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요한복음 강해 제107강(요12:9-13)(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4. 13. 22:26

요한복음 강해 제107(12:9-13)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74()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베다니로)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12:11)

 

예루살렘 인근에서 베다니의 나사로는 화제의 인물이 되고 있습니다. 그를 보려고 많은 사람들이 베다니로 몰려들고 있습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된 시신이 무덤에서 되살아나왔기 때문입니다. 전대미문(前代未聞, 옛적에 한번도 듣지 못한 새로운 이야기)의 대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잠깐 죽었던 자를 금방 살려낸 이야기는 간혹 들어본 적이 있지만 완전히 죽어서 무덤에 들어가 부패의 냄새를 풍기던 시신을 되살려낸 경우는 그야말로 인류역사상 처음입니다(11:39, 43-44). 나사로의 부활이야기가 유대 땅에 퍼지는데 시간이 제법 걸린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공회가 소문을 억제시키려고 무진장 노력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우선적으로, 나사로를 부활시킨 선지자 나사렛 예수를 예루살렘 인근에서 멀리 쫓아내어버렸습니다(11:54). 그 방법이 바로 나사렛 예수에 대한 지명수배인데 그것은 상당히 효과가 있었습니다(11:57).

그 다음에는 나사로의 활동범위를 베다니로 제한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 이유는 나사로가 예루살렘을 방문한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나사로를 보고자 베다니로 많이 몰려오고 있기 때문입니다(12:9b). 유대인들은 경향각지에서 베다니를 계속 방문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상한 소문의 진원지에 가서 무덤에서 되살아나온 당사자 나사로를 직접 보는 한편 그 신기한 초능력자 나사렛 예수를 동시에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12:9). 지난 겨울에 시작된 그 순례의 행렬은 새 봄이 되었는데도 계속이 되고 있습니다. 특히 사월 중순에 유월절이 다가오자 일찍 예루살렘으로 찾아오고 있는 경건한 유대인들이 더 많이 베다니로 몰려들고 있습니다. 그 행렬을 바라보고서 예루살렘의 유대교 지도자들은 아예 나사로까지 죽여버리려고 모의하고 있습니다(12:10). 나사로를 보고서 나사렛 예수를 믿는 자들이 자꾸만 늘어가는 것이 지극히 염려스러운 것입니다(12:11). 하기야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방법이 나타났는데 관심을 보이지 아니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그 때나 지금이나 인지상정(人之常情, 똑 같은 사람의 생각과 감정)인 것입니다.

 

유월절 명절에 일찍 예루살렘에 온 큰 무리들(12:12), 그들로부터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시는 예수님(12:13)

 

예수님이 북쪽 산지 에브라임에서 겨울의 은둔을 끝내고 새 봄이 되자 예루살렘 인근 마을 베다니에 들린 때는 유월절 6일 전입니다(12:1). 나사로의 집에서 일박을 하신 다음에 곧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을 하시고 있습니다(12:12).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 길이 위험천만한 발걸음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지명수배를 받고 있는데 예수님이 그 도성으로 들어서고 있기 때문입니다(11:57). 그리고 베다니에서 마리아가 자신의 향유를 부었을 때 예수님이 분명히 자신의 죽음과 관련하여 예언의 말씀을 하신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12:7-8). 자신의 비싼 향유를 가지고 예수님의 장례를 지내는 것은 이번 한번뿐이지만 장차는 아까운 재물을 아깝게 여기지 말고 예수님에게 하듯이 그렇게 정성스럽게 가난한 이웃을 돌보라는 말씀이십니다(10:36-37, 18:5). 어쨌든 예수님이 더 이상 육체적으로는 제자들과 함께 거하지 못하게 됨을 강력하게 시사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서고 있는 제자들의 마음이 무겁습니다.

그런데 유월절이 다가오기 때문에 원근 각지에서 예루살렘 성으로 일찍 들어와서 묵고 있는 순례객들의 입장에서는 그러하지가 아니합니다. 그들은 종교적인 열성이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예루살렘인근에서 이루어진 특이한 소문을 진작 멀리서 듣고 찾아온 사람들입니다. 베다니에 가면 죽은 자를 무덤 속에서 살려낸 선지자가 있다는 소식을 유대 땅 지방도시 또는 먼 외국 유대인 회당에서 전해 듣고서 그 먼 길을 예루살렘으로 일찍 찾아온 경건한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은 지방에서 또는 외국에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는 길에 벌써 베다니를 방문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도 요한이 다음과 같이 기술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보기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12:9). 그들은 베다니에서 나사로만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니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루살렘에 입성해서도 유월절 기간 동안에 예수님을 만나보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우매 많은 사람이 자기를 성결하게 하기 위하여 유월절 전에 시골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더니 그들이 예수를 찾으며 성전에 서서 서로 말하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그가 명절에 오지 아니하겠느냐 하니”(11:55-56). 그들은 예루살렘 인근에서 이미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공회가 예수님 일행을 지명수배한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11:57). 그러하기 때문에 이번 유월절에 나사렛 예수가 그 체포의 위험을 무릅쓰고서 과연 예루살렘으로 입성을 할 것인지가 못내 궁금한 것입니다.

아마도 목숨이 아까워서 아니 올 것이라고 예측을 하는 자들이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예상을 뒤집으면서 예수님 일행이 당당하게 유월절 5일 전에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고 있습니다(12:12). 그 많은 무리들이 열광하기를 시작합니다. 예수님을 한갓 선지자가 아니라 이제는 다윗의 자손이며 자신들을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해줄 메시아로 환영을 하기 시작합니다(21:9). 그 대목이 바로 우리를 구원해달라호산나찬송의 의미입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1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