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요한복음 강해 제105강(요11:57-12:1)(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4. 13. 04:47

요한복음 강해 제105(11:57-12:1)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72()

 

누구든지 예수 있는 곳을 알거든 신고하여 잡게 하라는 명령의 의미(11:57-12:1)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지명수배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있는 곳을 알거든 신고하여 잡게 하라는 명령을 예루살렘 인근에 내리고 있습니다(11:57). 여기서 그 명령의 효력을 중심으로 하여 몇 가지 사항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그 명령의 효력은 예루살렘 인근지역에 한정이 되고 있음을 엿보게 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자신에게 지명수배의 명령이 내린 줄을 알고서 피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북쪽 라마와 빈들을 지나서 산골 마을 에브라임으로 들어가버렸기에 지명수배를 피할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11:54). 사실 에브라임 산지가 예루살렘에서 그다지 먼 거리가 아닙니다. 삼사십 리 정도 떨어진 곳으로 추정이 됩니다. 그러므로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유대교인들에게 자진신고를 명령하였지만 그 효과는 그다지 크지를 못합니다. 그저 예루살렘 주위 30리 정도에 머물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 산헤드린 공회의 종교적인 명령이 그 정도의 효력밖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그 시대는 로마의 통치시대입니다. 로마의 총독이 예루살렘과 유대 땅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북방 갈릴리 지역에는 별도로 로마황제의 신임을 받고 있는 헤롯 왕가가 역시 지배를 하고 있는 때입니다. 그러므로 그저 유대교의 자율권과 자치권만을 보장받고 있는 산헤드린 공회의 명령이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절대적인 효과를 지니고 있지 아니한 시대입니다. 그러한 시대였기에 일찍이 산헤드린 공회가 위험인물로 지명하였지만 나사렛 예수가 버젓이 그의 고향이 있는 북방 갈릴리 지역에서 활발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둘째로, 유대교 지도자들의 명령이 절대적인 권위를 상실하고 있는 이유는 그들의 지시와 명령에 대하여 염증을 느끼고 있는 세력이 대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통적인 유대교는 무지하게 국수주의적이고 폐쇄적인 종교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선택한 유일한 백성이 그들 이스라엘이므로 그들 유대인만이 의롭다는 것입니다(10:1-3). 그들은 죄인이나 이방인과 다르다는 것입니다(4:9, 19:7). 그것이 선민사상입니다. 정치적으로 보자면, 그것은 엄청난 국수주의이며 절대적인 민족우월주의입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그 옛날 다윗의 이스라엘제국의 시대, 곧 중근동지역의 패권을 행사하던 그 시대를 재현하여줄 메시아를 줄기차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이 시오니즘입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들이므로 하나님의 능력을 행사하는 메시아가 나타나면 다윗의 왕좌를 회복하고 모든 이방세력을 평정할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마치 한국의 재래적인 장군사상과 유사합니다. 그렇지만 신바벨론제국에 의하여 다윗의 왕조가 망한 이후 역사는 그렇게 전개된 것이 아닙니다(왕하25:1-26). 페르시아, 헬라, 로마 등의 제국들의 500년 이상 유대 땅을 지배해오고 있습니다. 잠시 제사장 가문이 하스모니안 왕가를 이루어 자치정부를 세웠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통치지역이 한정이 되어 있었을 뿐입니다. 그것마저도 에돔 출신 헤롯 왕가에 의하여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쇄국적인 유대교를 전세계에 개방하고 시대정신에 맞게 개혁을 하여야만 하는 때입니다. 그러한 움직임이 광대한 헬라 로마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는 유대인 교포들에 의하여 조직적으로 나타나고 있던 시점이 바로 예수님이 등장했던 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했기에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고 사도들이 초대교회를 시작하자 헬라파 유대인들이 많이 유대교를 떠나서 기독교인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6:1-7). 나아가서 본토 유대인과 산헤드린 공회의 지도자 가운데에서도, 특히 일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굉장히 우호적입니다. 예를 들면,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이 그러한 인물에 속하고 있습니다(3:1-10, 19:38-42). 그들은 한결같이 우물 안 개구리와 같은 행태를 보이고 있는 유대교 지도자들의 정책결정에 대하여 염증을 느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7:50-51).

