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요한복음 강해 제110강(요12:27-28)(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4. 14. 04:15

요한복음 강해 제110(12:27-28)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77(주일새벽)

 

지상에 건설되는 하나님의 나라, 그것을 이루기 위한 방법은 무엇인가?(12:27)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 대속의 제물로 바쳐질 때에 하나님의 나라는 현실적으로 이 땅 위에 건설될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 아들의 대속의 제사로 말미암아 죄인들이 사함을 받아야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때부터 그들이 말씀과 성령의 능력을 받아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할 수가 있게 됩니다(24:47-49, 1:8). 생각해보면, 목숨에 연연하는 육신적인 삶으로써는 하나님의 뜻대로 경영이 되는 나라를 결코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목숨보다 영생의 가치를 더 소중하게 여기고 그렇게 선택을 하는 인생을 살 수 있게 될 때에 비로서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작동되기를 시작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현재 육신을 입고서 자신의 인생을 살고 계시는 예수님이 자신의 목숨과 육신을 제물로 내놓아야만 합니다. 그것은 여느 보통사람과 마찬가지의 고통을 수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목숨이 그리고 육신이 하나님 아버지에게 살려달라고 절규를 하고 있습니다. 그 점을 본문이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저술하고 있는 제4의 복음서는 AD 90년을 전후하여 이 세상에 나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공관복음과 바울의 서신은 AD 60년을 전후하여 이 세상에 이미 나온 것들입니다. 따라서 사도 요한은 30년 정도 먼저 나온 신약의 여러 서신서들을 참조하여 그의 복음서를 저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은 관점에서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에 싣고 있는 삼위일체 이론과 의사 누가가 그의 복음서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개념이 요한복음의 전제가 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리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 위에 도래하고 있지만 그것은 눈에 보이는 영토를 가지고 건설되는 세상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들의 마음 속에 임하는 것이므로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성도들의 영혼 속에 그리고 그 마음 속에 임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17:20-21). 또한 그 나라를 이루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4:6).

하나님은 우주만물을 만든 창조주이십니다. 그리고 피조세계를 그냥 제멋대로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우주의 질서를 지금도 섭리하고 계십니다. 사도 바울의 지적과 같이, 하늘과 땅을 꿰뚫으시며 만유 가운데서 역사하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 모습을 세 가지로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하늘의 보좌에 계시는 분으로, 세상만물과 모든 사람의 영혼을 지배하시는 분으로, 그리고 자연의 질서를 주장하시고 역사를 섭리하시는 강력한 능력으로 동시에 인식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른 바 사도 바울이 적고 있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의 핵심입니다.

그와 같은 관점에서 사도 요한이 기술하고 있는 본문을 다시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본문이 다음과 같습니다; “지금 내 마음(또는 영혼)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12:27).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이 이 땅에 왔습니다. 그것이 흙으로 만들어진 예수님의 육체에 머물고 있는 독생자의 영혼입니다. 영생의 씨앗이 그 속에 들어 있습니다(1:4, 14). 그러나 예수님의 몸 역시 연약하고 목숨유지에 급급합니다. 위대한 영혼을 가진 속사람의 뜻대로도 잘 움직여지지가 아니하고 있습니다. 타락한 세상 가운데서 인간의 육신이 목숨을 유지하고자 발버둥을 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과 육신이 요구하고 있는 목숨의 연명, 곧 명줄 사이에서 엄청난 갈등을 경험하고 있습니다(12:27a).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대속의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연약한 육신은 그 고통을 감내할 수 없다고 울부짖고 있습니다. 그 표현이 다음과 같습니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12:27ab). 그러나 독생자가 하늘의 창조주로서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미천한 피조물 인간의 형상과 모습으로 오신 이유가 공생애와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을 위한 것입니다(2:5-8). 그것은 세례 요한이 이미 증거한 바와 같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1:29, 36). 두 번이나 선포된 말씀이기에 변개할 수가 없는 절대적인 구원의 방법이며 진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방법을 모색해달라고 예수님의 목숨이 울부짖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 속에서 그 영혼이 갈구하고 있습니다. 인간세상에 와서 인생을 살고 있는 시기입니다. 하나님의 영생을 가지고 있는 예수님의 영혼이지만 유한한 목숨과 육신 속에 갇히어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의 소멸을 바라보아야만 하는 고통을 예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시공간에 제약을 받고 있는 유한한 것이지만 그 목숨과 인생은 천하보다 귀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예수님이 지적하고 있습니다(16:26). 그것이 사라지는 아픔을, 미구에 육체적으로 당하게 될 십자가 극형의 고통과 더불어 하소연하고 있는 것입니다. 단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는 절규입니다; “아무리 만민구원이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십자가의 고통은 더 괴로운 것입니다. 인간의 목숨과 육신을 가지고서는 그 고통을 감내할 수가 없습니다. 부디 다른 구원의 방법을 제시해주십시오!”(14:35-36).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의 답변은 항상 같습니다. 창조주의 뜻은 새로운 영생의 창조를 위해서는 타락한 육신을 그 목숨과 함께 먼저 멸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그릇을 만들기 위하여 헌 그릇이 부수어지는 그 아픔의 소리가 예수님의 절규를 통하여 생생하게 전달되고 있는 것이 본문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승리하시는 예수님의 신앙고백이 동시에 울려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12:27c). 그것은 마가의 다음 기록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14:36).

