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요한복음 강해 제102강(요11:41-47)(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4. 11. 21:55

요한복음 강해 제102(11:41-47)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629()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11:41-42a)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입니다(1:17, 29, 34, 2:49).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정체를 창조주의 영광을 지니고 있는 독생자의 성육신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1:14, 18, 3:16). 그 개념을 유대교인들이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창조주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고 있는데 어떻게 창조주의 영광을 나누고 있는 독생자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상상할 수도 없으며 있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그의 복음서 첫머리에서부터 독생자의 존재를 공식화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소 이해하기 쉽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1:49, 3:17). 또한 동시에 예수님을 요셉의 아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1:45).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빌립과 나다나엘이 보기에도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입니다. 나사렛 고향사람들이 보기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예수야말로 사람인 목수 요셉의 아들임에 틀림이 없습니다(6:3).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동시에 사람의 아들입니다.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특이한 존재인 것입니다.

그렇게 양성을 지니고 계시는 분이 베다니에서 나사로의 부활을 두고서 하나님 아버지에게 다음과 같이 두 가지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첫째,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11:41b). 둘째,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11:42a). 첫 번째 감사의 기도는 이 땅의 존재가 하늘에 계시는 창조주에게 올리는 기도입니다. 그것은 인성을 가진 피조물인 사람이 창조주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기도입니다. 그 반면에 두 번째의 기도는 신성을 가진 존재가 하나님과 항상 영적 교제의 채널을 가지고 있다는 표현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두 가지의 기도를 올리면서 이 땅에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려고 하십니다. 그 역사는 죽은 자가 무덤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으로 되살아나오는 기적입니다. 마치 에스겔 선지자가 하나님의 명령으로 마른 뼈를 되살려서 하나님의 군대로 만드는 것과 같은 역사입니다(37:1-10). 환상 가운데서나 볼 수 있었던 역사가 벌건 대낮에 예루살렘 가까운 마을 베다니에서 발생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이 합력하여 구원을 이루려고 합니다. 곧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을 역사 가운데 현재화시키고자 하는 것입니다(6:10). 마치 예수님이 그 일을 이루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것처럼 진지하기가 이를 데 없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11:42bc)

 

사람들은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만 할까요? 예수 그리스도처럼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그 본을 보여야만 합니다. 지금 그 정확한 본을 보이고 있습니다. 베다니의 나사로를 무덤 속에서부터 되살려내어야만 하는 중요한 시점입니다. 어떻게 하면 나사로가 살아나올 수 있을까요?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이 절실합니다. 그 능력을 옷 입는 방법을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는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벌거숭이 알몸으로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가 바로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살아갈 수 있는 자연환경도 주시고 양육도 해주신 것입니다. 부모와 형제를 주셔서 이렇게 키워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도 주고 계십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며 은혜입니다.

그 연장선상에서 더 큰 것을 주실 줄 알고 미리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죽음과 부활의 문제입니다. 구원의 본령에 대한 것입니다. 이제 그것을 간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 번째의 기도는 영적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의 뜻을 이 땅 위에 이루시고자 하시는데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고서 드리는 기도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독생자를 이 땅 위에 보내셔서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십니다(3:16). 죽은 자를 살리고 회개의 역사를 통하여 심판 대신에 영생을 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 일을 이루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나사로의 부활을 사람들에게 보이는 이유가 바로 그 사실을 알도록 해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의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11:42). 사족을 더하자면, 장차 십자가에 달리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쳐다보는 자마다 구원을 얻도록 하나님께서 조치하실 것입니다(3:13-15). 그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어린 양의 대속의 제사입니다(1:29, 36, 22:11-14).

 

나사로의 무덤 속 부활과 유대인들의 두 가지 반응(11:43-46)

 

기도를 마치시고 예수님이 나사로의 무덤을 향하여 크게 명령을 하십니다; “나사로야, 나오라!”(11:43). 그것은 절대자의 명령입니다. 죽은 자라고 하더라도 순종을 해야만 합니다. 곧 벌떡 일어난 나사로가 죽음의 잠을 깨고서 굴 바깥으로 걸어 나오고 있습니다(11:11, 44a). 얼굴은 미이라와 같이 수건으로 싸여 있으며 손과 발에는 베로 묶여 있는 상태 그대로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위의 조문객들에게 지시하고 있습니다;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11:44b).

무덤 속에서 살아나온 나사로는 베다니 고향집과 동네를 왔다 갔다 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의 부활 소식은 인근 마을과 예루살렘으로 전해졌습니다. 놀라운 소식을 들은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그 광경을 지켜보았던 문상객들에게 물었습니다; “그것이 사실입니까?문상객들은 나사로가 무덤에서 살아나와서 걸어 다니는 광경을 본 사람들입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서 돌아 다니고 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나사로를 살린 자 나사렛 예수는 보통 선지자가 아닙니다. 한 마디로,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창조주 하나님의 뜻으로 이 세상에 구원과 영생을 베풀 수 있는 전능자입니다. 그 사실을 그들은 믿고 있습니다(11:45). 그러나 예루살렘에는 그 사실을 부인하고 싶어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유대교지도자들은 나사렛 예수의 인기가 백성들 사이에서 높아지는 것을 환영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이제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까지 보여주고 있으니 앞일이 큰일입니다. 백성들이 나사렛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이는 날에는 유대교의 장래가 암담한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만을 섬기는 유일신 사상이 아들과 아버지를 동시에 섬기는 이신교로 뒤바뀔 판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기다리고 있는 메시아는 어디까지나 위대한 다윗 대왕의 후계자로 오시는 분입니다. 외세를 몰아내고 중근동 지역에 다시 패권국가 이스라엘 제국을 건설할 수 있는 주인공이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로마황제의 지배를 인정하고 있는 나사렛 예수는 선민사상과 시오니즘을 부인하고 있는 자입니다(22:21). 그가 죽은 자를 살려냄으로써 백성들의 인심을 얻고 있으니 유대교가 앞으로 전통적인 선민구원사상과 새로운 만민구원사상으로 둘로 쪼개어질 판입니다. 다행스럽게도 히브리 경전의 선생인 바리새인에게 발 빠르게 베다니의 소식을 전해주는 자가 있습니다(11:46). 이제 산헤드린 공회가 그 일을 시급히 처리를 해야만 합니다(11: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