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 제190강(창35:9-12)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년 2월 11일(화)
벧엘에서 하나님이 야곱에게 복을 주시는 이유와 아브라함의 경우(창35:9, 22:12-19)
창세기를 보면, 야곱의 경우와 그의 조상인 데라의 경우가 흡사합니다. 두 사람이 모두 하나님의 명령을 잊어버리고 세상의 재미에 한동안 푹 빠져서 지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데라의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고향인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변방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서 그곳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라고 명령하셨습니다(창11:31). 그러나 데라는 중간인 북부 시리아 땅에서 더 이상 전진하지를 아니했습니다. 그가 ‘하란’이라고 이름을 붙인(창11:28) 밧단아람의 땅을 개발하여 신도시를 만드는데 골몰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엄청난 개발이익을 얻기 위하여 데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데라의 사명을 그의 장자인 아브람과 장손인 롯에게 대신 수행을 하라고 명령을 하십니다(창12:1-4). 데라는 그의 상속자인 장자와 장손이 자신을 하란에 남겨두고 떠나버렸지만 여전히 반성하지를 아니합니다. 그는 고향에서 둘째 아들 나홀을 불러 올려서 후계자로 삼고서 끝까지 하란에서 세상재미를 보다가 죽게 됩니다(창11:32, 22:20-24, 24:10, 28:5, 29:4-6).
야곱의 경우도 그러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의지하여 장인 라반의 집을 탈출하여 가나안으로 향했습니다(창31:3, 13). 벧엘에서의 서원을 지킬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야곱을 전적으로 도와주시고 있습니다. 길르앗 산에서 라반의 추격을 벗어납니다(창31:24, 55). 얍복 시냇가에서는 숙적 에서의 원한관계도 청산이 됩니다(창33:4, 16). 이제는 가나안으로 들어가서 벧엘의 하나님을 만나고 그곳에 제단을 쌓은 후에 남부에 계시는 아버지 이삭을 만나면 됩니다. 그런데 야곱은 그만 세상재미에 빠져버립니다. 숙곳에서 목축을 하여 더 큰 부자가 됩니다(창33:17). 요단 강을 건너서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는 남행을 하지 아니하고 반대로 북쪽 세겜으로 가서 돈 쓰는 재미에 푹 빠져서 지내고 있습니다(창33:18-20). 그러다가 소위 ‘세겜 사건’을 만나게 됩니다(창34:1-10, 25-29). 그 때 멸문의 위기를 느끼게 된 야곱이 하나님께 다시 매어 달립니다(창34:30-35:1). 하나님의 처방이 음성으로 들려옵니다. 남쪽 벧엘을 찾아가서 애초의 서원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야곱은 세겜성 바깥에 이방신상들과 귀고리 등을 묻어버리고 벧엘로 도망을 칩니다(창35:2-5).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벧엘에 도착을 하여 제단을 쌓고 ‘엘벧엘’의 하나님을 만나고 있습니다(창35:6-7). 동시에 그곳으로 찾아온 어머니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로부터 모친의 별세 소식을 들은 것으로 보입니다. 소식을 전하고 연로한 유모가 그곳에서 별세를 하자 너무나 마음이 아파서 통곡을 하고 있습니다(창35:8).
바로 그 때에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야곱 앞에 현신을 하십니다(창35:9). 그리고 이미 야곱에게 약속하셨던 축복을 다시 선언하시고 있습니다(창35:10-13). 모세가 기록으로 남기고 있는 그 대목이 좀 이상합니다. 먼저 기록부터 살펴봅니다;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지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창35:9-10). 이상한 곳은 세 군데입니다; 첫째, 야곱은 밧단아람에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온 지가 4-5년이나 지났습니다. 그 동안 쭉 세겜 지역에서 잘 지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제서야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왔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둘째,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셨다고 적고 있는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인간의 모습으로 현신한 적이 야곱의 경우에는 전례가 없기 때문입니다. 셋째, 얍복 시냇가에서 이미 하나님의 사자로 보이는 어떤 사람이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부르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었습니다(창32:24-30). 그런데 똑 같은 말씀이 다시 나타나고 있습니다. 왜 반복이 되고 있는 것일까요?
