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 제292강(창49:33-50:3)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년 5월 12일(월)
야곱이 운명하는 장면의 묘사에 내포되어 있는 세 가지 특징은 무엇인가?(창49:33)
첫째로, 상관이 부하에게 향후의 행동지침을 주는 것을 ‘give instruction’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용어가 본문에서 사용이 되고 있습니다; “야곱이 아들(들)에게 명하기를 마치고(When Jacob had finished giving instructions to his sons)”(창49:33a). 어떠한 ‘행동지침’을 주고 있는 것일까요? 두 가지로 보입니다; 첫째, 자신이 죽으면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므로 당연히 자신의 시신도 조상들의 시신이 안장이 되어 있는 가나안 땅 헤브론 막벨라 굴에 장사를 지내달라는 것입니다(창49:29-30). 둘째, 열두 아들들에게 축복의 기도를 하면서 그들의 자손들 곧 열두 지파의 앞날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자신들의 분량을 알고서 지나친 행동을 삼가하라고 당부를 한 것입니다. 그것은 그냥 당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장차 후손들이 명령으로 알아듣고서 ‘행동의 지침’으로 삼으라는 것입니다(창49:28). 세상을 떠나는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족속들에게 전해주고 있는 지상명령과 같은 금과옥조의 말씀입니다. 그와 같은 장면이 복음서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지상명령’이라고 하겠습니다(마28:18-20).
둘째로, 야곱의 운명의 모습을 모세는 “그 발을 침상에 모으고 숨을 거두니”(창49:33b)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언뜻 보면, 별다른 의미가 없는 행동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높이뛰기 또는 멀리뛰기 선수가 도약을 하는 모습에 비추어서 생각을 해보면 다른 의미가 드러납니다; “멀리 그리고 높이 뛰기 위해서는 두 발을 모으고 힘을 주어야만 합니다. 힘을 최고도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숨을 참아야만 합니다. 그런데 가장 큰 힘을 필요로 하는 경우가 저 세상으로 떠나는 경우입니다. 그 때에는 숨을 참는 것이 아니라 아예 이 땅에서의 호흡을 끊어야만 할 것입니다”.
셋째로, “그의 백성에게로 돌아갔더라”(창49:33c)는 말은 “그의 (믿음의) 열조에게로 돌아갔더라”는 뜻입니다. 믿음의 열조는 바로 아브라함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관념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승이 되고 있습니다. 좋은 예가 바로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눅16:22).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들어가게 되는 곳은 어디일까요? 그 점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이미 제자들에게 설명하신 바가 있습니다;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마8:11),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눅16:25). 예수님의 우화 가운데에서는 이미 아브라함이 천국에 들어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직접적인 설교에 있어서는 미래형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면 아브라함과 믿음의 열조들이 모두 천국으로 들어가게 되는 일이 발생을 한다는 것이 그 결론에 해당한다고 하겠습니다.
아버지 야곱을 사랑하는 효자 요셉의 모습과 극진한 장례의 모습(창50:1-3)
금방 운명한 부모 형제의 시신은 살아 있을 때와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 다만 움직임이 없고 피돌기가 멈추어서 그 시신이 차가울 뿐입니다. 아직 신체가 굳어지기 전이라면 여전히 살아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따라서 육신의 정을 느끼는 자식이 부모님의 신체를 보면서 울 때에 자신도 모르게 그 얼굴을 만질 수가 있습니다.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인 한국에서는 그 정도입니다. 그런데 옛날 중동 땅에서는 하나의 신체적 접촉이 더 허용이 되고 있습니다; “요셉이 그의 아버지 얼굴에 구푸려 울며 입맞추고”(창50:1). 산 사람과 키스를 한 것이 아니라 돌아가신 아버지 야곱의 얼굴에 키스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요? 가능한 일이었다면 그것은 애굽의 총리인 요셉의 이스라엘 사랑이 극진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요셉이 아버지 야곱의 위대함을 경험하면서 극도의 존경과 애정을 표현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아버지 이스라엘로부터 막대한 영향을 받게 되는 요셉의 경험과 깨달음을 다시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그 옛날 가나안 고향 집에서 요셉은 17세의 철부지였습니다(창37:2). 아버지의 뒷배를 믿고서 이복 형들을 깔보면서 제멋대로 살던 요셉입니다. 그의 신앙생활도 별로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는 애굽에 노예로 끌려와서 아버지 야곱의 하나님께 매어 달리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형통한 자가 되었으며 마침내 애굽의 총리로서 입신을 하게 되었습니다(창39:2-3, 41:41). 그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뛰어난 지혜로써 애굽 제국의 7년 흉년을 극복합니다. 그 기간 동안에 바로의 절대권력은 더욱 강화가 되고 주변국에 대한 패권도 더욱 강해집니다(창47:20-26) 그러므로 겉으로 보면, 요셉은 가나안출신의 대 족장에 불과한 아버지 야곱보다는 더욱 뛰어난 인물입니다. 하지만 애굽에 이민을 온 아버지 야곱의 면모를 보고서 요셉은 큰 감명을 받습니다.
