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요한복음 강해 제5강(요1:14)(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2. 18. 16:52

요한복음 강해 5(1:14)

작성자; 손진길 목사(로토루아순복음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 4 8(월요일 새벽)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 가운데 거한다 하는 말은 “(거처를 옮겨서) 우리와 함께 살고 있다 뜻입니다. 그것은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함께 먹고 마시며 생사고락을 같이 나누고 있는 모습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 과연 그러한 동거의 관계가 가능할까요? 희랍신화에서는 주로 신이 인간이 되어 남녀간의 사랑을 나누는 이야기를 재미있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히브리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잠시 인간의 모습으로 현신하여 믿음의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18:1-8). 그런데 지금 사도 요한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창조주가 인간으로 태어나서 완벽하게 함께 성장하고 먹고 사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하는 것이 현신의 의미가 아니고 완전하게 사람과 똑같이 어린 아기로 세상에 태어났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1:14a, 1:18-25).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으로 태어나는 일이 가능하다는 사실과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과 함께 자라나고 같은 모습으로 생활하면서 무언가를 행할 있다는 사실을 사도 요한이 증명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의도로 사도 요한이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라는 문장을 적고 있다고 있습니다(1:14b). 히브리 바이블인 구약에 따르면 아버지의 영광은 창조주의 영광입니다. 야훼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만물과 만민을 창조하신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므로 창조주가 스스로 비천한 인간의 몸을 빌어서 아기로 태어나는 치욕을 감내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창조주의 영광은 낮고 천한 피조물의 위치를 초월해서 빛나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창조의 질서이며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구분인 것입니다. 그런데 창조주가 스스로 정하고 있는 질서와 분수를 깨고서 전혀 다른 인식과 행동의 변화를 보이고 있습니다. 스스로 자신이 정한 법칙을 깨고서 새로운 질서를 창조할 있는 능력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창조주만이 스스로 결단하고 행할 있는 무섭고도 두려운 모습입니다. 세상에 누가 있어서 자신의 한계를 그렇게 뛰어넘으며 반대의 개념을 가지고 새로운 세상을 창조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자신의 아들과 같은 독생자를 내세워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게 하시고 세상을 다시 하나님의 나라로 편입시키고 있습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바라보게 되면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 재창조의 길을 열어놓고 계시는 유일하면서도 완전하신 창조주의 모습을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는 표현이라고 하겠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상상의 한계를 초월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자기혁신과 세상의 창조가 얼마든지 가능한 전능하신 하나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14c).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하신 우주의 질서를 깨뜨리면서 새로운 질서를 다시 창조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분신인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셔서 작업을 이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만민구원의 계획과 실천입니다. 나아가서 모든 피조물을 구원하여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3:16). 그러한 목적으로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던 인물이 글의 저자인 사도 요한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를 충만하게 체험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체험의 결과를 그렇게 자신의 복음서에 적고 있는 것입니다. 차제에 은혜’, ‘진리’, ‘충만 개념을 한번 다음과 같이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첫째, ‘은혜 사회적인 상식과 개인적인 기대치를 훨씬 뛰어 넘어서 받게 되는 것을 말하고 있는 용어입니다. 성경에서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를 쉽게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창세기 3장을 보면 아내와 함께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이 하나님의 책임추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답변하고 있습니다;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3:12). 아담이 상식에 맞지 아니하는 변명을 하면서 자신의 책임을 벗어나고자 애쓰고 있는 대목입니다. 잘하면 아내 하와에게 책임을 전가시킬 있을 같습니다. 그리고 하와를 창조하여 자신에게 손을 이끌어서 보내어주신 하나님의 책임도 슬쩍 거론해보고 있는 중입니다(2:22, 3:12). 그러나 그러한 아담의 항변은 별로 설득력이 없습니다. 잘해야 아담과 하와의 공동책임으로 하나님의 판결이 나타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하와는 뱀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있습니다(3:13). 그래서 창세기에서는 아담, 하와, 뱀이 모두 처벌을 받고 있습니다(3:14-19). 그런데 복음서로 오게 되면 판결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모든 책임을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감당하시고 있습니다. 자신의 독생자를 인간으로 태어나게 하시고 그를 제물로 삼아서 인간의 죄를 사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 개념입니다. 책임의 일부만을 감당해주셔도 감지덕지인데 전부를 창조주 하나님께서 부담을 해주셨습니다. 덕분에 인류에게 드리워져 있었던 죄와 사망의 굴레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의 은혜를 감사할 수밖에 없게 것입니다. 은혜에 감사하면서 이제는 남은 생애를 죄를 짓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면서 살아보겠다고 결심하고 그렇게 행하고 있는 자들이 바로 성도들입니다.

둘째, ‘진리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독생자의 말씀의 뜻이 같다는 것입니다. 구약에 나타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취지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재강조되고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민과 만물을 구원하시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본뜻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역사섭리의 정확한 방향이라는 설명이 훗날 뒤따르고 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예수님이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선포하고 있습니다(10:30). 죽음을 무릅쓰고 진리 말했기에 예수님은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 의하여 십자가의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셋째, ‘충만 개념은 차고 넘치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로 차고 넘치는 것인지를 예수님이 기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오병이어의 기적 같은 것입니다. 다섯 덩이와 마리의 생선요리를 가지고 장정만 오천 , 남녀노소 모두 계산하면 이만 명의 청중에게 식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하늘의 곳간이 오병이어 매개로 하여 열린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것은 그렇게 충만하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로마서에서 선언하고 있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11:33). 그러한 충만함이 그리스도에게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3:18-19). 오늘 그와 같은 충만한 은혜와 진리가 성도들의 속사람 속에서 숨을 쉬고 있습니다.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의 영이 성령님과 함께 성도들에게 내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말씀이 자신의 육신적인 삶으로 구현되는 충만한 은혜와 진리가 저와 성도님들에게 계속 있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