 

독생자의 성육신,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공생애와 십자가의 대속을 통하여 어떠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가?(12:28)

 

노아 때의 홍수심판은 코로 호흡을 하는 모든 생물을 멸해버린, 소위 전면심판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인간의 생각 속에 뿌리를 박고 있는 악한 영의 지배를 완전하게 축출한 것이 아닙니다(6:5, 8:21). 그 그릇을 파괴한 것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무지개 언약을 통하여 하나님의 방법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다시는 홍수심판과 같은 전면심판이 없겠고 그 대신에 사람의 생각 속에 둥지를 틀고 있는 악한 영을 추방하는 것으로 시사가 되고 있습니다(9:11-13). 그 때부터 만민구원의 계획이 수립이 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인류의 역사 가운데 그 구원의 방법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유월절 어린 양이 이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셨기 때문입니다(1:29).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제물입니다. 독생자를 이 땅에 하나님의 아들로 보내셔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사람의 목숨과 육신을 가지게 된 예수님이 대속의 십자가를 지려고 할까요? 그 엄청난 고통을 감수하려고 할까요? 의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약 목숨을 구하고자 십자가를 외면한다면 하나님 아버지는 실패와 좌절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예수님이 자신의 육신의 생각을 따르지 아니하고 영적인 생명을 얻기 위하여 십자가의 고통을 받아들인다면 아버지에게 승리의 영광이 주어질 것입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은 공생애를 통하여 자신의 뜻과 말씀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과 말씀을 그대로 사람들에게 전달을 했습니다(5:30-32). 그러자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에게 창조주의 능력을 계속 부어주셨습니다(5:19-23). 그것이 하나님이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해주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을 통하여서 부활과 승천이 있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앞으로 아버지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주실 영광인 것입니다. 그 점을 다음과 같이 사도 요한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시니”(12:28). 하나님은 절대자입니다. 절대선을 행하시는 유일하신 분이십니다. 절대적인 선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생명을 하나도 손상하지 아니하고 모두를 살릴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라는 뜻입니다. 모두를 살릴 수 있는 절대선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적인 희생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목숨이 아니라 절대자이신 창조주 자신의 목숨을 바침으로써 가능할 뿐입니다(7:23-28). 이제 그와 같은 원칙에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이 스스로 십자가를 져야만 되는 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고육지책(苦肉之策, 자신의 살점을 떼주고서 대신 목숨을 살리는 행위)에 따라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제물로 오신 그리스도의 고통과 아픔이 여기서 드러나고 있습니다(12:27). 그렇지만 고통의 순간이 지나고 나면 마침내 새로운 피조물들이 생겨나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그릇에는 성령님이 임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14:17). 창조주와 주님께서도 성도들에게 마련된 성령님의 성전에 자리를 함께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14:18-20, 고전6:19-20). 그와 같은 영광이 하나님에게 그리고 성도들에게 주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 다른 영광입니다. 요컨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얻게 되는 또 다른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하겠습니다(12:28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