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요한복음 강해 제108강(요12:14-19)(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4. 13. 22:28

요한복음 강해 제108(12:14-19)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75()

 

예수님이 어린 나귀를 타고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 이유(12:14-16)

 

유월절 5일 전에 예수님이 어린 나귀를 타시고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을 하고 있습니다(12:12-14).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님을 환영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팜 나무의 가지를 손에 들고서 흔들거나 땅에 깔면서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시온의 영광을 떨치실 메시아가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신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이시다. 그는 이스라엘의 왕이시다”(12:13). 이스라엘 왕국은 다윗이 제국으로 발전을 시켰지만 BC 930년경에 둘로 갈라졌습니다. 북쪽의 에브라임과 잇사갈의 왕조는 BC 722년에 앗수르제국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였습니다. 그리고 남쪽의 다윗의 왕조는 BC 586년에 신바벨론제국에 의하여 멸망을 당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AD 30년경에 예루살렘에 모여든 수많은 유대인 순례객들이 메시아에게 원하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소원의 성취입니다; 첫째, 신정국가 다윗의 제국을 다시 건설해주십시오. 둘째, 외세에 망하지도 아니하고 내부에서 분열되지도 아니하는 영원한 제국을 만들어 주십시오. 셋째, 당장 로마제국의 지배를 벗어나게 해주십시오 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외세를 물리치고 지역패권국 다윗의 제국을 재건하여 시온의 영광을 온 세상에 다시 떨쳐달라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소원은 두 가지의 문제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는 인간의 힘으로는 이룰 수가 없는 소원입니다. 이스라엘의 힘이 로마의 힘에 비해서 무척이나 약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의 도우심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둘째로, 유대인들이 선민우월사상을 청산하지 아니하고 다윗의 패권국을 다시 건설하게 되면 역시 로마제국처럼 그들 역시 다른 민족을 억압하고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 만민법을 가지고 유럽과 중근동의 다민족을 지배하고 있는 로마제국보다 더 못한 지배자가 될지도 모릅니다. 유대인들은 만민법이 아니라 이방인을 철저하게 차별하는 선민의 법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그러한 신정국가가 재현되는 것을 창조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일까요? 그 대답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지배와 피지배관계의 악순환을 청산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 세상에 오시는 새로운 이스라엘의 왕은 창조주 아래 만민이 모두 평등한 백성이 되는 새로운 신정국가를 건설할 것입니다. 그것도 무력인 군사력과 율법인 강제력에 의하여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의 구원의 뜻을 피조물인 인간이 철저하게 깨닫게 되는 대사건에 의하여 건설하게 되는 것입니다. 선민 이스라엘이 원하는 정치적인 메시아가 십자가에서 죽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진리의 메시아가 무덤 속에서 새로이 부활하게 될 때에 비로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실현되어나가는 하나님의 나라가 그 모습을 드러낼 것입니다.

그 옛날 인신제사를 허용하였던 인간적인 생각과 종교적인 관념이 죽음을 맞이하고 생명을 살리시는 하나님의 영광이 여호와 이레로서 그 모습을 드러낸 처음의 장소가 모리아 산입니다(22:2, 12-14). 인간의 생각과 방법이 잘못임이 밝혀지고 하나님의 뜻과 구원의 방법이 마침내 그 모습을 드러낸 그곳이 묘하게도 예루살렘으로 추정이 되고 있습니다. 그곳 산 아래에 도착할 때까지 제물이 될지도 모를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어린 나귀를 타고 있었을 것입니다(22:3, 5). 하나님의 명령을 받드는 제물이 어린 나귀에 실려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드는 자는 결코 군마를 타고 입성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강한 군사력이나 많은 재물을 가지고서는 결코 통과할 수가 없는 그 좁은 문을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메시아로서 지금 통과를 하고 있습니다(10:23-25).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을 하심으로써 다음 세 가지의 기대를 상징적으로 거절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첫째, 무력으로 로마제국의 지배를 벗어나게 해달라는 백성들의 기대에 대한 거절입니다. 둘째, 무력으로 지역패권국 다윗의 이스라엘제국을 다시 재건해달라는 요구에 대한 거절의 표시입니다. 셋째, 나사렛 예수를 지명수배하고 있는 대제사장과 산헤드린에 대하여 무력으로 항쟁을 하지 아니하겠다는 표현입니다. , 유대인들을 선동하여 유대교지도자들과 맞서지 아니하겠다는 의사를 무언 중에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 대신에 어린 나귀를 타신 예수님은 선지자의 예언을 성취하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12:15-16, 9:9). 예언을 성취하려는 예수님의 의도는 한 마디로, 의사 누가가 그의 복음서 말미에서 기술하고 있는 대목과 동일한 것입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24:44-48). 예언대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고 죽음의 고난을 당해야만 영광스러운 부활을 맞이하게 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시작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대목을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예수님이 언급하시고 있습니다;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12:23-26).

 

조문객들의 증언과 바리새인들의 증언(12:17-19)

 

자신들의 힘과 능력으로써는 로마제국의 세력을 유대 땅에서 몰아낼 수 없음을 유대인들이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옛날 모세와 같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출애굽을 실현시켜줄 수 있는 능력자가 필요합니다. 그 능력자가 바로 나사렛 예수임을 베다니 나사로의 부활을 목격한 바 있는 조문객들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무덤 속에 들어가서 부패의 냄새를 풍기고 있던 시신을 살려낸 것입니다(11:39, 43-44). 그것은 마치 그 옛날 선지자 에스겔이 환상 가운데 보았던 하나님의 군대의 탄생의 모습과 같은 것입니다(37:10). 그 군대만 있으면 로마의 군대도 몰아낼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그들의 증언은 힘이 있었습니다. 그 증언의 연장선상에서 대대적인 환영의 행사가 예루살렘 성에서 어린 나귀를 타신 예수님에게 있었다고 추정이 됩니다(12:12-14).

그 환영의 물결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공회가 내건 예수님에 대한 지명수배가 유월절 예루살렘에서 별로 효력이 없을 것이라고 바리새인들이 다음과 같이 증언을 하고 있습니다;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 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 도다 하니라”(12:19). 그렇지만 그것은 속단입니다. 그 환영의 분위기는 예수님을 정치적인 모세와 같은 메시아로 알고서 행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린 나귀를 타신 예수님께서는 전혀 그렇게 행하실 의사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칼을 휘두르는 제자 베드로까지 꾸중하시는 분이십니다(18:10-11). 기대가 컸던 그 만큼 유대인들의 실망이 엄청나게 크게 나타납니다. 그래서 오히려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힘을 얻게 되고 백성들의 지지를 얻어서 예수님을 십자가의 극형에 처하라고 로마총독에게까지 밀어 부치고 있는 사건이 조만간 예루살렘에서 벌어질 판국이라고 하겠습니다(19: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