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요한복음 강해 제91강(요10:18-24)(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4. 7. 07:14

요한복음 강해 제91(10:18-24)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618()

 

유대인들 사이에 일어난 분쟁(10:18-21)

 

예수님의 말씀은 예루살렘에서 그 말씀을 듣는 유대인들 사이에 분쟁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니”(10:17-19)라고 정확하게 분쟁의 요인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한 마디로 예수님이 자신의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특이한 계명과 권세를 받았다는 주장입니다. 그 계명은 (선한 목자가 양의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것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그 보답으로 새 생명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계명은 예수님과 같은 각오와 결단으로 목양을 하지 아니하는 자들은 모두 삯군이며 도둑이라는 예수님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10:9-15). 나아가서 예수님은 자신이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자발적으로 행할 수 있는 권세를 보유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창조주이며 전능자라는 주장과 진배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유대인들 가운데 특별히 히브리 경전의 선생인 바리새인들이 분노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나사렛 예수만이 하나님과 직접 교통을 하면서 새로운 계명을 받고 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예수님처럼 목회를 하지 아니하면 모두가 양들을 착취하는 도적이거나 종교적 영리주의자들이라고 백성들의 선생이며 랍비인 바리새인들을 싸잡아서 비난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창조주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으며 생사를 주관할 수 있는 창조주의 권세를 자신이 가지고 있다고 강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한갓 피조물인 인간에 불과한 나사렛 예수가 어떻게 영이신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적인 권세를 모두 보유하고 있다는 것입니까? 한 마디로, 인간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말입니까? 그것은 참담하면서도 외람되기 이를 데가 없는 소위 참람죄이며 하나님의 신성에 대한 모독행위입니다. 그리고 자기처럼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 생명을 돌보지 아니하면 모두가 삯꾼이나 도적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니 그것은 독단이며 독선입니다. 더구나 자신의 말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계명이라고 우기고 있으니 모든 계명을 수록하고 있는 히브리 경전의 가르침을 벗어나고 있는 해석입니다. 어느 것 하나 랍비들의 마음에 와 닿지 아니하는 말씀뿐입니다. 그렇게 독선적이고 편파적인 설법을 무지한 백성들이 듣고서 박수를 칠 것을 생각하니 바리새인들은 걱정이 태산입니다. 그래서 나사렛 예수를 귀신이 들린 가짜 선지자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10:20).

한편, 일부 백성들 가운데서는 다른 견해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능력을 직접 본 것입니다. 일반 선지자나 랍비들이 행할 수 없는 표적을 예수님이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날 때부터 소경인 거지를 실로암 물로 보내어서 낫게 해준 장본인이 예수님입니다. 요컨대, 그는 창조주의 능력을 선보이고 있는 선지자입니다. 그러한 능력자를 믿지 아니하면 누구를 믿을 것입니까? 힘든 세상살이 가운데 그러한 능력자를 만나서 자신들의 불치병을 고치고 당면한 문제를 현실적으로 해결을 받는 것이 그들 백성들의 소원입니다. 그들의 관심은 종교적이거나 철학적인 논쟁이 결코 아닌 것입니다. 그들 백성들의 고단한 삶에 있어서 당장 요청되고 있는 것은 전능하신 메시아의 오심입니다. 메시아는 나사렛 예수와 같이 백성들의 불치의 병을 고쳐주고 귀신을 쫓아내어 주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현실적인 고통과 고난을 뛰어넘어서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어야만 합니다. 결론적으로, 새로운 운명을 창조해주며 백성들에게 구원과 영생을 주겠다고 강력하게 선포해주는 메시아가 그들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환영하는 분위기입니다(10:21, 41-42)

 

분쟁을 수습하기 위한 방안의 모색(10:22-24)

 

백성들의 여론이 나사렛 예수에게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는 것을 바리새인들이 눈치를 채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극단적인 발언이 계속되도록 랍비들이 예수님을 몰아 부치고 있습니다;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 하니”(10:24). 겉으로 보면, 예수님에게 호의적인 발언이며 정당한 순서에 입각한 요구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속을 들여다보면, 그것은 예수님의 말의 꼬리를 잡기 위하여 쉴새 없이 계속 답변을 요구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자신이 메시아라는 증명을 계속해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보이지 아니하는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명, 나아가서 외세를 몰아내고 제사장나라 다윗의 왕국을 회복하는 방안을 제시해보라는 요구입니다.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하여 이 땅에 보냄을 받았다고 하는 예수님에게 당장 유대교에서 믿고 있는 메시아의 사상에 입각하여 자신이 메시아임을 다시 설명해보라는 요청인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 부치고 있었던 때가 예루살렘의 마지막 절기인 수전절입니다. BC 2세기에 시리아의 셀루시드 왕조에 의하여 더럽혀졌던 예루살렘 성전을 유대인들이 독립전쟁으로 되찾았습니다. 그 때 성전을 깨끗하게 청소를 하고 다시 하나님께 봉헌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한 감격을 맛보았던 때가 수전절이며 겨울입니다(10:22). 이제 봄이 돌아오면 일년 중 처음의 절기 유월절이 될 것입니다(12:1, 20). 그 유월절 명절이 소위 유월절 어린 양으로 오신 예수님의 제삿날입니다(1:29, 13:1). 그러므로 유대교 지도자들의 도발이 절정으로 올라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 장소가 예루살렘 성전 내의 솔로몬 행각입니다. 행각은 큰 기둥이 있으며 회랑의 사이에 존재하는 제법 큰 개방된 공간입니다.  따라서 성전에 출입하는 사람들이 종교적인 논쟁을 벌이는 공개된 장소가 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솔로몬 행각은 하나님의 지혜자와 세상의 종교적인 지혜자가 서로 논쟁을 통하여 불꽃을 튀기는 장소입니다(10:23-24). 그곳에서 바리새인들과 예수님 사이에 바야흐로 지혜대결의 한 마당이 겨울추위에도 불구하고 뜨겁게 펼쳐지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