셋째로 산헤드린 공회에 대하여 사도 요한이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라고 자주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11:57). 70명 정도로 구성이 되고 있는 것이 산헤드린 공회입니다. 그 가운데는 교권을 장악하고 있는 사두개인들이 다수파이고 이스라엘의 선생으로 불리고 있는 바리새인들이 소수파입니다(3:10). 일부에서는 산헤드린 공회에 진출하고 있는 사두개인들이 대제사장을 비롯한 제사장들을 말하고 있다고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모세오경에 기록된 그대로 백성들을 위하여 제사를 지내고 안식일과 십일조의 규례를 위시하여 각종 율법의 준수를 강조하고 있는 무리들입니다. 그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선지자가 없었던 지난 400년 이상의 세월을 오로지 히브리 정경의 연구에 매진하였던 사람들입니다. 모세오경은 물론, 역사서와 선지서 그리고 시가서와 각종 지혜서를 모두 연구하고 묵시까지 연구하였습니다. 나아가서 각종 전승과 속설까지 수집하여 경전을 해석하는데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그 결과 굉장한 분량의 주석과 강해집을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들 바리새인들에 의하여 유대교리를 중심으로 히브리 사상이 총정리가 된 것입니다. 그것을 다시 율법으로 가다듬어서 백성들에게 종교교육을 시켜오고 있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렇지만 치명적인 약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니고데모와 부자청년의 경우를 통하여 뚜렷이 드러나고 있습니다(3:1-5, 10:17). 아무리 히브리사상을 공부하고 율법을 실천하여도 마음 속에 구원의 확신이 확실하지가 아니합니다. 그리고 영생을 얻었다는 기쁨이 그 심령 속에 찾아오지를 아니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생명력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음도 몸도 그와 같은 종교적인 행위로써는 모두 치유되거나 치료되지를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어떻게 하여야 욥처럼 그리고 그 옛날 선지자들처럼 하나님을 직접 만나고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습니까?(42:1-6, 6:1-7) 나아가서 천국에 들어가서 창조주의 자녀로서 영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과연 무엇입니까?(1:12-13, 3:12-21) 인간의 능력으로 열심히 율법대로 행하고 있는데 왜 영생을 주신다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지를 아니하고 있는 것입니까? 율법의 행위는 풍성하지만 심령이 가난해진 그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 찾아오고 있습니다(5:3). 그것이 성도들의 마음 판에 새기는 새 언약 복음의 시대이며 성령님의 강림과 내주 역사하심으로 현실화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24:44-49). 그것이 유대교와 기독교의 차이라고 하겠습니다.

넷째로 한 가지를 더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산헤드린 공회의 명령이 효력이 크게 없는 것은 현실적인 보상이 뒤따르지 아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나사렛 예수를 지명수배하였으면 그 소재를 알려주는 자에게 포상을 한다는 내용이 삽입이 되어 있어야 그 실효성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종교적인 의무만을 부과하고 있지 그렇게 현실적인 유인책이 없는 것입니다. 훗날 가룟 유다가 대제사장을 접촉하여 스승을 내부 고발하는 조건으로 은 삼십 량을 받게 되는 것도 돈에 밝은 그가 은밀한 거래를 제의한 결과로 보입니다(12:4-6, 26:14-16) . 이제 베다니 마리아의 향유부음의 사건을 통하여 가룟 유다의 그와 같은 면모가 여실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끝으로, 그런데 산헤드린 공회의 지명수배를 피하여 은신하였던 예수님이 왜 유월절 6일전에 예루살렘이 지척인 베다니로 향하시고 있는 것일까요?(12:1) 자신이 유월절 어린 양으로 오신 사실을 명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1:29, 36). 그리고 자신의 죽음의 때를 알고 계십니다. 그러한 사실을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는 말씀이 다음과 같습니다; “그를 가만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12:7). 자신의 죽음을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영이 특별히 역사하고 있습니다(21:19, 1:6-8). 동일한 방법으로 베다니의 마리아에게도 역사하고 있습니다. 비록 값이 비싼 향유라고 하더라도 마지막 인생을 정리하시는 예수님께 부어드리라는 것입니다. 만민의 생명을 대속하기 위하여 가시는 그 걸음에 최대한의 경의를 표하라는 뜻입니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는 여전히 가룟 유다와 같이 자신의 세속적인 출세와 재물획득에 탐닉하는 자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