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창세기 강해 제187강(창34:25-29)(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12. 23. 20:20

창세기 강해 제187(34:25-29)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28()

 

탐욕 때문에 맞이하는 제삼일의 비극(34:25)

 

세겜 성 안에는 그 지역의 지배족속인 히위 족이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성문 앞에서 열린 부족회의에서 하몰과 추장 세겜의 말을 들었습니다(34:20). 남자들이 할례만 받으면 히브리인 야곱의 집안과 통혼도 하고 하나의 민족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34:22). 엄청난 부자인 야곱의 재산과 그 집 여자들의 아름다운 모습이 눈에 어른거렸습니다(34:19, 23). 그래서 성문으로 출입하는 히위 족 모든 남자들이 일시에 할례를 받았습니다(34:24). 그들은 탐욕 때문에 포경수술로 인한 고통과 출혈을 미처 깊이 생각하지를 못했습니다. 최소한 일주일은 아파하면서 거동이 불편합니다. 그리고 그 고통은 제삼일에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그 사실을 정확하게 계산하고 미리 잘 알고 있는 자들이 있습니다. 바로 히위 족의 남자들이 할례만 받으면 한 민족이 될 수 있다고 긍정적인 답변을 해준 디나의 남자 형제들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호기를 만났습니다. 그들의 계산대로 제삼일이 되자 세겜 성내의 모든 히위 족 남자들이 잘 걷지도 못하고 사타구니를 아파하고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그 중심부위에 통증이 배가되니 도무지 힘을 쓸 수가 없습니다. 그 때가 정확하게 시술한지 제삼일입니다. 드디어 야곱의 아들 가운데 칼을 잘 사용하고 잔인한 둘째 시므온과 셋째 레위가 야간에 급습을 합니다(34:25, 49:5-7). 집안의 종들을 모두 동원하여 불시에 암습을 하여 히위 족 모든 남자들을 죽여버립니다. 물론 젊은 추장 세겜과 그의 아버지 하몰이 우선적으로 죽임을 당합니다(34:26).

여기서 제삼일이 강조되고 있습니다(34:25). 그 이유는 그 반대의 의미를 지니는 제삼일이 그 후의 역사 가운데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1:17, 12:40, 8:31).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맞이했던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예언대로 제삼일에 무덤에서 부활을 하고 있습니다(10:34, 16:9). 나사렛 예수의 복음이 하나님의 뜻에 합치가 된다는 증거가 부활사건으로 드러나게 됩니다(2:31-32, 1:17). 그 후부터 제삼일은 예수님의 부활과 생명의 말씀의 능력을 의미하는 상징적인 날짜가 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본문에서의 제삼일은 정반대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탐욕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는 날짜입니다. 그리고 묘한 계책으로 상대를 속이고 살해하며 모든 재산을 약탈하는 무자비한 행위의 상징이 되고 있습니다. 상호비교를 해보자면 결론은 다음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제삼일의 의미가 달라지고 있습니다. 제삼일에 발생하고 있는 세겜 사건과 같은 잔인한 역사가 청산이 되고 새로운 부활과 생명살림의 시대가 제삼일에 열리고 있습니다. 역사 가운데 그와 같은 변화를 가지고 오고 있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하겠습니다”.

 

분노와 보복은 살인과 약탈을 정당화 할 수 있는가?(34:26a, 27-29)

 

