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요한복음 강해 제4강(요1:9-13)(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2. 18. 01:18

요한복음 강해 4(1:9-13)

작성자; 손진길 목사(로토루아순복음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 4 7(주일새벽)

 

 영접하는 ,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하나님의 영광을 가지신 독생자가 땅에 오게 됩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이 되셔서 땅에 오신 이유는 마디로, 하나님 말씀의 정확한 뜻을 이제는 선지자를 통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직접 사람이 되셔서 그들의 입장에서 모든 백성들에게 직접 말씀으로 알려주시고 또한 자신의 생애로써 분명하게 보여주기 위함입니다(1:14, 11:27). 그런데 문제는 영적으로 이미 어두움에 사로잡혀서 살고 있는, 이른 실락원 인간들이 창조주를 제대로 영접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1:9-11). 그렇지만 창조주 앞에 자신의 분수를 지키며 정직하게 신앙고백을 하는 자는 누구나 신원이 회복이 되고 있습니다(1:12-13). 그와 같은 사실을 AD 60 이전에 사도 바울은 그가 저술한 로마서에서 이제는 어두운 세력의 노릇에서 벗어나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양자가 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8:15). 점을 사도 요한은 AD 90년대에 그가 기록한 복음서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다시 부여 받고 있는 것이라고 본문에서 말하고 있습니다(1:12). 그와 같은 신원회복의 역사가 있게 되는 이유를 성경말씀 가운데서 먼저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유는 메시아 예수가 오게 되는 이유와 맥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다음에 제자들에게 자신에 대하여 예언하고 있던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 그리고 시편의 말씀이 이제 성취가 되었다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24:44-45).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가 보면, 다음의 내용을 알게 됩니다; 첫째, 모세의 율법서 가운데 번째의 책인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메시아의 오심과 그를 통하여 범한 인류를 구원할 것임을 이미 시사하고 있습니다. 훗날 여자의 후손이 나타나서 사탄의 화신인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는 것입니다(3:15). 생각해보면, 우리 모두가 여자의 후손인 같지만 사실은 예수님 혼자만이 완전한 여자의 후손입니다. 이유는 인류 모두가 남자와 여자의 후손이기 때문입니다. 가운데 유일하게 예수 그리스도만이 소위 생물학적인 아버지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1:34-35). 둘째, 선지자 이사야가 그의 책에서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더욱 구체적으로 예언하고 있습니다(7:14). 셋째, 아들이 사탄의 가장 권세인 음부의 세력을 쳐부수고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계신다고 하는 사실을 다윗이 시공간을 뛰어넘는 자신의 영적인 눈으로 보고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야훼께서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원수들로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오른 쪽에 앉아 있으라하셨도다”(110:1).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땅에서 필요한 이유를 다시 창세기에서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장의 내용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과 인간을 6일동안에 모두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2장에서는 피조세계를 하나님의 뜻에 맞게 경영하고자 돕는 자를 선택하여 훈련을 시키고 있습니다. 대상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아담이며 장소가 소위 에덴동산입니다. 그렇지만 같은 시공간에서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아담이 같이 지내기 위해서는 법도가 필요합니다. 최소한의 공존의 장치가 다음과 같이 마련이 되고 있습니다;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2:16-17). 자신의 분수를 모르고 법도를 어겨버린 자가 아담과 하와입니다. 그것이 구약의 용어를 빌리면 패역입니다(32:20, 대하6:37). 패륜과 반역이라는 뜻입니다. 피조물의 반역으로 창조주와 피조물인 인간의 아름다운 관계와 동행의 역사가 깨어져버렸습니다. 그것은 정다운 부자관계의 윤리가 깨어져버린 것과 같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같은 공간 에덴동산에서 이상 함께 살지를 못하고 세상으로 쫓겨나버리고 맙니다(3:23-24). 죄악이 만연된 어두운 세상, ‘실락원에서의 삶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사람들이 진정으로 뉘우치고 회개를 하면 자신의 백성으로, 그리고 자신의 아들로 다시 맞아 들이고자 하고 있습니다(1:9-10). 그것이 예수님의 교훈인 탕자의 비유에서 진정한 아버지의 마음으로 묘사가 되고 있습니다(15:17-24). 결론적으로, 탕자와 같은 실락원의 백성들을 다시 신원을 회복시키고 아들로 맞아 들이고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가고 계십니다. 번째 작업이 본문에서 말씀의 성육신으로 드러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1:11, 14).

 그런데 만민의 구원과 신원의 회복을 위하여 땅에 성육신하시는 하나님의 독생자를 선민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오해를 하고 있었습니다. 자신들 선민들만을 구원하기 위하여 오시는 메시아로 착각을 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메시아가 마치 옛날 중근동 지역 전체를 호령하던 패권국가 다윗의 제국을 다시 재건하는 것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역사적으로, BC 586 바벨론 제국에 의하여 멸망을 당한 제사장의 나라가 소위 다윗 왕조의 유다 왕국입니다. 나라의 주권을 되찾지 못하고 유다의 백성들이 예수님 당시까지 600 동안이나 계속 바벨론의 뒤를 이은 제국들에 의하여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하니 자신들의 해방과 독립을 이루고자 하는 선민들의 소망과 소원이 오죽이나 했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오랜 세월 포기하지 아니하고 출애굽기의 모세를 기다렸으며 이스라엘 제국을 다시 건설하는 다윗의 후손을 메시아로 기다렸습니다. 그러한 의미가 혈통, 육정, 또는 사람의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선민들의 육체적인 조상인 아브라함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의미가 다음과 같이 쉽게 이해가 됩니다; 혈통은 적자로서 아브라함의 후사가 되고 있는 이삭입니다(21:12). 육정으로 자는 서자 이스마엘과 아브라함의 후처 그두라의 소생들입니다(16:15-16, 25:1-6). 사람의 뜻으로 자는 당시 아들이 없었던 아브라함이 자신의 뜻으로 후계자로 세우고자 했던 다메섹 출신 엘리에셀을 말하고 있습니다(15:2). 그들이 모두 세상적으로 아브라함의 뜻에서 비롯되고 있습니다. 모두는 마디로 사람의 뜻과 핏줄로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자는 마치 모리아 산에서 죽을 목숨이 다시 살아난 이삭 같은 자입니다. 모리아 산에서 죽을 밖에 없는 운명인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서 자신이 마련한 제물로 대신 제사를 드리게 하고 살려준 것입니다(22:9-14). 그래서 이삭은 이제 아브라함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아들이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가 땅에 오셔서 죽을 수밖에 없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대신 유월절 어린 제물이 되고 있습니다(1:29). 덕택에 성도들이 새로운 피조물로서 탄생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함께 동행할 있는 신원으로 회복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한 은혜가 선민들의 울타리를 넘어서서 모든 인류에게 생명과 진리의 빛으로 비추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 , 세상에 와서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1:9), “영접하는 ,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선민, 이방인 가리지 아니하고 누구에게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자들이니라”(1:12-13). 만민구원의 하나님, 참으로 고마우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할렐루야! 성호를 찬양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