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창세기 강해 제189강(창35:6-8)(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12. 24. 11:27

창세기 강해 제189(35:6-8)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210()

 

마침내 야곱이 만나게 되는 엘벧엘의 하나님(35:6-7)

 

성경은 무엇일까요? 흔히들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감동으로 받아서 적은 글이라고 정의합니다. 환언하면, 하나님의 계시(revelation or God’s talks)를 적어놓은 글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성경 속에서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저는 두 가지를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하나님을 발견합니다. 둘째, 인간을 발견합니다. 저의 생각을 쉽게 설명을 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사람에게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입장을 한번 헤아려보도록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 글들입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사람의 인생을 진지하게 들여다보고 있는 글들입니다. 다소 생소하게 들릴지 몰라서 조금 설명을 더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생각은 마치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너무 고차원적이고 폭이 넓고 입체적이어서 사람이 함부로 가늠할 수가 없습니다(55:8-9). 사도 바울의 용어 그대로 그 길이와 넓이와 높이와 깊이를 모두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3:19).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조주께서 계속 새로운 창조를 해나가시면서 그 새 일 행하심의 방향성을 사람들에게 사전에 전달해주고 있습니다(48:5-7). 하나님의 사람들, 곧 선지자들을 통해서 미리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공의의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생명과 사망, 그리고 복과 저주를 공평하게 베풀고 계시지만 하나님께서는 한 가지 소원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2:13). 그것은 아무쪼록 사람들이 죽음이 아니라 생명을, 저주가 아니라 복을 선택하기를 간절하게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30:19-20). 공의의 하나님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게 알아달라고 하는 마음이 성경 속에 진하게 담겨 있습니다(12:30-31, 요일4:7-11).

둘째로, 사람들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재단(裁斷, 혼자서 판단하고 재판하는 것)하시고 모든 일을 다 알고 계신다고 전제하고 있습니다. 사실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분명히 그러하실 것입니다(1:8).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절반의 이해라고 하겠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인생을 부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한평생인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가변적인 것입니다. 비록 100년 안팎의 짧은 기간에 불과하지만 그 속에는 선택의 순간들로 가득 차있습니다. 그래서 한없이 신비롭고 매력적입니다. 창조주가 사람에게만은 하나님의 고유한 형상과 모양을 부여하고 있습니다(1:26). 그 뜻은 창조주가 지니고 있는 판단의 모습과 내면적인 선택의 자유가 인간에게 창조 때부터 주어져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괜히 만물의 영장(靈長, 영혼을 가진 어른)’으로 불리어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유의지와 책임의식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유일한 창조물입니다. 사람만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인생을 살아낼 수도 있고 동시에 그러하지 아니할 수도 있습니다(22:12, 13:22, 12:7, 14:21). 따라서 하나님께서 바라보고 계시는 사람들의 인생은 실로 드라마틱한 것입니다. 한시도 창조주가 눈을 뗄 수가 없는 것이 사람들의 인생살이입니다. 마치 어린 자식을 물가에 내어놓은 부모님의 심정으로 사람들의 인생을 깊이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그러한 묘사가 풍성한 것이 바로 성경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때에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자신의 인생에 대한 성찰이 한층 깊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보다 완전한 이해라고 하겠습니다.

서두에 너무 길게 설명했습니다마는 위와 같은 관념을 가지고 들여다보게 될 때에 비로서 엘벧엘의 하나님을 심도 있게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결코 하나님은 강제적으로 야곱의 가족을 벧엘로 끌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야곱에게 충분한 시간과 기회 그리고 만족할 만한 여건을 제공해주었습니다. 하란에서 야간도주를 했을 때부터 그러했습니다; “길르앗에서 장인 라반의 공격을 막아 주었으며 얍복 시냇가에서는 숙적 에서의 원한을 풀어주었습니다”(31:24, 32:29, 33:4, 16). 그렇다면 의당 야곱은 요단 강을 넘어 가나안 땅으로 들어와서 벧엘의 하나님을 찾아 와야만 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정반대로 행동했습니다. 자신의 벧엘에서의 서원을 잊어버리고 숙곳에서 몇 년간 목축으로 큰 돈을 벌었습니다(33:17). 그리고 세겜 성 교외에 저택을 마련한 야곱은 한 세상을 제멋대로 부자로 사는 재미에 빠져서 하나님을 자신의 수호신 정도로 취급하고 있습니다(33:18-19). 감히 창조주 하나님을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우상쯤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관념이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는 용어 속에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33:20).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야곱의 멱살을 잡아서 바로 벧엘로 끌고 오지를 아니했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 야곱의 선택을 끝까지 지켜보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세상 재미에 빠지고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있는 야곱이 장차 맞이할 위기를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때가 오면 과연 야곱이 어떠한 선택을 할 것인가? 그것이 하나님의 뜨거운 관심입니다. 그래서 몇 년 동안이나 지켜보았습니다. 드디어 세겜 사건이 발생합니다(34:1-29). 야곱은 도저히 자신의 능력으로는 살 길이 막연해지자 마침내 하나님에게 기도하게 됩니다(34:30-35:1). 늦었지만 그것이 유일하게 사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된 야곱이 청결한 몸과 마음으로 벧엘의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달려오고 있습니다(35:1-5). 그 결과 신앙회복의 길에 들어선 야곱의 감격이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나면서 그의 인생 가운데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그 대목에 대한 모세의 기록이 다음과 같습니다; “야곱과 그와 함께한 모든 사람이 가나안 땅 루스 곧 벧엘에 이르고 그가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의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거기서 그에게 나타나셨음이더라”(35:6-7).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벧엘로 야곱을 찾아 온 이유(35:8)