첫째로, 남자가 군대복무를 마치고 만기제대를 하게 되면 전역신고를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 전역신고를 통하여 군인이 민간인으로 그 신분이 바뀌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보시기에도 마찬가지라고 하겠습니다. 애초에 벧엘에서 야곱의 서원을 들으시고(창28:20-22) 그를 끝까지 보호하고 도와주시기로 언약을 하신 하나님이십니다(창28:15, 31:3, 13). 객지생활 20년 동안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셨습니다(창31:7-13, 24). 얍복 시냇가에서 형 에서까지 물러가게 됩니다(창32:1, 33:4, 16). 그 때 야곱은 서원의 장소 벧엘로 돌아와서 일종의 ‘전역신고’를 하나님께 하면 됩니다. 그런데 그 신고식을 하지 아니한 자가 바로 야곱입니다. ‘세겜 사건’을 만나게 되자 비로서 자의반 타의반(自意半他意半, 자기의 뜻과 남의 뜻이 각각 절반씩임)으로 살 길을 찾아서 벧엘로 도망을 쳐온 자가 야곱입니다. 약 7년 정도 그의 전역신고가 늦은 셈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만시지탄이지만 야곱의 신고를 받고 있습니다. 그 표현이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라고 하겠습니다(창35:9a).
둘째로, 그 동안 야곱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의 모습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꿈속에서 나타나셔서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벧엘에서 돌 베개를 하고서 야곱이 잠을 자다가 하나님을 꿈속에서 만난 것입니다(창28:13-15). 둘째, 꿈속에서 하나님이 사자를 보내어서 자신의 말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 사자의 말을 듣고 야곱이 실천함으로써 부자가 되고 있습니다(창31:11-13). 셋째, 하나님의 음성만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야곱은 그 말씀을 의지하여 과감하게 라반의 집을 떠나서 길르앗으로 도망을 치고 있습니다(창31:3, 13). 그리고 세겜을 탈출하여 벧엘로 도망을 치고 있습니다(창35:1-7). 넷째, 하나님의 사자가 사람의 모습으로 야곱 앞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낮에는 하나님의 군대로 야곱을 만나고 있습니다(창32:1-2). 밤에는 야곱과 씨름을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얍복 시냇가에서 한밤중에 이루어지고 있는 일입니다(창32:24-30). 다섯째로, 하나님께서 직접 사람의 모습으로 야곱 앞에 현신을 하시고 또한 축복을 주시고 있습니다. 검토한 결과, 벧엘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야곱 앞에 비로서 처음으로 나타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모세는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창35:9b)라고 적고 있는 것일까요? 그 의미는 한 가지의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꿈 속이나 생시나 별로 상관이 없이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현신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자가 전해 준 말도 모두 하나님의 말씀임에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미 야곱에게 여러 번 나타나신 셈입니다. 비록 선지자의 말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성령의 감동으로 전해지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그 효력은 동일한 것이라는 사실을 여기서 덤으로 알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셋째로,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직접 현신하여 말씀하시는 것은 최종적인 결정사항이며 다시는 변개함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만큼 중요합니다. 벧엘에서 야곱이 서원을 지키고 정확하게 신고식을 마치고 나자(창35:7) 그 동안 야곱에게 주겠다고 했던 이스라엘에 대한 축복이(창28:13-15, 32:28) 다음과 같이 최종적으로 확정이 되고 있습니다;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지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창35:9-10),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 하시고 하나님이 그와 말씀하시던 곳에서 그를 떠나 올라가시는지라”(창35:11-13).
끝으로, 똑 같은 경우가 야곱의 할아버지인 아브라함의 경우에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고 그를 지켜주겠다고 여러 번 천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아브라함과 동행하시면서 가나안과 애굽 그리고 그랄 땅에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드러내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아노라”(창22:12)고 말씀하신 장소는 모리아 산의 번제 장소입니다. 아브라함과 동행을 하시면서 그가 진실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는지 아니면 세상의 재미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지 끊임없이 점검을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최종적으로 모리아 산에서 아브라함이 시험을 치르고 있습니다(창22:1). 그 최종시험에 통과를 하게 되자 비로서 ‘하나님 경외자’라는 칭호를 얻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의 조상’이 되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그 장소에서 처음으로 ‘여호와 이레’의 제물이 나타나고 있습니다(창22:13-14).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그 숫양으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었던 약속의 아들 이삭의 목숨이 구원을 받고 있습니다. 아울러 그 동안 아브라함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셨던 모든 언약이 총체적으로 다시 선언되고 있습니다. 그것이 최종적으로 확정이 된 선언문이며 그 내용이 다음과 같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창22:16-18). 한 마디로, 아브라함에게 최종적으로 확정해준 그의 자손에 대한 복이 벧엘에서 야곱의 최종적인 복으로 다시 선언되고 있다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확정적으로 다시 선언되고 있는 하나님의 구체적인 복의 내용(창35:10-12)
구체적으로 세 가지의 복으로 확정이 되고 있습니다; 첫째로, 족장인 야곱이 하나님의 방백으로서 대 족장이 되고 있습니다. 그 이름이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은 왕과 같은 대 족장입니다. 비록 그의 형 에서가 에돔 족속의 위대한 조상이 되고 큰 세력을 가진 족장이 되고 있지만(창36:40-43) 그보다 더 위대한 인물이 야곱입니다. 그 이유는 헤브론 골짜기에서 북방 세겜 지역까지 그리고 더 나아가서 도단까지가 전부 이스라엘의 목축지가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창37:14-17). 지리적으로 보자면, 가나안 남부에서 중부에 이르는 모든 땅을 포괄하고 있습니다. 무려 남북으로 115km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지배하고 있는 유목민이 바로 이스라엘 집안입니다. 야곱은 훗날 스스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또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사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시려니와, 내가 네게 네 형제보다 세겜 땅을 더 주었나니, 이는 내가 내 칼과 활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서 빼앗은 것이니라”(창48:21-22).
