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요한복음 강해 제95강(요11:1-4)(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4. 8. 19:48

요한복음 강해 제95(11:1-4)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622()

 

베다니에 살고 있는 세 남매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11:1)

 

나사로 등 세 남매가 살고 있는 동네 베다니는 요단 강 동편의 오아시스 마을 베다니가 아닙니다. 그들의 고향인 베다니는 요단 강 서편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 예루살렘에서 오리쯤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근교마을입니다(11:18). 그 중간에는 감람 산이 자리잡고 있습니다(8:1-2). 북쪽 갈릴리 지방에서 요단 강변 길을 따라 남하해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여리고를 지나서 서남진하여 예루살렘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그들이 곧장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서 볼일을 보고 숙식을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예루살렘의 물가가 비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직전에 위치하고 있는 베다니에 들르게 됩니다. 숙식비가 싼 민박집이 그곳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서 복음서에 등장하고 있는 유명한 집이 나사로와 마르다 그리고 마리아 등 세 남매가 함께 살고 있는 집입니다(11:1, 10:38-39). 그들 세 남매는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 들였으며 개인적으로 예수님 일행과 무척 친합니다(11:3, 5, 35-36). 특히 집주인인 나사로가 예수님이나 수제자인 베드로와 비슷한 연배라서 그런지 예수님이 나사로를 아예 친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11:11). 예수님보다 나이가 어린 제자들은 나사로의 여동생인 마르다 그리고 마리아와 친합니다. 특히 가장 막내인 사도 요한은 마리아와 나이가 비슷했는지 그의 복음서 제11장에서 베다니 마리아의 이야기를 많이 싣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12장에서는 그녀가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사실을 독점적으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12:1-3).

참고로, 공관복음에서는 베다니의 마리아가 아니라 막달라 마리아가 향유를 부은 것으로 추정이 되는 사건을 적고 있습니다(26:6-7, 14:3, 7:36-50).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그 여인을 죄인이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곱 귀신이 쫓겨나간 적이 있는 막달라의 마리아가 유대인들로부터 죄인으로 취급 받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16:9, 8:2). 반면에 멀쩡했던 베다니의 마리아는 죄인으로 불릴 이유가 없습니다. 둘째로, 예수님 일행을 재정적으로 도우면서 끝까지 수행했던 여제자는 베다니의 마리아가 아니고 막달라 마리아이기 때문입니다(8:1-3). 의사 누가의 복음서 기록에 따르면 베다니의 마리아는 나이가 어린 여자입니다(10:38-42). 예수님 일행을 위하여 언니 마르다가 주방에서 바쁜데도 돕지를 아니하고 예수님 옆에서 복음 이야기만 듣고 있다가 꾸중을 듣기도 합니다. 재정적으로 든든한 성인여자의 처지였으면 그렇게 언니의 간섭까지를 받지는 아니했을 것입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이가 병들었나이다(11:3)

 

예수님이 마지막 공생애를 예루살렘 성전에서 보내고 있습니다(7:14). 한 해가 저무는 수전절 겨울철에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는 예수님과 바리새인들 사이에 종교적 논쟁이 뜨거웠습니다(10:22-29). 예수님의 주장들, 특히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10:30)는 말씀에 바리새인들은 피가 거꾸로 치솟기 시작했습니다. 기껏해야 선지자에 불과한 인간 예수가 스스로 하나님과 같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만을 전심전력으로 섬기고 있는 유대교인들의 입장에서는 예수야말로 이단 중의 이단입니다. 그래서 돌로 쳐서 죽이려고 했습니다(10:31). 그러자 예수님이 군중들 사이로 몸을 피해서 멀리 요단 강 동편으로 도망을 해버렸습니다(10:39-40). 바로 그러한 시기에 멀리 예루살렘 근교 마을 베다니에서부터 예수님에게 급한 파발이 왔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라버니인 나사로가 중병이 들어서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것입니다(11:-3). 부디 죽기 전에 와서 살려달라는 간청입니다.

한 달음에 달려가서 사랑하는 벗 나사로의 병을 고쳐주는 것이 당연한 수순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급박한 상황 가운데에서도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에게 묻고 있습니다; “나사로의 병이 죽을 병입니까? 아니면 다시 살아날 병입니까? 그리고 그 병은 무엇 때문에 찾아온 것입니까?”. 위와 같은 물음이 제11장 제3절과 제4절 사이에 있었다고 추측이 됩니다. 예수님이 이미 기도를 통하여 아버지 하나님의 의중을 정확하게 판단을 하였기에 다음과 같은 확신에 찬 영적인 판단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11:4). 나사로의 중병을 통하여 예수님이 얻고자 하는 백성들의 믿음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 첫째는, 예수님이 보통 선지자이거나 그냥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실하게 입증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나사로의 중병은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이 땅에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백성들에게 보여주는 계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불치의 병을 고쳐주는 것 이상의 새로운 창조행위가 될지 모릅니다. 사도 요한은 그것이 바로 죽은 자의 부활이라는 사실을 제11장 후반부에서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사도 바울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15:16-19). 바야흐로, 부활은 나사로의 중병에서부터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이야말로 죽은 자를 다시 살리는 부활의 능력이라고 할 것입니다. 새로운 인생과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이 바로 창조주의 능력입니다. 그 영광을 공유하고 계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마침내 베다니 나사로의 집에서 백성들에게 보여주고자 하고 있습니다(11:4, 25-26, 40-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