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요한복음 강해 제103강(요11:47-53)(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4. 12. 15:51

요한복음 강해 제103(11:47-53)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630(주일새벽)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어떻게 하겠느냐?(11:47, 53)

 

예수님이 예루살렘 가까운 마을 베다니에서 죽어서 무덤 속에 안치된 지 나흘이나 지난 나사로를 되살려낸 이야기는 삽시간에 유대교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으로 퍼져나갔습니다(11:44-46).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공회는 긴장을 하고 있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의 입장이 난처해진 것입니다. 그대로 두면 유대인들 사회에서 국론이 분열될 판입니다. 그리고 유대교 지도자들이 설 곳을 잃어버릴 것만 같습니다. 첫째로, 국론이 분열된다고 하는 것은 나사렛 예수를 지지하는 백성들이 많아지게 되면 유대교인들의 메시아 사상이 둘로 갈라진다는 뜻입니다. 그 점을 사도 요한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가리라 하니”(11:48).

예수 그리스도의 만민구원사상과 유대교인들의 선민구원사상은 전혀 반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선민뿐만 아니라 모든 이방인들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만민구원계획을 유대와 사마리아 땅에서 설파하고 있습니다(3:16-17, 4:21-24). 그러므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12:17) 당당하게 주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들은 일반 유대백성들은 매우 놀랍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알고 있는 출애굽의 하나님과 메시아 사상이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후계자로 오시는 메시아는 유대인들을 외세의 지배에서부터 해방을 시킬 것입니다. 다시 출애굽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열방을 굴복시키고 시온의 영광을 온 세상에 또다시 떨칠 것입니다. 한 마디로, 로마제국을 물리치고 그 옛날 다윗의 이스라엘제국의 영광을 재현할 것이라는 믿음이 바로 메시아 사상입니다. 그러므로 나사렛 예수의 주장은 자신이 메시아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과 진배가 없습니다.

그렇게 주장하고 있는 예수님은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커다란 위협이 되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새로운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 엉터리 메시아가 그만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선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베데스다 연못 가에서 38년된 병자를 고치고, 날 때부터 소경인 자를 실로암 못으로 보내어서 그에게 새로운 눈을 만들어 주었으며, 이제는 베다니에서 죽은 지 나흘이나 되는 사람을 무덤에서 되살려내었다는 것입니다(5:1-9, 9:6-7, 11:44). 의심할 바 없이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이 나사렛 예수를 통하여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의 놀라운 능력을 보고 백성들이 동요하고 있습니다. 그가 정치적인 메시아는 아닐지 몰라도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하나님의 메시아는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의 문제가 발생을 하게 될 것입니다. 곧 유대교가 분열이 되고 유대교 지도자들의 위치가 흔들리게 됩니다. 말라기 이후 선지자가 없던 긴 세월 430년간을 오로지 히브리 정경의 선생인 랍비 바리새인들과 함께 유대교의 최고기관 산헤드린 공회를 지켜오고 있는 자들이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입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선지자만큼의 능력조차 없는 자들입니다. 그저 정치력을 발휘하여 로마의 세력과 적당히 타협을 하여 유대교의 자치권을 인정받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러한 약점을 감추기 위하여 출애굽의 하나님과 정치적인 메시아 사상을 강력하게 백성들에게 교육시키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런데 이제 진짜배기 하나님의 사람이 등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자신들의 종교적인 기득권도 지키고 전통적인 메시아 사상도 견지할 수가 있을까요? 머리를 맞대고 그 대책을 논의하고 있습니다. 그 모습이 마치 그 옛날 북조 이스라엘 왕국에서 일어난 일과 비슷합니다. 구체적으로, BC 9세기에 당시 북쪽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행하고 있었던 선지자 엘리야를 제거하기 위해서 아합 왕과 이세벨 왕비가 숙의를 한 것과 같은 현상이라고 하겠습니다(왕상19:1-4). 그들의 결론은 군대를 동원하여 엘리야 한 사람을 잡아서 죽여버리는 것입니다. 똑 같은 방법이 그 대책으로 다시 드러나고 있습니다(11:50).