둘째로, 이스라엘의 12아들들이 모두 족장의 반열에 오르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스라엘 12지파의 조상들이 되고 있습니다. 훗날 출애굽을 하게 될 때 이스라엘 자손의 수는 장정만 하더라도 60만 대군에 해당이 됩니다(출12:37). 남녀노소를 모두 계산한다면 그 4배에 해당하므로 약 240만명의 민족이 됩니다. 세월이 더 지나서 다윗의 시대가 되면 그는 30세에 그의 지파인 유다 지파의 왕으로 등극하게 됩니다(삼하2:4). 하나의 지파가 하나의 왕을 옹립할 수 있는 시대가 전개되었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7년 남짓 지나자 전체 이스라엘 12지파의 유일한 왕으로 즉위하게 됩니다(삼하5:3-5). 그러므로 다윗 왕조를 염두에 둘 때에 이스라엘에게 주고 있는 다음의 축복은 정확한 예언입니다;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창35:11). 물론 훗날 이스라엘의 역사를 참고하자면, 야곱의 허리에서 나오는 왕 가운데에는 다윗의 후손들만이 아니라 요셉지파의 왕들(왕상12:20), 잇사갈 지파의 왕들(왕상15:33), 그리고 베냐민 지파에서 나타나는 사울 왕(삼상11:15)까지가 포함이 될 것입니다. 특히 마지막으로 나타나는 왕중왕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셋째로,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겠다고 하나님이 언약하신 땅을 모두 야곱의 후손에게 주겠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 땅은 이 세상에서의 최대영역이 다음과 같이 이미 예언되어 있습니다;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창15:18). 한 마디로, 메소포타미아와 애굽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중근동의 땅을 말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 드넓은 땅을 정복하고서 대 제국을 세운 자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위대한 정복왕인 다윗입니다(삼하 제8장). 이스라엘의 자손들은 지금도 그 때의 시온의 영광을 잊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메시아도 다윗 왕의 후계자로 오는 위대한 정복왕일 것이라고 상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시오니즘은 만민구원을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상과는 정반대라고 하겠습니다(마26:52-56). 하지만 한 가지 기억을 해야만 되는 다른 영토의 개념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주고 있는 땅의 범위가 다윗에게 주셨던 중근동의 패권국에 불과하다고 한다면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얻게 된 영토는 그 정도의 규모가 아닙니다. 그 영토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총망라하고 있는 광대한 땅입니다(사65:17-25, 계21:1-14). 새로운 하나님의 생명의 질서가 지배하고 있는 새로운 우주 그 자체라고 하겠습니다(요18:36, 눅17:21).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새로운 지경이 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끝으로, 그런데 일찍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셨던 마지막 큰 축복의 내용이 이스라엘의 경우에는 빠져 있습니다. 그것은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창28:14, 26:4, 22:18)는 구절입니다. 벧엘에서 하나님께 서원을 처음으로 했을 때에는 분명히 들어 있었던 그와 같은 만민구원의 복이 왜 여기서는 최종적으로 생략이 되고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아무래도 이스라엘 민족의 훗날의 역사 때문으로 보입니다. 그들이 끝까지 고수하고자 했던 유대교가 세상 모든 족속에게 복을 줄 수 있는 종교와 사상이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유대교는 선민인 이스라엘의 극단적인 민족우월사상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선민인 이스라엘만이 이방인들을 종으로 부리고 지배할 수가 있다는 선민사상이 바로 시오니즘입니다. 그 같은 이스라엘 민족이기에 만민구원사상을 가진 예수 그리스도를 처형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요11:47-53). 결론적으로, 땅의 모든 족속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복을 전하고 있는 민족은 유대교인이 아니라 기독교로 개종을 하고 있는 새로운 이스라엘의 백성들이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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