둘째로, 아버지 야곱은 세상적인 지위와 잣대로 가늠할 수가 없는 절대적인 신앙의 성숙함을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요셉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째, 요셉의 두 아들을 이스라엘 족속에 편입을 시킵니다(창48:5). 애굽의 대 귀족인 총리의 아들로 사는 것보다 조상들의 하나님을 섬기면서 장차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사는 것이 훨씬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이스라엘은 자신의 운명을 앞두고서 열두 아들에게 예언과 함께 축복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자식들의 믿음의 분량과 자질에 따라서 예언과 축복을 베풀어주고 있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지혜임을 요셉이 알아보고 있습니다(창49:28). 셋째, 아버지 야곱은 죽어서라도 믿음의 조상들이 안장되어 있는 가나안 남부 헤브론의 막벨라 굴에 들어가기를 그토록 소원하고 있습니다(창47:29-31, 49:29). 애굽 땅의 명당에 묻히는 것보다는 막벨라 굴에서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것이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영생의 하나님을 만나러 가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러한 아버지 이스라엘의 신앙적 태도와 결단을 대하면서 애굽의 총리인 요셉은 이스라엘의 아들이며 목자로서 반듯하게 서게 됩니다(창49:24). 따라서 요셉이 아버지 이스라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경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습니다. 그의 입맞춤은 한 마디로, 믿음의 조상에 대한 극도의 존경과 사랑의 표현이라고 하겠습니다.
다음으로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시신을 40일간이나 향으로 미이라 처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곡하는 기간이 무려 70일간이나 됩니다(창50:3). 어째서 그렇게 오랜 기간이 필요한 것일까요? 한국에서는 옛날 조선시대에 3일장이나 5일장이 대부분입니다. 특별히 유명한 인물이 별세를 했을 때에 전국각지에서 조문객을 받기 위하여 그 기간이 7일이나 10일로 늘어나기도 합니다. 그것은 조선이 그렇게 넓은 나라가 아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옛날 요셉 시대의 애굽 제국은 거대한 통일왕조입니다. 이집트와 수단 그리고 이디오피아는 당연히 애굽 제국에 속합니다. 그리고 서쪽으로 리비아와 튀니지도 소속이 됩니다. 만약 이디오피아에 있는 지방의 귀족이 중앙에서 발생한 애굽의 실세총리인 사브낫바네아 요셉의 부친상에 참석을 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한 달이 걸리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애곡의 기간이 엄청나게 깁니다. 그리고 각종 향 재료와 방부제로 시신을 미이라로 처리하는 기간도 깁니다. 그 이유는 애곡이 끝나면 시신을 운구하여 가나안까지 가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바깥 세상에 시신을 노출하여도 크게 손상이 되지 아니하도록 확실하게 미이라 처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야곱의 시신을 미이라로 만들고 있는 주 재료는 무엇이었을까요? 그 주 재료는 복음서에서 선을 보이고 있습니다;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100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요19:39). 최고 품질의 향이 물에 가라앉는 성질의 침향입니다. 거기에 강력한 방부제인 몰약을 섞었습니다. 그 양도 엄청납니다. 거의 신체무게의 절반에 해당하는 33kg이나 됩니다. 공회원인 니고데모가 역시 존귀한 부자인 아리마대 요셉과 함께 정성을 다하여 예수님의 시신을 향품 처리를 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 옛날에 애굽의 총리인 요셉이 정성을 다하여 좋은 향 재료와 방부제로써 부친 야곱의 시신을 미이라로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창5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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