자신들의 누이인 디나가 이방인 히위 족장 세겜에 의하여 능욕을 당하고 감금이 되어 있습니다(34:2, 26). 뻔뻔하게도 세겜 족장은 그의 아버지를 내세워서 디나를 자신에게 아내로 달라고 뒤늦게 반강제적으로 혼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디나의 남자 형제들은 피가 거꾸로 솟고 있습니다. 엄청난 분노는 보복하고자 하는 심리를 동반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격분에 휩싸이지 아니하고 냉정하게 무서운 음모를 꾸밉니다. 할례를 받으면 그렇게 하겠다고 제안합니다. 그리고 제삼일이 되자 할례를 받은 히위 족 남자들이 맥을 쓰고 있지 못하는 틈을 노립니다. 야곱의 두 아들 시므온과 레위가 종들을 이끌고 세겜 성을 야간에 기습합니다(34:25a). 일시에 불구상태에 빠져있는 히위 족 남자들을 모두 도륙하고 맙니다(34:25b). 그 뿐만이 아닙니다. 야곱의 다른 아들들도 모두 뒤늦게 참전을 하고 전리품을 모조리 챙겨옵니다(34:27). 세겜 섬 히위 족속의 모든 여자들과 어린 아이들 그리고 모든 재산들을 약탈한 것입니다(34:28-29). 그것은 실로 냉정하면서도 무서운 보복행위입니다.

인간적으로 분노에 휩싸이는 것은 당연합니다. 자신의 누이가 능욕을 당하고 인질로 붙잡혀있다고 하는데 분노하지 아니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래서 가능하다면 보복을 하고자 하는 마음도 십분 이해가 가능합니다. 그런데 형평의 법칙에 비추어보면, 야곱의 아들들은 그 보복을 음모에 의해서 그것도 수천 배로 되갚고 있습니다. 누이를 욕보였다고 하여 수 천명의 히위 족속 남자 모두를 도륙하고 그들의 처자식을 모두 포로로 잡아온 것입니다. 물론 재산도 전부 약탈하고 맙니다. 그것은 집안의 수치를 참지 못하고 전쟁을 치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분노하고 엄청난 보복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정당한 행위일까요?

하나님의 본심을 드러내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정반대의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5:43-46). 예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자라야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대목을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 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12:19-21).

결론적으로, 분노와 보복은 살인과 약탈을 정당화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분노를 증폭시키고 더 엄청난 보복을 초래할 따름입니다. 그와 같은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방법은 창조주에게 그 분노와 보복을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 대속의 은혜와 무덤 속 부활의 능력으로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실 것입니다. 그 사실을 믿고서 원수를 용서하며 원한을 풀기 위하여 기도하는 자들이 바로 성도들입니다. 그와 같은 측면에서 야곱의 아들들은 아직 성도들이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단 하나 호소력 있는 명분은 인질이 된 디나 구출작전(34:26b)

 

디나의 남자 형제들의 지나친 보복행위를 유일하게 합리화해줄 수 있는 구절이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칼로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을 죽이고 디나를 세겜의 집에서 데려오고”(34:26). 갇힌 자를 해방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58:6). 그러므로 무력으로 디나를 감금하고 있는 자들을 물리치고서 그녀를 구해오는 것은 정당방위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 후에 발생할 수 있는 히위 족속들의 추격을 염두에 두고서 미리 예방차원에서 계책을 써서 밤중에 기습을 하고 모조리 죽여버리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지나친 행위입니다. 인질구출작전이 아니라 전쟁을 치른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녀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가문의 치욕을 복수하고 인질로 잡혀있는 가족을 구출한 것은 떳떳하고 정당한 행위라고 주장을 할지 모르겠습니다(34:26-27, 31).

그렇지만 종족의 말살을 경험하게 된 히위 족속의 입장에서 바라보자면 그 반대입니다. 작은 일을 가지고 엄청난 보복행위를 전쟁으로 자행한 것입니다. 수천 명의 사람을 살해하고 처자식과 재산을 모조리 약탈을 하였으니 그것은 잔인하고도 무도한 행위입니다. 복수와 인질구출을 명분으로 동원하여 엄청난 전리품을 챙기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이방민족인 히위 족속까지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입장에서 바라보자면(5:45) 아무래도 이스라엘이 질책의 대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복음은 훗날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방인 구원으로 먼저 열매를 맺고 있는지도 모릅니다(11:29-32, 8: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