 

전체주의 사상에 입각한 가야바 대제사장의 발언(11:49-50)

 

민주주의 사상은 유럽에서 발생한 사상입니다. 지금은 전 세계적으로 보급이 되어 있습니다. 그 사상은 둘로 갈라집니다. 유럽대륙의 민주주의와 영국 섬의 민주주의 이론입니다. 유럽대륙에서는 16세기 말틴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민족주의 사상이 싹을 트게 됩니다. 그 이유는 루터가 성경을 각 민족의 언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시작하였기 때문입니다. 지방 말에 머무르고 있었던 여러 민족들의 말이 이제는 표음문자 라틴어 문자를 발음기호로 하여 자신들의 글자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민족주의 사상이 발아하게 됩니다. 그 때까지 여러 민족을 아울러서 통치하고 있었던 중세적인 모습의 왕조정치가 민족주의 독립운동에 의하여 차츰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그렇게 근세적인 모습의 민족주의 국가가 유럽대륙에서 발생하게 되자 전체주의 사상이 강화됩니다. 민족지상주의가 성립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민족이 융성하고 영광을 누릴 수만 있다면 개인은 그 성스러운 정의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하여 얼마든지 희생을 할 수가 있다고 하는 사고방식입니다. 그러한 생각은 허깨비와 같은 한갓 이데올르기에 불과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국가이익을 극대화시키는 엄청난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국가나 정부가 민족우월주의와 애국심 고취에 혈안이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생각은 다음과 같이 정반대입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16:26).

한편, 유럽의 섬국가인 영국에서는 다른 민주주의 사상이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소수민족의 권익을 보호하고자 하는 제도입니다. 그래서 소수대표제를 인정하는 소선거구제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구조적으로 네 개의 민족이 함께 살고 있는 영국의 섬입니다. 그들 사이에 오랜 세월 전쟁을 하면서 그들이 현실적으로 터득하게 된 타협정치의 결정판이 그것입니다. 또 다른 민주주의 제도로 발전이 되고 있습니다. 민주주의 국가는 전쟁을 하는 대신에 투표로써 평화적으로 국가의 정책을 결정합니다. 그렇지만 특별히 영국은 정책의 개발과 수립과정에 있어서 소수의 의견을 최대한 반영시키려고 무진장 노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수나 전체를 위하여 소수를 희생시키지 아니하도록 최선의 노력을 끝까지 경주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국을 위시한 여러 영연방 국가가 가지고 있는 판례법(判例法, judge made law)에 의한 법치주의의 장점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반면에 하나의 민족과 하나의 국론만을 강조하고 있는 유럽대륙의 민족국가들에게 있어서는 전체주의적인 모습과 그것에 알맞은 비례대표제가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그 어떤 민족보다도 유대인들은 민족성이 독특하면서도 강합니다. 그러므로 전체주의적인 모습이 뚜렷합니다. 가야바 대제사장의 발언도 그러한 측면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나사렛 예수 한 사람만 처형하면 전체 유대인들이 유대교의 평화를 계속 누릴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가야바와 사두개인들의 종교적인 기득권도 계속 유지가 될 수 있다는 속셈입니다. 그런데 과연 하나님의 생각도 그러할까요? 항상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인간의 생각을 뛰어 넘는 여호와 이레의 은혜(11:51-52)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8:28) 사도 바울의 지적은 탁월한 것입니다. 본문에서 가야바 대제사장은 나사렛 예수를 희생시킴으로써 유대교의 평안을 유지하고자 획책하고 있습니다(11:48-50). 그렇지만 하나님은 놀랍게도 가야바의 잘못된 생각을 선용하여 하나님의 만민구원계획을 진행시키고 있습니다. 그 점을 사도 요한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의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이 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11:50-53).

가야바는 분명하게 한 사람을 희생하여 전체를 살린다는 명분으로 자신의 유대교 지배권에 도전을 하고 있는 나사렛 예수를 죽여버리려고 획책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악한 계획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악한 계획을 완전히 뒤바꾸어서 만민구원의 계획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그 내막은 이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가 준비하신 유월절 어린 양입니다(3:14-17).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입니다(1:29). 그 옛날 번제로 바치려는 이삭의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대신 모리아 산에서 준비해둔 숫양과 같습니다(22:13-14). 그것은 여호와 이레의 준비물입니다. 그 숫양을 대신 번제로 드림으로 말미암아 이삭의 생명이 살아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탄생을 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특별한 대속의 제물인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희생이 되심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들이 탄생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구원과 영생에 참여하게 되는 성도들입니다. 선민뿐만 아니라 모든 이방인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주님으로 영접하게 되는 자들이 그들입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도 희생시키지 아니하고 만민구원의 시대를 열고 있습니다. 오로지 독생자이신 하나님의 아들만을 대속의 제물로 삼고 있습니다. 가야바는 나사렛 예수가 사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오로지 정적을 제거할 목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만민구원계획을 실현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악한 인간들의 세상경영도 결국에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이루는데 역설적으로 기여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그 악한 계획의 실천은 보응을 받게 됩니다. 역사적으로 40년 후에 예루살렘과 유대 땅이 로마의 군대에 의하여 완전히 황폐화 되어버리고 말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