 

 야곱은 얍복 시냇가에서 형제상봉을 하였지만 자신이 가나안 땅에 가까이 왔다는 소식을 아버지 이삭의 집에 알리지 아니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 대신에 형 에서가 인편으로 아버지의 집에 기별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야곱은 아버지 이삭의 집에 그동안 있었던 큰 변화를 모두 알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얍복 시냇가에서 형제상봉이 이루어졌다고는 하지만 야곱은 한시라도 빨리 에서를 떠나 보내려고 몸부림을 친 사람입니다(33:10-16). 그러므로 부모님의 안부도 제대로 묻지 아니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 결과 그는 부모님의 근황을 모르고 있습니다. 다만 아버지 이삭이 현재는 헤브론 지역에 살고 있다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벧엘의 하나님을 만난 후에 계속 남행하여 헤브론에 도착하여 아버지 이삭의 집에 도착하였다고 모세가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35:27).

 그렇다면 지난 27년 세월 동안에 부모님에게는 어떠한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요? 첫째가 이미 밝혀진 그대로 부모님이 이사를 한 것입니다. 그 옛날 야곱이 부모님의 집을 떠났을 때에는 그 장소가 브엘세바입니다(28:10). 그곳에서 동북방향으로 43km나 떨어져 있는 헤브론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헤브론에는 이삭의 부모님의 무덤이 있습니다. 노년의 이삭이 헤브론 막벨라 굴로 이사한 것은 아내 리브가의 근황과 관련이 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둘째, 야곱의 어머니 리브가가 별세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삭은 아내 리브가가 운명하였기에 그녀를 부모님이 안장되어 있는 헤브론 막벨라 굴에 장례를 지냈습니다(49:31). 그리고 아예 헤브론으로 이사하여 그 막벨라 굴 가까이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35:27). 그런데 그 모친의 별세소식을 야곱이 미처 듣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어머니의 유모였던 드보라를 벧엘에서 만나고 있기 때문입니다(35:8).

아버지 이삭은 맏이 에서를 통해서 둘째 야곱이 하란에서 자수성가를 하여 가나안으로 들어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무겁습니다. 둘째 아들 야곱을 특히 사랑했던(25:28) 아내 리브가가 이미 세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살아 생전에 야곱이 다시 보고 싶다고 발버둥을 쳤던 아내입니다. 리브가는 그저 며칠만 떨어져 있으면 야곱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으로 쉽게 생각하고서 그를 하란으로 떠나 보냈습니다(27:44-45). 그런데 20년이나 세월이 지났지만 야곱은 금의환향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고향에서 야곱을 생전에 만나보기 위하여 애를 태우던 리브가가 그만 운명하고 맙니다.

그녀를 막벨라 굴에 장사를 지내면서 이삭이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또 몇 년간의 세월이 흐르고 나서야 비로서 야곱의 소식을 에서를 통해서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이삭은 한없이 야곱이 집에 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15:20, 10:21). 그런데 야곱은 헤브론에서 65km나 북쪽으로 떨어져 있는 세겜 지역에 자리를 잡고서 고향을 찾아올 생각을 전혀 하지를 아니하고 있습니다(33:18-20). 속이 깊은 이삭은 차남 야곱의 행동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형 에서가 여전히 두려워서 감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지를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32:11, 33:13-17). 그래서 아내의 유모였던 드보라를 야곱에게 보내고 있습니다. 드보라는 세겜으로 가는 도중에 다행스럽게도 벧엘에서 야곱을 만나고 있습니다(35:8a). 그녀는 숨가쁘게 어머니 리브가의 죽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나서는 마치 아테네의 최초의 마라톤 선수처럼 전령의 임무를 완수하고서는 그만 벧엘에서 숨을 거두고 맙니다.

야곱은 갑자기 이중적인 슬픔을 맛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어머니 리브가의 별세의 소식을 너무나 늦게 듣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죽음을 전하고 나서 유모가 금방 숨을 거두고만 것입니다. 자신이 불효자였음이 너무나 가슴이 아픕니다. 이제 겨우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용서를 받았는데 바로 그 다음에 너무나 큰 인생의 슬픔을 맛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머니 리브가 대신에 유모 드보라를 자기 손으로 벧엘 도토리 나무 아래에 묻고서 그곳에서 대성통곡을 하고 있습니다(35:8b). 벌써 105세의 노인이 되어 있는 야곱의 눈에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나온 세월이 너무나 애통하고 절통합니다. 유모의 죽음을 맞이하여 비로서 어머니 리브가를 위하여 애곡을 하고 있는 야곱의 울음소리가 벧엘 상수리 나무 아래에서 온 세상으로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것을 애곡의 상수리 나무’, 알론바굿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3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