재와 동행이 미래형이 아닙니다. 그는 이방인 선교사로 일하는 동안 항상 주님과 함께 했습니다. 물론 성령님도 함께 했습니다. 그 대목을 의사 누가가 사실적으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16:6-8).

사도 요한의 기록에 따르면 살아 생전에 성도들의 인생길에 성령님과 예수님의 영뿐만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동행하고 계십니다(14:16-20). 한 마디로,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성도들과 함께 남은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세의 고백에 따르면, 하나님이 바로 성도들의 생명이며 목숨 줄입니다(30:20). 그러므로 삼위일체 하나님과 이미 함께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은 그 속에 영원한 생명력을 영적으로 누리고 있는 자라고 정의할 수가 있습니다. 그와 같은 확신과 경험이 세상을 이기게 하고 고난을 영광으로 바꾸고 있습니다. 믿음 안에서, 이미 영생은 미래형이 아니라 현재형입니다. 그러한 믿음을 가지도록 마르다에게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도전하고 있습니다;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11:26). 그렇지만 마르다의 부활신앙은 여전히 미래형입니다(11:27). 그녀는 세상 끝에 재림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을 기다리며 그 때 이루어지는 부활을 고대하고 있을 뿐입니다. 당장은 오라버니를 잃어버린 슬픔에서 헤어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신 것으로 보입니다(11:35). 그러므로 이제는 눈물을 지우고 나사로의 부활을 다양한 의미로 바라보아야 할 때입니다.

결론적으로, 부활과 영생을 먼 미래에 누리는 것으로 한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당장 이 땅에서도 성도들에게 세상의 고난을 이기게 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내주 역사하심이 있음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당장 필요한 현재형 믿음입니다. 이 땅에서도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성도들의 즐거움이 그 가운데 있습니다. 아무쪼록 천국의 기쁨을 미리 맛보면서(11:26) 푯대를 향하여 달려나가는 믿음의 용사들이 모두 되시기를 바랍니다(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