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요한복음 강해 제101강(요11:38-40)(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4. 11. 21:54

요한복음 강해 제101(11:38-40)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628()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11:38)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12:27).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세상을 구원하고 믿는 자들에게 영생을 주기를 원하고 계십니다(3:16-17). 그러한 의미에서 예수님이 마르다에게 부활과 생명의 주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11:25).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고 있는 유대인들이 그렇게 믿고 있지를 않습니다. 죽어서 무덤에 들어간 망자(亡子, 사망한 사람)와 살아있는 사람들 사이에는 엄격한 구분이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망자와 산 자가 함께 자리할 수 없도록 무덤입구에 큰 돌을 막아 놓고 있는 것입니다(11:38). 일단 죽은 시신에 향품 처리를 하고 세마포를 입히고 천으로 철저하게 동인 다음에 관속에 넣습니다(19:40). 그리고 무덤 굴 속에 안치를 합니다(23:53, 19:40-41). 유대인들은 땅속 매장이 아니라 굴 속에 관을 유치하는 것으로 장례를 치르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 무덤 굴의 입구를 큰 돌로써 막아버리면 모든 장례절차가 끝납니다(15:46). 그 돌은 굴 전체를 막아버릴 수 있는 정도의 크기입니다. 따라서 한두 사람의 힘으로써는 쉽게 옆으로 옮길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장례 후 며칠간 초상집에 머무는 자들은 가까운 친척들이며 멀리서 문상을 온 고인의 지인들입니다. 그렇게 나흘 동안이니 초상집에 남아 있던 문상객들이 마르다 자매와 함께 예수님을 만나고 있습니다(11:19-20, 31-32). 그런데 그 무덤 굴의 입구를 막아놓고 있던 돌이 제 위치를 벗어나게 되는 경우가 복음서에서 두 차례나 나타나고 있습니다; 첫 번째의 경우가 여기 본문에서 기록이 되고 있습니다. 베다니의 나사로가 죽어서 안장되어 있는 그 무덤 입구의 돌을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서 사람들이 옮기고 있습니다(11:39a, 41a). 두 번째의 경우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자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그가 마련한 굴 속에 안장을 했을 때입니다(19:38-42). 그 때 삼 일만에 막달라 마리아가 그 굴을 찾아갑니다. 그녀는 그 굴을 막고 있었던 돌이 옮겨져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20:1). 그것은 사람이 일부러 옮긴 것이 아닙니다. 천사들이 그 돌을 옮겨버린 것입니다(20:11-13).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산 자와 죽은 자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그 돌이 이제는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부활을 하게 됨에 따라 산 자와 죽은 자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무덤입구의 돌이 사라지게 됩니다. 산 자와 죽은 자의 구분이 이제는 필요가 없어지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11:26)는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승천과 성령님의 강림으로 열리고 있는 새 시대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알게 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께 우러러 간절히 기도함으로써 나사로의 영혼을 그 몸에 되돌려 넣어주신 것입니다. 그 때문에 나사로의 육체적인 부활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부활이 먼저 있었기에 사람들이 무덤 굴 입구의 돌을 치우고 되살아난 자를 맞이할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또 하나 하나님께서 직접 성도들을 부활시키실 경우에는 굴 입구를 막고 있던 모든 돌들이 천사들에 의하여 굴러 없어지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모든 것들이 부활하여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며 그 때에는 모든 무덤도 사라지고 생사를 가르고 있었던 굴 입구의 돌도 사라집니다.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자들은 모두가 산 자들입니다. 그렇지만 부활하더라도 생명의 부활이 아니라 심판의 부활을 맞이하는 자들이 있음을 예수님이 또한 밝히고 있습니다(5:29).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고 부활과 영원한 형벌을 얻고 있는 자들입니다. 부활을 하였는데 그 앞에 지옥 불이 기다리고 있다고 하는 것은 차라리 죽음보다도 못한 것입니다. 참고로, 그 지옥의 입구에는 마치 엄청나게 큰 돌과 같은 구렁텅이가 가로막고 있어서 다시 구원의 기회가 없음을 이미 예수님이 거지 나사로와 부자와의 비유로써 설명을 해준 바가 있습니다(16:26-31).

 

주여 죽은 자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11:39)

 

  시신에서 냄새가 난다고 하는 것은 벌써 부패가 시작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세포가 죽어 있습니다. 그러한 시체를 살려내기 위해서는 두 가지 작업이 동시에 필요합니다. 그 점을 에스겔 선지자에게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이 직접 보여주신 바가 있습니다; 첫째, 육신에 새살이 돋아나도록 조치해야 합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그 작업을 행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으로 골짜기의 뼈들에게 명령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는 살아나리라. 또 내가 야훼인 줄 너희가 알리라”(37:6). 그러자 뼈들이 살을 얻고 몸을 구성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직 그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생기가 없습니다(37:8). 둘째, 하나님의 명령으로 생기에게 대언을 합니다; “주 야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37:9). 그 결과 하나님의 큰 군대가 이 땅에 나타나게 됩니다(37:10). 똑 같은 작업이 순식간에 예수님에 의하여 베다니에서 재현이 되고 있습니다. 나사로는 완전히 부패가 되고 마른 뼈만이 남아 있는 경우가 아닙니다. 비록 냄새가 나지만 죽은 지 나흘밖에 되지 아니합니다. 그래서 단 한번의 명령으로 새살이 생기고 나사로가 벌떡 일어나게 됩니다(11:43-44).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11:40)

 

에스겔 선지자의 글을 유대인들이 과연 믿고 있었을까요? 바리새인들은 종말론적인 선민의 부활을 믿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살아 생전에 그와 같은 부활을 볼 수 있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마리아와 조문객들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11:40).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믿음은 먼 미래의 결과를 두고서 믿으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장 눈 앞에 발생할 수 있는 결과를 두고서 믿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가 당장 눈앞에서 발생을 한다는 것입니다. 날 때부터 맹인인 거지가 새로운 눈을 창조 받게 되듯이 그렇게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가 무덤에서 되살아 나온다는 것입니다(9:7).

그러한 현재적인 믿음을 예수님이 다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무덤에서 사흘 만에 스스로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새로운 시대가 전개됩니다. 예수님께서 승천을 하시면서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을 모든 성도들에게 보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때부터 성령님이 믿는 자에게 내주 역사하시게 됩니다. 사도 바울의 설명과 같이 하나님의 영을 가진 자는 영적으로 이미 창조주의 능력이 역사하고 있는 자입니다(8:10-11). 생기가 죽은 자를 살리듯이 그렇게 영을 살리고 혼을 살리며 육체까지 살리는 것입니다(37:4-10). 그와 같은 역사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자신의 속사람 안에 거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고 있는 성도들에게서 나타날 것입니다(11:40). 그러한 사실을 믿지 아니하고 있는 자들에게 있어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역사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