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창세기 강해 제185강(창34:8-17)(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12. 23. 00:29

창세기 강해 제185(34:8-17)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27()

 

야곱의 집안에 대한 세겜과 하몰의 설득작업(34:8-12)

 

야곱 집안에 대한 세겜과 하몰의 설득작업은 3단계로 진행이 되고 있습니다; 첫째, 통혼의 요청과 상호이익의 강조 둘째, 영주권 부여와 공존공영하자는 제의 셋째, 많은 혼수 겸 보상 등입니다. 그 세가지 내용이 창세기 제34장 제8절에서 제12절 사이에 다음과 같이 설명이 되고 있습니다; 첫째로, 통혼에 대한 요청은 세겜 성의 추장인 세겜이 야곱의 딸 디나에게 연정을 품고 있기에 아내로 달라고 하는 데서부터 언급이 되고 있습니다(34:8). 세겜 성에 여인들의 화려함과 몸치장을 구경하러 나갔다가 졸지에 젊은 세겜 추장의 눈에 띄어서 봉변을 당하고 정조까지 빼앗겨버린 디나에 대한 이야기는(34:1-2) 일체 생략이 되고 있습니다. 힘으로 여자의 몸을 빼앗는 것 정도는 다반사이므로 언급할 필요도 없다고 하는 태도입니다. 단지 디나에게 세겜 추장이 연정을 품고 있으니 그것을 고맙게 여기고 시집을 보내라는 요청입니다. 한 마디로, 일체 사과의 내용이 없습니다. 무언가 첫 번째 단추부터가 잘못 끼워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상적인 대화와 원만한 설득의 시작이 아닙니다. 그저 힘으로 밀어 부치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둘째로, 서로 통혼을 하게 되면 영주권을 주겠다는 것입니다(34:9-10). 서로 딸을 주고 받으며 사돈 사이가 되면 당연히 세겜 지역에 살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해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돈에게 그냥 땅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땅을 사기 위해서는 돈을 지불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싼 값이 아니며 바가지(rip-off)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남의 나라에 가서 영주권을 얻어서 살게 되면, 비싼 대가를 지불해야만 합니다. 일반적으로 영주권을 주는 대신에 늦게 오는 이민자들에게 땅과 부동산을 비싼 값으로 팔고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자리를 잡고 살고 있는 사람들이 늦게 이민을 오는 신참들의 보따리를 털어 먹는 그것이 일종의 텃세인 셈입니다. 그러므로 야곱과 같은 떠돌이 부자 집안이 세겜 지역에 영주권을 얻어서 정착을 하는 것은 히위 족속들에게 이득이 되는 것입니다. 그 점은 나중에 세겜 추장이 자신의 동족을 설득하는 강력한 무기가 됩니다(34:23).

셋째로, 세겜은 그래도 약간 디나의 아버지와 남자 형제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내비치고 있습니다. 그 대목이 다음과 같습니다; “나로 너희에게 은혜를 입게 하라. 너희가 내게 말하는 것은 내가 다 주리니, 이 소녀만 내게 주어 아내가 되게 하라. 아무리 큰 혼수와 예물을 청할지라도 너희가 내게 말한 대로 주리라”(34:11-12). 세겜의 말은 혼수와 예물을 빙자하고 있으나 그 속뜻은 보상을 해주겠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디나에게 육체적 정신적인 피해를 입혔으며 디나의 집안에 대해서도 수치를 안겨주었다는 의식이 은연 중에 배어 있는 내용입니다. 직접 피해에 대한 배상이라고는 말하고 있지 아니하지만 과다한 혼수와 예물의 청구에도 응하겠다고 언급함으로써 손해배상이 아니라 손실보상의 차원에서 조치를 해주겠다는 뜻입니다.

세겜은 최대한의 성의표시를 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동안 수많은 여자를 건드렸지만 그 정도까지 상대편에게 호의를 베푼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상대편에 대하여 잘 모르고서 오판을 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쌍둥이 형 에서에게 지고서는 못사는 성격이며 체질입니다. 그러한 기질을 그대로 대물림하고 있는 자들이 야곱의 아들들입니다. 그들은 세겜의 그 정도의 호의에는 외눈 하나 깜짝하지를 아니하고 있습니다. 받은 피해를 수만 배로 반드시 갚아주고야 말리라는 보복정신에 투철한 그들입니다”. 그들은 차제에 세겜 성의 지배족속인 히위 족속을 모두 도륙을 내고자 계책을 꾸미고 있습니다(34:13). 누구보다도 머리 회전이 빠른 이스라엘 자손들이 순식간에 제시하고 있는 조건은 한 마디로 무시무시한 것입니다(34:13-17).

