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요한복음 강해 제100강(요11:28-38)(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4. 10. 03:56

요한복음 강해 제100(11:28-38)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626()

 

무덤으로 가는 길과 예수님에게로 가는 길(11:28-32)

 

사람은 태어나는 그 시간부터 시한부의 인생을 살게 됩니다. 하루를 살고 나면 그만큼 무덤으로 더 가까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너무나 엄중하고도 무거운 중압감이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두 가지의 해법을 사람들에게 제공하시고 있습니다. 그 첫째는 인생이 끝나는 시점과 세포의 사용기한을 명시화하지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언제 자신의 세포가 더 이상 재생되지 아니하는지 그 점을 모르게 섭리하신 것입니다(1:7). 목숨을 유지하기 위한 핵심세포가 그 기능을 상실한다면 그것이 곧 육체적인 죽음입니다. 그릇이 허물어지게 되면 거기에 담겨있던 생명도 딴 곳으로 옮겨가야만 합니다. 어디로 가야만 할까요? 둘째로, 그 생명이 부활과 영생의 주인에게 옮겨질 수 있도록 하나님이 배려하고 계십니다. 인생이 끝나고 생명이 잠을 자게 될 때 그 무덤으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찾아 오시는 것입니다. 그 대목을 설명하고 있는 사도 요한의 기록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11:11),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고 무덤에 가시니”(11:38).

예수님을 자신의 무덤으로 찾아오시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조금 특이한 인생을 살아야만 합니다. 그 방법이 본문에서 소개가 되고 있습니다. 베다니의 마리아의 경우입니다. 그녀는 언니 마르다의 전갈을 받고서 집에서부터 동네 어귀로 예수님을 만나기 위하여 달려 나오고 있습니다(11:28-30). 마르다의 전갈과 마리아의 선택이 여기서는 중요합니다. 그것이 자신의 인생이 슬픔에 잠겨있는 초상집에 계속 머물게 되느냐, 아니면 슬픔을 벗어나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게 되느냐 하는 관건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인생살이 가운데 주님의 전갈을 받게 되는 것이 영생을 얻는 첫 걸음이 됩니다. 누구를 통해서 주님이 나를 천국으로 초청하고 있는지 그것을 살펴야만 합니다. 그 다음에는 비통한 초상집을 벗어나서 부활과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달려 나와야만 합니다(11:29). 그와 같이 주님께 달려 나오는 자가 장차 유한한 삶과 죽음의 슬픔을 벗어나서 부활과 영생의 기쁨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몸은 예수님께 왔으나 심령은 아직 비통함에 젖어 있다(11:33-36)

 

마리아는 예수님께 달려 나왔습니다. 그러나 반갑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있는 그 순간에도 여전히 오라비 나사로를 잃어버린 비통함에 사로잡혀 있습니다(11:32-33). 마리아뿐만이 아닙니다. 그녀의 친지들도 그러합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있는 자리에서 계속 나사로의 죽음을 너무나 슬픔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조문객들입니다. 나사로의 죽음을 함께 애도해주고 상주들을 위로해주기 위해서 초상집에 머물고 있었던 친지들입니다. 마리아가 갑자기 뛰쳐나가자 혹시 나사로의 무덤으로 찾아가서 대성통곡을 하는 것이 아닌가 은근히 걱정이 되어서 마리아의 뒤를 따라 나왔던 사람들입니다(11:31). 슬픔은 이상하게도 전염성이 강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그 슬픔이 엄청나며 그 전파력이 상상을 초월합니다. 이제 가까운 사람에게 죽음이 임했으니 그것이 남의 일이 아닌 것입니다. 너무나 가까이 다가온 그 죽음은 곧 자신마저 집어삼킬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그 사망의 위협 앞에서 자유스러울 수가 있을까요? 목숨을 가지고 태어난 인간들의 숙명적인 공포가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곡성은 자꾸만 강력해지며 길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자리에서도 멈출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실이 진정 슬픈 것입니다. 부활과 생명의 주인이 그들 앞에 서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영접하거나 의탁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아니한 그들의 현실이 절통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과는 다른 의미의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마리아)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11:33-35). 그냥 조문과 위로의 말씀만으로써는 그들을 달랠 수가 없습니다. 그 슬픔을 주님을 만난 기쁨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특단의 근본적이 대책이 필요합니다. 그 처방이 바야흐로 슬픔의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자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악의 뿌리를 도려내시듯이 그렇게 예수님께서 사람의 숙명적인 비통함의 근간을 제거하기 시작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일을 실행하기 위하여 먼저 나사로가 잠들어 있는 무덤으로 행차하시고 있습니다(11:34, 38).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11:37)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치유의 능력이 매우 뛰어난 선지자로 여기고 있습니다. 나사렛 예수는 과거 예루살렘 베데스다 연못 가에서 38년된 불치병자였던 장애자를 완전하게 낫게 해주신 선지자입니다(5:7-9). 그리고 얼마 전에는 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거지를 예루살렘에서 만나 실로암 물가로 보내어 완전히 볼 수 있는 눈으로 만들어주기도 했습니다(9:7). 그 옛날 선지자들이 병자를 고쳐준 적이 더러 있었습니다. 그러나 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자에게 세상을 볼 수 있는 새로운 눈을 창조해준 역사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리아와 그녀를 따라왔던 유대인 조문객들이 무척 아쉬워하고 있습니다. 선지자 예수님이 4일만 일찍 도착을 했더라면 나사로의 중병을 말끔하게 고쳐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11:39). 그러한 믿음을 마르다와 마리아가 다 같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11:21, 32). 그런데 조문객들은 예수님의 선지자적인 능력에 대하여 다른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급한 전갈이 일찍 갔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늦게 도착한 것을 보니 나사로의 중병은 예수님의 능력으로도 치유할 수 없는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추측입니다. 그러한 아쉬움과 절망감이 묘하게 뒤엉켜 있는 유대인들의 반응이 다음과 같습니다;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11:37).

부활이며 생명의 주인이라고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있는 예수님 앞에 그들의 반응은 심히 망령된 것입니다(11:25-26). 그들의 판단과 추측이 비록 인간적인 상식에 맞는 것이며 히브리 정경에 대한 랍비들의 해석을 정확하게 따르고 있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사람들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는 불경한 것입니다(3:16-18). 그리고 옛날 선지자 중의 하나가 아니라 창조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어서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전혀 읽지를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점이 너무나 마음이 아파서 예수님이 본문에서 눈물을 흘리시고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11:35). 이제 그들의 인식을 180도로 전환시킬 수 있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창조주의 능력을 곧바로 목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은 나사로의 무덤으로 예수님이 발걸음을 옮기고 있습니다(11: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