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요한복음 강해 제93강(요10:30-39)(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4. 8. 08:42

요한복음 강해 제93(10:30-39)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62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10:30)

 

사회윤리와 도덕의 시작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구별에서부터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말씀을 따르고 순종할 때 가정의 질서가 세워져 나가는데 그것을 ’()라고 부릅니다. 부자간의 구별과 질서가 사회적으로 그리고 국가적으로 확대되어 나갑니다. 의 사상에서부터 ’()의 사상으로 전개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인간사회가 질서를 잡고 운영이 되어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발언은 그 근본을 뒤흔들고 있습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10:30-31). 당연히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징계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반응을 사전에 짐작하고도 남으실 분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도발적인 발언을 서슴지 아니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유대인들은 유일하신 한 분 창조주 하나님을 전심전력으로 섬겨오는데 익숙한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모든 계명과 율법의 기본정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창세기를 들여다보면, 유대교인들의 해석과 다르게 기술이 되어 있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묘사가 한눈에 들어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1:26),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1:27), “,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야훼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11:7-8). 창조주 하나님이 단수가 아니고 복수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다만 그 결정은 하나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비록 하나님의 형상이 복수로 나누어질 수 있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의사결정은 하나로 통일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설명처럼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아들이신 예수님의 실천이 완벽하게 일치가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둘이 아니고 하나입니다(10:30). 그러므로 진리입니다(8:32, 40). 훗날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그 점을 증거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복음과 그 생애가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만민구원의 의도를 백 퍼센트 실천한 것이라고 확실하게 증거를 해시는 분이 바로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이십니다. 그 점을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14:26),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10:13-14). 그렇지만 유대교인들의 귀에는 예수님의 주장이 여전히 공허하게 들리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하나님의 존재양식의 신비를 상상하지 아니하고 오로지 인간적인 단수의 개념에 입각하여 한 분뿐이신 유일한 창조주 야훼 하나님만을 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보기에는 예수님의 주장은 이단사상입니다. 그래서 율법에 의하여 예수님을 돌로 쳐서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10:32, 18:20).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을 너희에게 보였거늘(10:32)

 

예수님이 스스로 자신이 아버지와 하나라고 주장을 하자 유대인들이 격분하여 신성모독으로 처형을 하고자 합니다(10:31, 33). 그러자 예수님이 반박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로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고 하느냐?”(10:32). 예수님이 반박을 할 수 있는 근거가 두 가지 있습니다. 그 첫째는 모세오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다음의 말씀입니다; “만일 선지자가 있어 야훼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이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야훼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제 마음대로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하지 말지니라”(18:22). 그 말의 뜻은 만약 어떤 선지자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한 일이 기적으로 나타나고 그 말대로 성취가 되어 이 세상에 나타난다면 그것은 그 선지자가 제 마음대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시로 한 것이니 너희들은 그를 두려워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와 같이 행하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한 일에 많은 기적이 발생했습니다. 예를 들면, 귀신을 쫓아내고 불치의 병과 장애를 고쳤으며 심지어는 무덤 속에 있는 자를 되살려내기도 했습니다. 요컨대, 생명을 살리고 돌보는 선한 일을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으로 성취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일을 트집으로 잡으며 예수님을 신성모독죄로 처벌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까? 그래서 강하게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반박을 하고 있습니다; “만일 내가 아버지의 일을 행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을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10:38).

두 번째로 예수님이 유대인들의 질타에 반박할 수 있는 근거가 다음과 같이 소개가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신들의 모임 가운데에 서시며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에서 재판하시느니라”(82:1),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82:6). 위와 같은 선견자(先見者, 미래를 볼 수 있는 말씀의 지혜를 가진 자, 선지자와 유사한 뜻임) 아삽의 시의 말씀을 원용하여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신성모독이라 하느냐?”(10:34-36).

 

신성을 보유하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각(10:33-38)

 

첫 번째 시각은 유대인에게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다”(10:33)는 유대인들의 주장에서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사람은 피조물이며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십니다. 그 구분은 엄격한 것입니다. 사람은 골백번을 죽고 다시 살아나도 창조주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에게서 그와 다른 두 번째의 시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를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신성모독이라 하느냐?”(10:35-36). 사도 요한은 그의 복음서 제1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의 인격체이며 창조주의 영광을 누리고 있는 독생자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1:1-3, 14). 예수님도 하나님의 말씀을 영접한 성도를 신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제자들을 이제는 이 아니라 친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15:14-15). 다같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부활하고 승천하며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영광을 천국에서 누리자는 것입니다.

아삽의 시편의 깨달음을 통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음미해보면, 여기서의 은 하나님의 아들을 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예수님처럼 남은 인생을 살아가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가 있으며 장차 하나님의 존전에 설 수 있는 영생의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의 의미입니다. 다만 한 가지의 조건이 추가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이 거룩하게 만들어서 이 세상에 보내어주는 과정이 필요합니다”(10:36). 그것이 거듭남입니다. 구체적으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게 되면 천국으로 들어가서 영생을 누릴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3:5).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 장차 부활의 몸을 입고 승천하여 영생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 완전한 인간이 완전한 하나님의 자녀로 탈바꿈이 되는 것, 그와 같은 구원의 은혜가 바야흐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성육신과 공생애로 말미암아 유대 땅에 은혜 위에 은혜가 진리로서 쏟아져 내리고 있는데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교리에 억매여서 한 발자국도 전진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한 해의 마지막 절기인 수전절을 보내면서 그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잡아서 유대교리와 율법에 비추어서 단죄를 하고자 합니다(10:22, 31). 그렇지만 아직 유월절까지는 하나님이 예수님의 체포를 허락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10:39). 유월절 어린 양으로 예비하신 예수님을 수전절에 체포 당하게 하시지는 아니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