 

그러나 할례를 행하고 이스라엘처럼 되기를 요구하고 있는 야곱의 아들들의 책략의 의미(34:13-17, 17:12, 10:16, 30:6, 15:1-2)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과 하몰에게 그들의 유일한 조건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세겜 성의 히위 족속들 가운데 남자들이 모두 할례를 받기만 하면 세겜 추장의 제안을 모두 수용하겠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은 할례를 받지 아니한 족속과는 통혼을 할 수가 없다는 뜻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할례를 받지 아니한 족속과 몸을 섞는 것은 수치가 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34:14-15). 그 뿐만이 아닙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세겜 추장을 비롯한 히위 족속들이 이익에 눈이 멀어서 자신들의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도록 마지막 말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할례를 받기만 하면 서로 딸들을 주고 받으며 종국에는 한 민족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비싼 값에 히위 족속들의 땅을 사겠다는 의사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야곱 집안의 큰 부가 모두 히위 족속에게 서서히 흡수될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겠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만약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디나를 세겜에게 시집을 보내지 아니할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그녀를 집으로 데리고 와서 함께 온 가족이 세겜을 떠날 생각임을 주지시키고 있습니다”(34:16-17).

야곱 아들들의 단호한 의사표시는 젊은 세겜 추장에게 효과를 발휘하고 있습니다. 세겜은 처음부터 디나의 독특한 아름다움에 이끌려서 앞뒤를 가리지 아니했던 사람입니다. 이제 그녀도 얻고 야곱 집의 재산도 싹쓸이를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하였는데 무엇을 주저하겠습니까? 젊은 세겜 추장의 성급한 판단과 무모함이 얼마 지나지 아니하여 세겜 성 히위 족속의 전멸을 초래하게 됩니다. 참고로, 야곱 아들들의 제안이 지니고 있는 무서운 점을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나이가 들어서 할례를 받는다고 하는 것은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는 위험한 수술입니다. 민감한 부위의 일부를 잘라내는 것입니다. 자연히 출혈과 고통이 심합니다. 따라서 할례는 태어난 지 8일만에 사내아기에게 행하도록 율법이 정하고 있습니다(17:12, 21:4).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야곱의 아들들이 구태여 히위 족속들에게 그 조건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저의는 뻔합니다. 그들이 고통 중에 있을 때에 기습을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34:25-26). 그들의 숨은 의도에 대하여 모세가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과 그의 아버지 하몰에게 속여 대답하였으니 이는 세겜이 그 누이 디나를 더럽혔음이라”(34:13).

둘째로, 할례는 이방인 가운데 선민 이스라엘이 돈을 주고서 사온 종들에 국한하여 실시하는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모세가 다음과 같이 명시하고 있습니다; “너희의 대대로 모든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또는 너희 자손이 아니라 이방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막론하고 난지 팔 일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포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17:12-14). 그러므로 히위 족속들이 할례를 받는다면 그 순간부터 그들은 이스라엘의 종의 신세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적으로는 그러하지 아니할지 몰라도 이스라엘 자손들의 생각으로는 그와 같이 해석을 할 것입니다. 그와 같은 사고방식이 훗날 초대교회시대에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기독교로 개종한 본토 유대인들이 초대교회 내에서 그렇게 주장한 것입니다(15:1).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 들여서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율법을 지켜야만 하며 특히 할례를 받아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과연 그러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와 같은 유대교적인 선민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항목을 달리하여 그 점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셋째로, 창세기는 할례를 받을 수 있는 대상에 대하여 두 번이나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 그리고 이스라엘의 종으로 팔려온 이방인들입니다(17:12-13). 그러므로 할례를 받는다고 하는 것은 한편으로 이스라엘의 종으로 팔려왔다는 의미가 됩니다. 이스라엘의 시오니즘은 그와 같은 관념 위에서 성립이 되어 있습니다.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이스라엘의 종이 되는 길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방인들을 이스라엘의 종으로 삼아서 구원을 베풀어주라는 것이 창조주의 뜻이라고 잘못 생각하는 자들이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실로 오만한 선민우월사상이 바로 시오니즘입니다. 시오니즘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선전하고 있는 것이 유대교이므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유대인들을 꾸중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깨닫고 그 죄 사함의 은혜를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목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율법인데 그 본뜻을 유대교인들이 변질시켰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가진 유대인들만이 선민이며 할례를 받지 아니한 이방인들은 장차 선민들의 종이 될 것이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해석하고 있는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대하여 예수님은 그들의 잘못을 질책하고 만민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본 뜻을 이 세상에 다시 전파하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자신의 생애를 통하여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려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의 본래 취지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진리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하여 죽음에서 부활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옳다는 사실을 증명한 사건이 바로 주님의 부활이며 승천입니다(1:14-15, 6:62, 1:17). 그와 같은 진리를 성령께서 오셔서 오늘 날도 증거하고 있습니다(14:16-17, 26, 16:13-15). 따라서 육체적인 할례나 율법이 생명을 살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선민과 그들의 종이 되고 있는 이방인들이라는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을 강조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며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2:28-29). 사족을 더하자면 마음에 할례를 행하라는 말은 벌써 모세가 그의 오경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입니다(10:16, 30:6, 24:44).